PART 2•국내 실내악계 현실 진단

우리도 세계적인 실내악단을 가질 수 있을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솔로 위주의 우리 음악계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절제해야 비로소 음악이 나오는 분야는
늘 ‘국내용’이었다. 이 땅에서 실내악이 살기 위해서는 교육 시스템의 근본적인 수정이 절실하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가 미국은 물론 유럽 여러 국가에서 벤치마킹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에서 제공하는 이 혜택을 받는 5세부터 20세까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이 극빈층이다. 따라서 균등분배의 실현이 가장 큰 덕목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기막힌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는 누클레오라 불리는 221개의 지역 센터에서 운영하는 오케스트라가 500개를 훌쩍 넘는다. 즉 최연소인 다섯 살 어린이가 받는 생애 첫 음악수업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앙상블 훈련이 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학생들은 독주자가 되는 교육 대신 무조건 악단 안에서 남의 소리를 들으며 함께하는 하모니 위주의 음악수업을 받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 가운데 개인기가 출중한 학생은 자신이 원하면 세계무대로 진출하게 된다. 구스타보 두다멜·에딕손 루이스·디에고 마테우스 등이 그들이다. 나아가 보통 오케스트라 안에 3중주·4중주·5중주를 비롯해 체임버 앙상블까지 함께 활동하는 것을 감안하면 베네수엘라에는 이미 수천 개의 실내악단이 개미군단처럼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음악의 저변이다.
우리는 어떨까? 일찍이 우리 음악계의 가장 큰 병폐인 독주자 위주의 그릇된 관행은 세계적인 스타 연주자 몇 명만을 만들어냈을 뿐 오케스트라나 실내악단과 같이 서로를 배려하고 절제해야 비로소 음악이 나오는 분야는 늘 ‘국내용’이었다. 일단 음악을 한다고 하면 개인 레슨을 당연시하는, 첫 출발부터가 기형적인 형태로 시작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조금만 재능을 보이면 ‘제2의 사라 장·장한나·김선욱’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꾼다.
요즘은 오케스트라 단원을 지향하는 연주자가 늘긴 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음악 하는 사람들의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교수였다. 대학 졸업 후 유학을 다녀와서 시간강사를 거쳐 전임교수가 되는 공식이 성공의 척도로 자리매김했다. 일부이긴 하지만 그 꿈을 이루면 기를 쓰고 연마했던 테크닉은 하향곡선을 그리며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2000년부터 지켜본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만 봐도 그렇다. 나이가 제법 있는 소위 ‘교수 연주자’들은 언제나 젊은 신인 연주자에 비해 낮은 점수를 받곤 했다. 나이가 들수록 연륜에서 배어나오는 속 깊은 음악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피아니스트 백혜선은 연습에 전념할 수 없다며 서울대 교수직을 스스로 내려놓기도 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니 실내악은 애초 우리 음악도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대일 레슨이 몸에 배고, 이것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한다.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와 같은 전문 음악학교의 경우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일반 학교에서 음악을 전공으로 준비하는 학생에게 실내악 활동은 꿈도 꿀 수 없다. 여기에 대학의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클래스는 학점을 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섯 살 때부터 머리나 귀가 아닌, 가슴과 몸으로 앙상블을 익힌 베네수엘라 학생을 따라잡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점수따기 식의 기교 위주 음악교육은 특히 실내악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현악 4중주단의 교과서적 사례 탐구

현악 4중주가 무엇인가? 음악 장르의 최고위 레벨에 자리한, 물질보다는 정신이 우선하는 완벽한 형태를 지닌 고품격 음악이 아닌가. 하지만 음악의 소비자들도 생산자 못지않게 문제였다. 자극적이고 기교적인 면을 우선시하는 청중의 외면은 현악 4중주가 학교에서나 연주되는 현실로 몰았다. 연주만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전업 앙상블은 꿈도 꾸지 못 한다. 창단 연주회를 가진 트리오, 현악 4중주단은 2회째의 연주회를 감당하지 못하고 해체돼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쉽게 창단하고 쉽게 해체한다. 이러한 1회성 연주는 음악의 질을 더욱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반복해 실내악으로부터 청중의 발길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덕분에 세계 정상급 현악 4중주단이 내한해도 극소수 애호가를 제외하고는 공연장을 찾지 않는다. 벌써 7년 전인데, 2007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4중주단이 내한했을 때 1층 객석조차 드문드문 비어 있는 모습은 우리 음악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부끄러운 현장이었다.
