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 치는 박재천의 너울거리는 몸짓이 턱시도를 ‘나빌레라’ 펄럭인다.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노소영은
회로판에 자수를 놓듯 납땜에 골몰한다. 그들이 포개놓는 전통과 미래
한 프레임 안에 전주세계소리축제 집행위원장 박재천과 아트센터 나비의 관장 노소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이 만남을 단순히 축제의 수장과 미술관 관장의 조우로만 한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한쪽이 전통음악과 소리를 대변한다면 다른 한쪽은 디지털 문화와 미디어아트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박재천이 아날로그의 사도라면, 노소영은 디지털 문화의 첨병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결국에는 지켜야 할 ‘과거’와 일구어야 할 ‘미래’의 공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뒤집어보자. 타악 연주자·즉흥음악가인 박재천은 넘나듦에 익숙하고 그 과정에서의 느낌을 ‘실용화’해 미래의 음악을 적극적이고 치밀하게 일군다. 드럼을 이용하되 한국 장단의 호흡을 녹여 넣은 연주법 ‘코리안 그립’에는 이러한 그의 성격이 잘 묻어 있다. 그리고 이 주법은 박재천이 재즈와 전통음악·월드뮤직을 넘나들 때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는 전통음악으로 미래의 음악사를 새롭게 일궈가는 척후병이다.
노소영은 전통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다. 첨단 디지털 문화를 근간으로 한 아트센터 나비에서 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기반으로 ‘항연 2013’ 포럼을 열었고 디지털과 상반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공존시키기 위해 전통예술을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도 틈틈이 진행한다.
두 사람의 인터뷰가 이뤄진 곳은 장충동에 위치한 타작마당. ‘통섭인재양성소’라 불리는 이곳의 실내는 첨단시설을 갖췄지만 앞마당에는 장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말이지 전통과 현대가 ‘통섭’하고 똬리를 튼 듯 수장의 마인드가 공간으로 표상화되어 있었다.
각자 손에 쥔 도구와 챙겨야 하는 시대적 감수성은 다르지만, 안팎으로 닮은 두 사람의 조우가 앞으로 문화예술계에 무엇을 내놓을지 궁금해하며 인터뷰의 첫 문을 열었다.
송현민 오늘의 주제는 전통예술과 미디어아트입니다. ‘객석’의 다이알로그 시리즈를 진행해오면서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분야의 인터뷰이와 마주한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먼저 어떤 계기로 두 사람이 만나게 됐는지 궁금한데요.
박재천 지난 4월 아트센터 나비에서 진행하고 있는 ‘크리에이터 나이트’ 프로그램에서 ‘한국 전통으로의 방황’이라는 강연을 맡으면서 인연이 닿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지휘자 구자범, 디자이너 안상수, 사진가 겸 영화감독인 닐스 클라우스 등 다양한 예술가가 함께하는 강연 프로그램이에요.
송현민 그럼 노 관장은 ‘박재천’이란 인물을 어떻게 아셨나요?
노소영 하늘의 인연?(웃음) 아트센터 나비의 큐레이터들은 늘 새로운 예술가를 찾아서 교감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기획·제작하려고 노력해요. 열심히 한 끝에 이렇게 인연이 된 거 같아요.
송현민 아트센터 나비는 예술가에게나 관객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베푸는 걸로 소문이 자자한데.
노소영 사실 혜택을 받는 건 저희예요. 아트센터 나비 주위에는 대부분 일렉트로닉 아트 계열의 예술가죠. 하지만 시선을 넓히면 우리나라의 여러 분야에 뛰어난 예술가가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송현민 최근의 관심사나 주력하는 작업이 뭔가요?
노소영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생산 문화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근래에 그에 관한 오픈 소스라든지, 소스 코드가 붕괴된 덕에 많은 정보와 기술력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작가가 아니어도 뭔가를 만들 수 있는 현상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거든요.
