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에는 수많은 장례식 음악과 추모 음악이 있다.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한 것이지만 죽은 자가 어떻게 음악을 듣겠는가. 결국 죽음을 담은 음악이란 살아남은 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의 음악인 셈이다
음악사에는 수많은 장례식 음악과 추모 음악이 있다.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한 것이지만 죽은 자가 어떻게 음악을 듣겠는가. 결국 죽음을 담은 음악이란 살아남은 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의 음악인 셈이다
예고된 것이든 아니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한 생이별이든 간에 죽음이란 언제나 슬프고 고통스럽다. 고인을 애도하는 것 못지않게 유가족의 찢어진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위로가 필요한 법이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쌍곡선으로 수놓인 삶의 여정에서 음악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열 마디 위로의 말보다 한 줄기 선율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굳이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사라 브라이트만과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른 ‘타임 투 세이 굿바이’나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마이 웨이’도 빈소의 적막감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음악이다. 서양음악에 나타난 죽음의 이미지는 크게 장례식을 위해 작곡된 음악, 장례식에서 사용된 음악, 음악 장르로서의 ‘장송 행진곡’, 죽음을 표현한 음악, 오페라에 나타난 죽음, 수난곡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공포로, 때로는 달콤함으로 가득 찬 레퀴엠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대표적인 장례식 음악은 진혼 미사, 즉 레퀴엠이다. 통상적인 미사 악장 외에도 ‘진노의 날’ ‘최후 심판의 나팔 소리’ ‘기억하소서’ ‘슬픔의 날’ ‘천국에서’ ‘나를 구하소서’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라틴어 가사로 되어 있으며, 베르디·베를리오즈·드보르자크·뒤뤼플레·포레·존 러터 등의 작품이 있는데 모차르트 ‘레퀴엠’이 가장 유명하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미완성 유작으로 쥐스마이어가 나머지를 완성했다. 포레의 ‘레퀴엠’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자장가 같은 달콤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1902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음이란 고통스러운 경험이 아니라 무덤을 넘어 행복을 향한 동경, 유쾌한 해방이라고 말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하이든·베토벤·훔멜·슈베르트·쇼팽 등 유명 작곡가의 장례식 때 연주된 것으로 유명하다. 1840년 나폴레옹 1세 이장식 때 프랑수아 아브네크의 지휘로 연주됐고 1964년 보스턴 성 십자가 성당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 추모 미사 때도 연주했다. 지휘자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는 케네디가 모차르트처럼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곡을 골랐다고 말했다. 1999년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서거 10주기를 맞아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모차르트 ‘레퀴엠’을 연주했다. 9·11 테러 때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연주되었다. 살리에리·구노·케루비니·베르디 등의 장례식 때는 각자 자신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제목이 암시하듯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가운데 브람스가 여기저기서 발췌해 구성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이다.
떠난 자를 위한 마지막 음악, 장송 음악
존 필립 수자의 ‘골든 스타 행진곡’은 1919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전에 헌정한 작품이다. 폴란드의 현대 작곡가 루토스와프스키의 ‘현을 위한 장송곡’은 1955년에 예정된 헝가리 태생의 버르토크 10주기 추모 행사 때 연주할 목적으로 위촉한 것이다. 하지만 1958년에야 뒤늦게 완성되어 ‘바르샤바의 가을’ 음악제 때 초연되었다.
리카르드 노드로크는 노르웨이 국가의 작곡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1866년 24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절친으로 지냈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리카르드 노드로크를 위한 장송 행진곡’을 작곡했다. 처음엔 피아노곡으로 작곡했다가 관악 합주를 위해 편곡했다. 그리그는 이 8분짜리 소품을 무척이나 아꼈다. 연주 여행을 할 때도 혹시 객지에서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품속에 악보를 꼭 넣고 다녔다. 그리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장례식 때 이 곡을 멋지게 연주해달라고 했다. 친구 할보르센은 그리그의 장례식 때 그 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연주했다.
1997년 다이애나 영국 황태자비 영결식 때는 베르디의 레퀴엠 중 ‘나를 구하소서(리베라 메)’와 더불어 존 타브너의 ‘아테네를 위한 노래’,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가 연주되었다. 타브너의 작품은 자전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친구 아테네를 추모하며 쓴 곡이다. 영국에 엘가의 ‘님로드’가 있다면, 미국에는 새뮤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있다. 여기에 ‘신의 어린 양’ 가사를 붙여 합창으로 부르기도 한다.
2004년 6월 10일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장례식 때는 엘가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Op.20 중 ‘라르게토’, 차이콥스키 관현악 모음곡 4번 ‘모차르티아나’ 중 ‘기도’,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브람스 ‘독일 레퀴엠’ 중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하이든 교향곡 44번 일명 ‘슬픔’ 중 2악장 아다지오 등이 연주되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중 2악장 ‘장송 행진곡’이나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 Op.35의 2악장 ‘장송 행진곡’은 특정한 사람이나 장례식을 위해 쓴 행사용 음악이 아니다. 느리고 짧게 반복되는 악구, 좁은 음역에서 하강하는 단조 선율이라는 음악적 성격에 주목한 작곡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베토벤과 쇼팽이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장례식에서 자주 연주된다. 두 곡 모두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영결식 때 연주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것은 댈러스 현지 시간으로 낮 12시 30분이었다.
