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영국 신문들은 주말판이 더 볼거리가 많다. 주말이면 비닐 포장에 담긴 100페이지 분량의 두툼한 신문을 대형 마트나 편의점에서 사서 커피를 마시며 한두 시간 꼼꼼히 읽어보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사건 사고보다는 기획 기사가 많고 연간 단위로 게재되는 재미있는 읽을거리도 많다. 최근 기사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신흥 재벌들의 인터뷰다. 스스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질문에 80퍼센트에 가까운 응답자들이 노동자계급이라 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과 부는 대물림의 결과가 아닌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영국의 계급에 대한 인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기사였다.
한강을 기준으로 강북과 강남을 구분 짓는 서울처럼 런던은 서쪽과 동쪽을 구분해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역에 따라 계급의식도 갈린다는 점이다. 상류계급은 주로 서쪽인 웨스트엔드에 기거하는 반면, 노동자계급은 대부분 동쪽인 이스트엔드에서 살고 있다. 심지어 쓰는 영어도 다르다. 상류계급은 주로 퀸스 잉글리시를 사용하는 반면, 노동자계급은 코크니라 불리는 노동자계급 사투리가 익숙하다. 간혹 다른 계급 출신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 마치 외국인들이 대화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예전처럼 부의 편중까지는 아니더라도 계급 간의 갈등이 남다른 이들의 역사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오랜만에 국내 앙코르 무대가 열린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Blood Brothers)’는 바로 이런 영국의 계급사회를 반영한 작품이다. 원작자이자 작사·작곡의 1인 3역을 맡았던 윌리 러셀은 전형적인 노동자계급이었고, 그래서 작품에 등장하는 주제는 ‘계급 따위가 뭔데?’라는 질타의 시선을 진하게 깔고 있다. 즉, 이란성쌍둥이의 기구한 사연에 계급은 길들여지고 구분되어지는 것일 뿐이라는 노동자계급의 비판적 시각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계급의식을 배제한 채 ‘별난’ 이야기만으로 이 작품을 감상한다면 어쩔 수 없이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단순히 부잣집과 가난한 가정의 구구절절한 스토리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공연 리뷰가 유난히 매체마다, 기자마다, 관객마다 엇갈리는 배경이자 이유다.
공연장의 대형 입간판에 큼지막하게 전시된 주연 남자 배우들의 얼굴 사진처럼 전면에 내세워진 것은 요즘 우리나라 공연계의 대세라 부를 만한 스타 마케팅이다. 기구한 운명의 쌍둥이 역으로 등장하는 조정석·송창의(미키 역)와 장승조·오종혁(에디 역)은 아이돌 스타만큼은 아니겠지만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끌 만큼 충분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번 국내 무대에 다시 오른 이 뮤지컬은 쌍둥이 못지않게 존스톤 부인과 내레이터에 비중을 싣고 있는 인상이다. 이야기의 배경인 1960년대 리버풀이라는 시공간과 허무한 계급의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문제의식이 더욱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아라·구인영(존스톤 부인 역), 그리고 문종원(내레이터)의 활약은 꽤나 만족스럽다.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연기의 이면에 실려 있는 원작의 비판 의식을 곱씹어보면 ‘보는’ 재미는 더욱 배가된다. 십수 년 전 극단 학전의 ‘의형제’가 우리 관객들에게 유독 큰 인기를 끌었던 것도 사실은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뮤지컬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말을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