박재천 저는 솔직히 촉각과 울림을 우선시하는 타악기 연주자인 데다 리얼 타임 연주자로 미디어 문화에 취약하고 음악적으로도 반감을 갖고 있었어요. 애써 몸으로, 동물적인 노력으로 음악을 일군만큼 디지털 문화는 모든 걸 쉽게 생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송현민 디지털 문화가 몸에 맞지 않는다는 거군요.
박재천 솔직히 현대인으로서 맞춰져 있기는 하죠. 하지만 테크놀로지에 의해 구현된 음악의 어디까지를 음악으로서의 감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던 때가 있었어요. 사실 미디어를 응용한 창작현장에 등을 돌려도 실생활에서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과 단절되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잖아요.
노소영 우리는 기계와 동거하며 살죠. 미디어 복합체로 살고 있는 거예요. 일렉트로닉 아트는 그런 삶을 적극적으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것이고요. 때로는 이에 관한 화두에 맞닥뜨리기도 해요. ‘인간이 로봇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가능하다는 사람이 많아지고, 때로는 로봇하고만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어요. 그러나 전자 시대 이전의 모습을 통해 순도 높은 인간미를 느낄 때도 있어요. 이런 것을 일깨워주는 데 있어 박 위원장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봐요. 테크놀로지에는 온갖 효과를 줘도 알고리즘을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단조로움이 있거든요.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인간의 감정이죠.
송현민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란 어떤 존재일까요?
노소영 디지털 테크놀로지 이전의 순도 높은 아날로그적인 문화를 보여주면 다 놀라는 시대인 거 같아요. 박 위원장의 음악도 그렇다고 봐요. 예를 들어 아트센터 나비에서 기획한 ‘조우encounter’ 프로그램의 첫 시작은 마지막 변사라 불리는 최영준 선생을 초빙해 무성영화 ‘아리랑’을 변사극으로 본 것이죠. 아날로그적으로 구현된 형식인데 많은 이가 감동을 받더군요. 이 힘을 이용한 예술을 제대로 하면 정말 대단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시간이었어요.
▲ 박재천
1961년 출생. 대학에서는 작곡을 전공했고 이후 재즈, 전통음악 등을 섭렵했다. 재즈·전위음악가들과 19장의 앨범 작업을 했으며 40개국에 초청되어 교류를 가졌고 피아니스트 미연과 ‘미연&재천 듀오’로 활동 중이다. 2005년부터 서울즉흥연주집단(Seoul Meeting Free Music)의 감독직을 맡고 있으며, 2013년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작 프로그래머 역임 후, 2014년부터 전주세계소리축제 집행위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 www.sorifestival.com
전통이든 첨단이든 결론은 ‘사람’이다
송현민 디지털 문화와 미디어아트의 주원료는 전기인데, 전기가 없는 시대의 미디어아트의 운명은 뭘까요?
노소영 미디어아트는 없을 겁니다. 역사에 전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지금의 디지털 혁명 이상으로 천지개벽이었죠.
박재천 역사를 보면 철기시대·석기시대 등 도구의 변천으로 시대를 나누곤 하는데 저는 20세기는 문화적으로 ‘재즈의 시대’라고 봐요. 자유주의의 발로와 재즈에서의 즉흥의 탄생이 20세기 문화적 혁명인 거 같아요. 문명적으로는 디지털 시대인 것이고.
노소영 네. 디지털이 시작하는 시대.
