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이 대나무 숲에 들어갑니다. 대나무에 그의 시선이 가 닿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붑니다. 그 순간을 저서 ‘풍경과 상처’에 이렇게 담습니다.
“한 그루의 대나무를 들여다보는 인간의 시선은 분열되어 있다. 대나무는 비어 있고 단단하고 곧다. 인간은 악기를 만들 수도 있고 무기를 만들 수도 있다. 인간의 시선이 대나무의 속 빔에 가 닿았을 때 인간은 거기에 구멍을 뚫어 피리를 만든다. 저 자신이 비어 있는 존재들만이 음악을 이루는 소리를 생산해낼 수 있다. 인간은 그 나무의 속 빔과 단단함에 의지해서 세계와 시간을 흔들어 연금하려는 욕망을 키우기 마련이고, 그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된 운명일 것이다.”
나무에 닿는 인간의 시선이 어떻든지 간에 ‘속 빔’을 안은 나무는 악기로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무의 ‘속 빔’에 바람이 가 닿을 때, 그 나무는 악기로의 가능을 꿈꾸며 징징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관악기는 악기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제 몸속에 동그란 공간을 품습니다. 긴 직선으로 뻗은 플루트와 피콜로, 오보에와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과 베이스 클라리넷, 바순과 콘트라바순, 색소폰은 동그란 제 몸통을 통과하는 바람을 음악으로 변신시킵니다. 숨과 바람이 제 몸을 훑고 세상에 나올 때, 제 소리를 더 넓게 퍼뜨리기 위해 ‘벨’이라 불리는 나팔을 그렇게 둥그렇게 깎았는지도 모릅니다.
트럼펫·트롬본·호른·튜바는 제 몸을 꼬고 비틀어 그 안에 수많은 바람과 숨을 저장합니다. 인간의 숨결이 닿은 쇠는 그 특유의 단단함으로 음악의 세계를 크게 호령합니다. 때로는 무뚝뚝한 남자가 건네는 안개꽃다발처럼 그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제 자신이 차가운 금속의 존재라는 걸 은밀히 숨길 때도 있지요.
우리는 오케스트라에서, 독주회에서, 실내악에서 수많은 관악기를 접합니다.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속의 관악기는 군생하되 서로 엉키거나 비비적거리지 않고, 드문드문 태어나 개별자로서 곧게 제 소리를 뻗어 올립니다.
플루트는 순수와 청초함 그리고 관능을, 오보에는 커피 향 같은 기품을, 클라리넷은 ‘꿀’라리넷이라 부르고 싶은 달콤함을, 잉글리시 호른은 목가적 풍경을, 바순은 묵직한 콧소리를, 색소폰은 도회의 세련됨을, 호른은 아늑한 숲을, 트럼펫은 쨍쨍한 찬란함을, 트롬본은 수직으로 내리꽂는 폭풍을, 튜바는 이 모든 소리가 상승하며 치달을 때 낮은 세상에 홀로 남아 지키겠노라는 어떤 의지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비제의 ‘아를의 여인’ 모음곡 중 미뉴에트의 플루트, R. 슈트라우스 교향시 ‘돈 후안’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의 오보에,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3악장의 잉글리시 호른, R.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의 클라리넷,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의 바순, 번스타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적 춤곡의 색소폰,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2악장의 호른, 베르디 ‘아이다’ 중 ‘개선행진곡’의 트럼펫,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의 트롬본,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5악장의 튜바 소리를 들을 때면 관악기의 소리는 현악기가 군(郡)을 이뤄 만든 섬으로 모여들어 노래하는 바다 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소리는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명랑하고 쾌활한 노래 같기도 합니다.
이제 ‘객석’이 마련한 관악기 하나하나를 만나볼 시간입니다. 악기가 되어 인간의 손에 쥐어지기를 원하는 나무의 꿈이 목관악기에 담겨 있고, 제 단단함을 감추고 부드러움을 내세워 신사가 되고 싶어 하는 교묘한 마음을 금관악기 속에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꿈이 인간의 기술력과 어떻게 만나 제 스스로 변신을 꾀했는지를 살피는 것도 악기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