같은 날 오후 2시에 정기 연주회를 할 예정이었던 보스턴 심포니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황금닭’ 대신에 베토벤 교향곡 ‘영웅’ 중 2악장 ‘장송 행진곡’을 연주했다. 공연 10분 전에 악보를 나눠주고 연습도 없이 즉석에서 연주했다. 지휘자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는 무대 위에서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하면서 프로그램 변경 사실을 알렸다. 처음 비보를 접한 청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레너드 번스타인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추모 연설을 했고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연주를 전국에 방영했다.
쇼팽의 ‘장송 행진곡’은 작곡가 비제, 그리그는 물론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스탈린의 장례식 때도 연주되었다. 이 곡은 수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에 등장했고, 국내에서도 매년 6월 6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리는 현충일 추념식의 헌화 분향 시에도 연주된다.
독일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는 비올리스트로도 활동했다. 그는 1936년 1월 22일 런던 퀸즈홀에서 자신의 비올라 협주곡을 초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이틀 앞둔 20일 조지 5세가 서거하는 바람에 연주가 취소되고 말았다. 그는 대신 비올라 독주와 현악 합주를 위한 ‘장송음악’을 하루 만에 완성해 BBC 스튜디오에서 BBC 교향악단과 라이브 방송으로 초연했다.
구노의 ‘마리오네트의 장송 행진곡’은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을 위한 소품이다. 1955년부터 10년간 TV 프로그램 ‘알프레드 히치콕 프레젠트’의 주제음악으로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한스 폰 뷜로는 쇼팽의 전주곡 Op.28-20에 ‘장송 행진곡’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오페라나 극음악에 등장하는 장송 음악도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에드가’에는 ‘레퀴엠’ 장면이 등장하고 베를리오즈 ‘트리스티아’에는 ‘오필리어의 죽음’이 나온다. 푸치니 ‘투란도트’에는 류를 위한 장송 행진곡이 흐른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사울’에도 장송 행진곡이 나온다.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중 ‘지그프리트의 죽음과 장송 행진곡’은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유해가 18년 만에 영국에서 고향 드레스덴으로 이장될 때 연주되었고, 영화 ‘엑스칼리버’에도 삽입됐다. 코다이 모음곡 ‘하리 야노스’ 중 ‘전쟁과 나폴레옹의 패배’는 장송 행진곡으로 조용히 끝난다. 그리고 프로코피예프 모음곡 ‘키제 중위’ 중 ‘키제의 장례식’, 그리그 극음악 ‘페르귄트’ 중 ‘오제의 죽음’도 꼽을 수 있다.
음악 작품에 죽음을 담아낸 것으로는 슈베르트 가곡 ‘죽음과 소녀’ ‘마왕’이 있고,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홀스트의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죽음의 송가’, R.슈트라우스 교향시 ‘죽음과 변용’, 리스트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죽음의 무도’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브리튼의 ‘프랑크 브리지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10의 9변주,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1번 4악장, 차이콥스키 현악 4중주 3번 Op.30의 3악장,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2번 Op.26의 3악장,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15번 Op.111의 5악장과 피아노를 위한 ‘아포리즘’ Op.13 중 5악장, 막스 브루흐 ‘러시아 주제에 대한 모음곡’ Op.79b 중 6악장, 말러 교향곡 1번 3악장과 교향곡 5번 1악장, 멘델스존 ‘무언가’ Op.62 등이 ‘장송 행진곡’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리스트 ‘순례의 해’ 3권 ‘장송 행진곡’은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위한 곡이고, 부소니 ‘투란도트 모음곡’에도 장송 행진곡이 나온다. 요제프 수크의 모음곡 ‘동화’ Op.16 중 3악장은 장송 음악이다. R.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도 장례식 장면이 등장한다.
브리튼 레퀴엠 교향곡 Op.20은 1940년 작곡자가 26세 때 쓴 곡이다. 오든의 시에 곡을 붙였다. 일본 정부는 브리튼과 R. 슈트라우스·자크 이베르 등에게 건국 기원 2,600년 기념 작품을 위촉했는데 나중엔 가톨릭 전례의 라틴어 제목 ‘분노의 날’ ‘영원한 안식’ 등을 각 악장 제목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위촉을 철회했다. 악보를 보냈는데도 작품료도 주지 않았다.
라흐마니노프와 막스 레거의 교향시는 화가 아놀트 뵈클린이 그린 ‘죽음의 섬’에 영감을 받은 것이다. 존 코릴리아노 교향곡 1번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친구에 대한 추모와 더불어 에이즈에 대한 경고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