송현민 미디어아트와 전통음악이 서로 닮았다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나요? 디지털 문화의 특징 중 우연성과 상호작용은 클래식에 비해 즉흥성과 비정형적인 성격이 강한 전통음악과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어쩌면 그 특징들이 두 분의 이야기를 통하게 하는 공통분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박재천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태동은 ‘즉흥’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후에 규격과 틀이 만들어진 거죠. 제가 아까 말한 재즈의 시대란 즉흥성과 그 언어가 대두된 시대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은 기득권과 권력의 틀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통음악도 그동안 품고 온 즉흥의 문화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 원칙이라고 보고요. 미디어아트에도 특유의 즉흥성과 우연성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정형화되어 ‘제품’과 ‘상품’이 되어가고 있는 추세죠. 이걸 예술이 풀어 더한 자유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소영 동감해요. 일렉트로닉 아트에선 노이즈라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일렉트로닉 아트는 짜인 대로 가는 알고리즘에서 시작합니다. 전자예술가들이 주목하는 건 잘 짜인 알고리즘이 아니고 노이즈의 영역이에요.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그걸 극대화한 거고요. 피아노 앞에 주자가 가만히 앉아 있고 관객이 뒤척이는 소리와 기침 소리가 연주장을 채우죠. 예술에서 즉흥성과 노이즈가 없으면 예술이 아닙니다.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묘한 불안감이라고 할까요?
송현민 예전에 어떤 예술학교 총장이 그걸 연주한 적이 있었습니다. 연주를 시작하지 않는 주자를 보고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기보다는 관객들이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있었어요. 웃음이 나오는데 서로들 소리는 못 내고. 이제 ‘4분 33초’는 음악사의 ‘고전’이 되었다 보니 누구나 다 알고 있어서 ‘우연성을 찾아볼 수 없는 우연성 음악’이 되었더군요.
노소영 ‘4분 33초’ 말고 ‘4분 39초’를 하든지 했어야 했는데(웃음).
박재천 아까 질문에 전기 이야기가 나와서 재밌는 게 떠올랐어요. 제 동료 중 오토모 요시히데라는 이가 있어요. 며칠 전에 백남준미술관에 강연차 내한했더군요. 요시히데는 기타 연주자였는데 하루아침에 일렉트로릭 음악으로 돌아섰어요. 제가 “당신은 기타를 잘 치는데 왜 돌아서서 이런 걸 하고 있냐”고 물었죠. 돌아온 대답이 “나는 이 사운드를 통해 인류가 하나가 될 줄 알았다”였어요. 지역마다 특수한 악기 소리를 넘어 보편적인 전자음을 통해 인류의 음악사가 하나가 될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 그가 일렉트로릭 음악을 20년 정도 하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게 아니다!”라는 겁니다. 전자음이라 할지라도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예요.
송현민 재밌는 대답이네요. 어떻게 보면 전기에도 국적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박재천 결국은 인간이, 인간의 감성이 하는 일이라는 거죠. 영화 ‘트랜스포머’의 컴퓨터그래픽 감독 제프 화이트도 최첨단 기법은 상상력을 구현하는 강력한 도구지만 그것 또한 인간과 인간의 감정이 조작하는 도구라고 하더군요. 결국 인간과 인간이라는 존재만의 특권인 ‘감성’과 ‘감정’에 의해 테크놀로지가 조정되는 겁니다. 저 또한 미디어를 응용해 작업할 때, 그 안에 수만 개의 소스가 있어서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걸 골라야 하기에 엄청 힘이 듭니다. 그것을 고르는 건 결국 ‘인간’인 제 자신이죠.
송현민 결국 ‘사람’이네요.
박재천 가끔 벨소리를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을 때가 있어요. 똑같은 휴대전화이지만 벨소리를 통해 사용하는 자의 감정과 선택의 감수성이 느껴져요. 자! 저한테 전화 한번 해보세요(잠시 뒤, 박 위원장의 스마트폰은 벨소리와 진동 없이 기기 뒷면에 부착된 전구를 통해 강렬한 불빛을 번쩍번쩍 내뿜는다). 제가 드럼에 앉아 있을 때는 벨소리와 진동은 무용지물이에요. 그런데 연습실 한쪽 구석에서 이렇게 번쩍번쩍하고 있으면 눈에 딱 들어와요. 이 전화를 손에 쥔 지 2년 정도 됐는데 이 애플리케이션을 발견한 건 며칠 전이에요. 연습 중 즉각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건 제 생활의 일대 혁명입니다.