‘실내악의 꽃’인 현악 4중주, 본고장으로 먼저 눈을 돌려보자. 현재까지 현악 4중주단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활동한 악단은 러시아의 보로딘 4중주단이다. 1945년 구소련 시절 창단해 무려 69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창단 멤버인 첼리스트 발렌틴 베를린스키는 2005년 60주년 기념공연에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로부터 2년 더 자리를 지켜 62년을 현악 4중주에 바쳤다. 믿기지 않는 위대한 거장이 아닐 수 없다. 내한 무대에서 베를린스키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과 벅찬 감동이 밀려온 경험은 누구나 가졌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은 1971년부터 2008년까지 37년을 이어왔다. 비올리스트 토마스 카쿠스카가 암으로 쓰러진 뒤 제자 이자벨 카리지우스가 바통을 이어받았으나 이들은 앙상블에 무리가 온다고 판단해 해체했다. 이들에게 멤버 교체는 곧 해산을 의미한다. 음악적인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에서 시작된 이들의 고별 연주회는 2007년 5월 31일 예술의전당에 들러 베토벤의 ‘대푸가’를 마지막 곡으로 들려주며 한국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2008년 7월 16일 베이징 국립공연예술센터에서 37년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살아서 신화가 되는 순간이었다.
스메타나 4중주단은 나치 치하의 1943년, 프라하에서 창단해 1989년까지 오로지 음악 하나만 부여잡고 지탱했다. 1965년에 창단한 영국의 자존심 린지 현악 4중주단은 2005년 7월 그들의 고향 셰필드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열었다. 고령으로 인해 더 이상 앙상블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상의 자리에서 음악을 위해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비올리스트 로저 비글리가 교육에 전념하겠다며 떠난 것을 제외하고는 40년 동안 단 한 명의 멤버 교체도 없었다. 부부 사이보다 더한 결속을 강조하는 현악 4중주단의 교과서와도 같은 사례였다. 미국의 에머슨 현악 4중주단은 30년 동안 네 명이 한솥밥을 먹었다.
한 단체의 활약으로 성공을 논하기엔 이르다
해외에 견주어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것은 우리 곁에 금호 현악 4중주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90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후원으로, 당시로서는 국내 최정예 멤버로 구성되어 드디어 우리도 세계에 내보일 수 있는 현악 4중주단이 생겼다는 사실에 환호작약하며 장밋빛 미래를 점쳤다. 사실 금호 현악 4중주단의 공연을 갈 때마다 필자는 행복했다. 음반으로만 듣던 현악 4중주의 진한 매력을 우리 무대에서 우리 연주자의 실연으로 듣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2002년 가을 12년 만에 해체돼 많은 아쉬움을 주었다. 당시 고(故) 박성용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은 잦은 단원 교체로 인한 불협화음이 세계 수준의 음악성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해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가족보다 가깝게 앙상블을 연마해야 할 4중주단에서 툭하면 멤버가 개인적인 이유로 탈퇴를 반복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때 음악계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하릴없이 금호 현악 4중주단의 공중분해를 목도해야 했다. 그나마 실낱같은 명맥을 이어오던 세계적 수준의 악단이었다. 그렇다. 독주자 위주의 잘못된 우리 음악교육 시스템은 아직껏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실내악단을 배출하지 못했다. 메이저 음반사에서 녹음된 한국 연주자의 실내악 음반을 여태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한 순간 눈에 드러나는 곳에만 신경을 쓴 것이다.
금호 현악 4중주단 해체 이후 6년이 흐른 2008년 어느 날 노부스 콰르텟이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지 않았다. 어차피 1~2년 지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젊은 꽃미남 친구들’은 굵직한 국제 실내악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고 다니더니 어느덧 7년의 역사를 일구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필자는 노부스 콰르텟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들과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지만 무대에서 늘 만나며 이들이 금호 현악 4중주단을 넘어 세계로 진출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노부스 콰르텟은 그 꿈을 앞당겨 하겐 현악 4중주단과 벨체아 현악 4중주단이 소속돼 있는, 그리고 예전에는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이 소속돼 있던 세계 굴지의 매니지먼트인 지메나워의 가족이 되어 국내보다 세계 무대를 더 바쁘게 누비고 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노부스 콰르텟을 빼면 우리 현실은 너무도 초라하다. 노부스 콰르텟이 맹렬히 약진하던 2012년 말 중견 연주자들이 힘을 합쳤다. 서울시향 부악장 두 명, 비올라 수석, 그리고 첼리스트 박상민이 서울 스트링 콰르텟을 창단한 것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이들의 창단 연주회에서 접했던 높은 음악성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지난해 봄에는 역시 서울시향 단원들이 뜻을 모아 콰르텟 크네히트가 첫발을 디뎠다.
국내에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스코티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같은 전문 악단은 전무하다. 그 와중에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연주로만 생계를 이어가는 전업 악단은 아니지만, 음악감독 김민을 중심으로 510회가 넘는 공연을 소화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 초청공연에 꾸준히 참가하는 것은 물론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와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을 예술고문으로 영입해 한 단계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솔리스트로 연주를 해야만 성공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의 말처럼 이 땅에서 실내악이 살기 위해서는 교육 시스템의 근본적인 수정이 절실하다. “얕게 마시면 취하지만 깊게 마시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라는 알렉산더 포프 비평론의 말처럼 깊게 마셔야 음악이 완성되는 실내악이야말로 우리 음악계의 풀뿌리요, 근본이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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