우리의 예술은 소외를 지향한다
송현민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박 위원장에게 “가장 논해보고 싶은 주제가 뭡니까” 하니 “미디어아트와 전통예술의 소외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박재천 생각해보세요. 전통예술이나 미디어아트는 일상 속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임에도 소외된 존재입니다.
송현민 소외? 외면?
박재천 사실 우리는 전통문화와 예술을 통해 지금의 생활을 이루고 있는 많은 자양분을 섭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활 속의 전통 요소를 부각해 축제나 대회 등으로 공론화하려 하면 많은 이가 ‘그걸 뭣하러 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송현민 지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전통예술이 소외된 건 맞지만 미디어아트는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문화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우리의 일상이 된 스마트폰은 미디어아트를 통해 발견한 유희성과 예술성이 집적된 구현물 아닌가요?
노소영 미디어아트는 미디어를 사용하되 상업 분야에서는 ‘하지 않는 것’들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회로도가 있는데 선을 다르게 연결하다든지, 음악을 지지직거리는 소음의 음역으로 채운다든지 기존의 것을 비틀고 뒤집고 옆길로 새는 거죠. 그게 또 예술이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박 위원장이 이야기한 소외를 자처하는 거예요. 메인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노력인 거죠.
박재천 실험, 새로운 것에 대한 섭취와 적용이 상품화로 급격히 진행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인지 전통예술이나 미디어아트도 편리주의와 상품 개발에 급급해야 하는 건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노소영 포기하면 안 되죠. 우리는 레지스탕스니까(웃음). 메인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스스로 소외를 자처하는 거 같아요. 국악 또한 메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겠죠, 물론. 하지만 소외를 통해 생성되는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소리의 모색과 탐색으로서의 전주세계소리축제
송현민 제가 국악계에서 ‘박재천’이라는 인물을 뚜렷하게 접한 건 2011년 무렵인 거 같아요. 그 전까지 ‘박재천’이라는 존재는 좀처럼 형체가 잡히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박재천 그렇죠. 그 무렵 국악계에 본격적으로 나섰죠.
송현민 어떤 이유로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집행위원장직 제안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전주세계소리축제라는 단어 사이에는 ‘전통’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습니다. 즉, 전주세계‘전통’소리축제인 거죠. 그런데 박 위원장은 전통음악에서 잔뼈가 굵은 것도, 그리고 지금의 명인들만큼 ‘체급’이 된 것도 아닌데.
박재천 전통예술을 용용한 창작에는 물리적 방법과 화학적 방법이 있는 거 같아요. 지금은 차용과 섭취 등 화학적 작용에 의해 새로운 것이 나오는 때입니다. 제 자신도 이 생각을 30년 이상 지속시키고 있는데, 클래식·재즈 등에서 좋은 것을 차용·채용하고 취득·체득하여 우리 전통음악과 매칭해 어떻게 새로운 것을 만들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요새 유행하는 컬래버레이션이라는 단어에는 이 고민이 녹아 있습니다.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앞 세대의 ‘국악가요’ ‘퓨전’ ‘크로스오버’ 같은 말들은 지금의 고민이 담긴 ‘컬래버레이션’을 대체했던 단어들이죠.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제의가 들어왔을 때, 일단 전통예술은 제가 앞으로 깊게 발 담그고 싶은 것 중 하나였고, 동시에 ‘전통’을 중심에 둔 축제 자체가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낳을 큰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축제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걸 또 다른 이들이 가져다 쓸 수 있는 새로운 원소를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원소주의자입니다. 이번 축제를 통해서 많은 소재를 던져주고 그것을 갖다 쓰라고 하고 싶어요.
송현민 그럼 올해 전주세계소리축제는 그런 화두에 대한 해답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준비하고 있나요? 지난해 김형석·박칼린 집행위원장 시절에 프로그래머로서 제작·연출한 개막작 ‘아리아리랑 소리소리랑’은 말도 많았고, 한편으로는 인기도 많았습니다.
박재천 지난해 개막 무대는 8개국 가수들을 초빙해 그 나라의 감성을 느끼게 하고자 한 ‘비교 음악제’였죠. 이번 개막작은 판소리 심청가입니다. 소리 하나에 비주얼 이펙트(Visual FX, 시각적인 특수효과)란 영상적인 기법을 총동원해 현대적인 미디어를 다 끌어안아보려 합니다. 판소리라는 진하고 강한 고추장과 현대의 균형을 재어보겠다는 거죠.
송현민 아까 박 위원장의 답변 중 ‘차용’과 ‘채용’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는데. 인간의 인식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능력이 확장되기도 하죠. 미디어 문화의 발달은 융·복합을 쉽게 구현하게 하죠. 요즈음 공연예술계에서도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통해 수많은 소스를 차용하고 융·복합을 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정보를 다 인식하고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노소영 다 볼 수도 없고, 다 따라갈 수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아트센터 나비도 2000년 개관 당시의 테크놀로지 문화와 지금을 비교하면 엄청 많은 변화가 있다는 걸 체감합니다. 속도뿐만 아니라 흔히 융·복합의 생산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열매의 양도 많아졌죠. 제 자신도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생산된 것을 볼 때마다 ‘이 많은 걸 다 어디에 쓰나’ 혹은 ‘이걸 누가 보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회의에 빠졌던 때도 있었어요.
송현민 그 회의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노소영 회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아! 뭔가 새로운 것을 꾸준히 만드는 게 휴먼 네이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성이 아이를 낳듯, 인간은 뭔가를 자꾸 만들어내는 것이 본성이라고 생각해요. 생산에 대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과거에는 그걸 못했지만 지금은 그러한 기회와 환경이 오픈된 시대입니다. 음식도 작품도 모든 게 가능한 ‘긍정의 시대’죠.
박재천 같은 생각이에요. 2014년 지금, 이곳의 생명력은 창작이에요. 창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창작이 뜨거울 때 통섭이나 다른 장르에 대한 차용·채용도 활발해지는 거죠. 그래서 제 자신이 전주세계소리축제를 통해 꿈꾸는 게 있는데, 기예의 숙련도를 떠나 전통예술을 놓고 창작과 생산을 위해 고민하는 자를 찾아내는 겁니다.
송현민 그런 이들을 발굴하는 건 아트센터 나비의 주특기인데(웃음).
노소영 과찬입니다(웃음). 아트센터 나비도 그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예술가를 발굴한다는 건 일종의 보물찾기 같은 겁니다.
박재천 그 말이 딱 맞네요. 보물찾기!
노소영 신나고 재밌는 겁니다. 그런 작가를 만나 혼과 교감한다는 건. 그 맛에 큐레이터라는 고된 일을 하는 거 같기도 하고요.
▲ 노소영
1961년 출생. 대학에서는 섬유공학을 전공했고 이후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총감독, 서울예술대 디지털아트학부 조교수, 중국 칭화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초빙교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이사직을 맡고 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워커힐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했고, 2000년부터 아트센터 나비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아트센터 나비 www.nabi.or.kr
우리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
송현민 예술가의 발굴이나 생활 속에 녹아든 ‘전통예술’에 방점을 찍어 ‘전통’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 등은 사회와 문화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입니다. 끝으로 묻겠습니다.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노소영 명백합니다. 탈(脫)프로그램화, 즉 ‘저항’을 하는 겁니다. 한 사회를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때로 개개인의 인간성을 매몰시키기도 하죠. 그런 것에 숨통을 튀어주는 게 예술이라 생각합니다. 디지털아트는 탈(脫)프로그램화를 넘어 프로그램 자체를 바꿀 수도, 재(再)프로그램화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이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프로그래머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송현민 우리나라에서 예술의 역사가 진행되어오는 동안 예술가들이 탈프로그램으로서의 예술을 잘 실행해왔다고 생각하나요?
노소영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운 거 같습니다. 하지만 찾아보면 꽤 있죠. 1960년대에 서구에서만 볼 수 있었던 ‘플럭서스’나 ‘해프닝’ 사조를 실행했던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은 이해를 못했지만 나름대로 예술을 통해 사회의 숨통을 트는 역할을 했다고 봐요. 1980년대에는 민중예술이 있었고요. 그러나 그 ‘민중’의 코드가 정치권력과 합류해 프로그램화 되는 시점부터는 생명력을 잃었죠. 요새는 뭐가 있을까··· 아! 그러고 보니 싸이가 있네요(웃음).
박재천 성경을 잠깐 인용하자면 ‘두려워하지 마라’ ‘수고하고 노력하라’라는 말이 있어요. 예술은 자기 스스로를 증명하는 마지막 수단이라 생각해요. 연마의 과정에는 경제적인 문제 등 여러 고민이 있겠지만 노력이 쌓이면 언젠가 세상이 덜 두려워질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후배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하던 거 믿음을 갖고 계속해. 지금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 사회에 그것이 알려진다”라고 충고하고 격려해요.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향해 쏟다 보면 그 노력이 언젠가 넓은 사회와 연결되며 한 예술가가 크게 작동되는 순간이 옵니다.
송현민 밀실에서의 고민을 쌓은 개인이 광장의 군중과 접속되는 거군요. 노 관장의 이야기에서 나온 ‘탈프로그램화’란 어떻게 보면 예술이 사회에 삐딱선을 긋는 것인 거 같고, 박 위원장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예술가란 자기 세계에 갇힌 에고이스트로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둘 다 반사회적 행동과 인물입니다. 그런데 사회는 이러한 예술을 위해 지원과 정책을 해야 하는 걸까요?
박재천 돌연변이를 생산해야 하는 게 예술입니다. 지원과 정책은 지금 삐딱하게 나가려는 이들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여기 타일이 하나 있어요. 기술자들은 모가 나가면 그걸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 예술가에게 주어 어떤 모양으로든 조립해봐라 하면 새로운 모양의 또 다른 존재가 되겠죠? 정책과 지원은 모가 나간 타일을 보면 용납 안 합니다. 새로운 형태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당장 ‘제품’이 되지 않는 걸 못 견디는 거죠.
노소영 지원을 하되 스마트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토양과 자양분을 제공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예술가의 본성은 야성에서 출발하기에 그것을 조정하고 가두는 권력은 때로는 위험하다고 봐요. 그래서 그걸 뿌리칠 줄 아는 예술가의 의지도 중요한 거 같아요. 많이 외롭겠죠. 그래서 저는 예술가들이 현대사회의 순교자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박재천 스스로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
노소영 두려움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목숨을 내던질 사람들.
송현민 그런 이들을 좀 봤나요?
노소영 오래 기다렸는데, 이제야 제 주위에 그런 예술가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거 같아요.
송현민 그 예술가들에게 공통되는 특징들이 있을 텐데요.
노소영 아까 말한 야성.
박재천 그리고 가난.
노소영 맞아요. 가난하되 두려워하지 않는, 야성의 존재들이죠. 심지어 저는 그들의 후원자 위치임에도 아랑곳하지 않더라고요(웃음). 그런 야성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길을 문화적으로 뚫을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빌 게이츠·스티브 잡스가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사진 심규태
2014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공연 ‘淸 ALIVE’
전주세계소리축제(10월 8~12일)의 개막작 ‘淸 ALIVE’는 박재천 집행위원장이 총감독을 맡은 무대로 판소리 심청가를 원작으로 뮤지컬·콘서트·영화를 결합해 선보이는 초대형 무대다. 이에 대해 박재천 위원장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에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벅찬 감동과 만족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대마디 대장단’이라는 주제하에 전주한옥마을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일대에서 5일간 펼쳐질 이번 축제의 서두를 장식하는 ‘淸 ALIVE’는 10월 8일과 9일 이틀간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