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에는 숭고하거나 긍정적인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바그너는 산업혁명 이후 물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심화되고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이 악화되는 사회를 향해 경고의 의미로 ‘라인의 황금’을 내놓았다
인간은 신들이 어떤 존재일까를 상상하며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신화 속의 신들은 질투하고 분노하고 바람을 피우고 탐욕을 드러내는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들이 되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가 북유럽 신화를 소재로 직접 대본을 써서 작곡한 ‘니벨룽의 반지’ 속 신들도 마찬가지다. 바그너 음악극의 주인공이 된 게르만 신화의 최고신 보탄 역시 질투·분노·바람기의 화신으로 종종 조롱과 패러디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 제우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보탄이 인간 여인과 낳은 자녀는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라는 이름으로 ‘반지’ 시리즈 중 1부 ‘발퀴레’ 1막에 등장하고, 대지의 여신 에르다와의 사이에 낳은 총명한 브륀힐데는 ‘발퀴레’ 2막에 나타난다. 그리고 2부 ‘지크프리트’의 주인공 지크프리트는 신들 세계의 멸망을 저지할 사명을 띤 보탄의 손자지만 3부 ‘신들의 황혼’에서 이 계획은 좌절된다.
‘반지’의 첫 번째 이야기인 전야극 ‘라인의 황금’은 공연 시간이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단막극으로, 각각 4시간이 넘는 1·2·3부에 비하면 비교적 가볍게 감상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신·거인·난쟁이들의 세 차원 세계를 다룬 이 음악극에는 엄청나게 많은 등장인물과 그 인물만큼이나 많은 라이트모티프(동일한 인물이나 상황이 등장할 때마다 동일한 음악적 모티프를 다시 들려주는 방식)가 들어 있다.
인상적인 것은, ‘라인의 황금’에는 뒤에 오는 이야기들과는 달리 숭고하거나 긍정적인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라인의 요정들은 못생겼다는 이유로 난쟁이 알베리히를 사정없이 조롱한다. 알베리히는 복수심에 불타 요정들이 목숨처럼 지키고 있는 황금을 훔쳐간다. “평생 사랑을 포기하는 자만이 이 라인의 황금으로 반지를 만들 수 있고, 이 반지를 소유하면 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라는 말을 알베리히는 도둑질을 하기 전에 이미 요정 처녀들에게서 들었다. 알베리히로 하여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을 평생 포기하도록 결심하게 만든 것은 바로 생김새의 추함을 철저히 비웃는 사회였다.
알베리히는 라인의 황금으로 만든 반지의 절대 권력으로 나머지 니벨룽 모두를 지배하는 폭군이 된다. 그는 다른 난쟁이를 모두 황금 캐는 노예로 만들어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키우고, 같은 난쟁이면서 대장장이인 동생 미메를 괴롭혀 변신이 가능한 요술 투구를 제조하게 한다.
그러나 최고신 보탄의 야비함은 이런 알베리히의 야비함을 능가한다. 청춘의 여신 프라이아를 잃는 순간 신들의 영원한 젊음은 시들기 시작하고 결국 신들의 세계 전체가 파멸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보탄은 처음부터 거인들에게 프라이아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규율과 계약의 신’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애당초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꾀 많은 불의 신 로게의 파렴치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어차피 알베리히도 황금을 훔쳐 반지를 만들었으니 훔친 물건을 강탈하는 거야 양심에 거리낄 게 없다”라고 로게는 보탄을 부추긴다. 그리고 이 두 파렴치범은 트릭과 완력으로 반지 강탈에 성공한다.
야비함과 잔인함에 있어서는 거인들 또한 신과 난쟁이 못지않다. 반지를 놓고 싸우던 파프너가 형 파졸트를 죽이는 장면은 ‘라인의 황금’의 압권이다. 산업혁명 이후 물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고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이 갈수록 비인간화되어가던 상황에서 바그너는 경고의 의미로 이 작품을 기획했다.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에 빠져 ‘사유재산은 도둑질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기획이었다. 버나드 쇼를 비롯한 많은 비평가들은 “신화와 현실 세계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 작품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여자와 권력, 물질적 안락에 관해서라면 바그너 역시 보탄 못지않은 강렬한 욕망의 소유자였다. 바이로이트 극장이 지어진 뒤 ‘라인의 황금’을 ‘반지’의 나머지 작품들과 함께 전작 초연했던 1876년의 바그너는 보탄의 야비함을 비판하기보다 그를 이해하고 동조하는 입장으로 돌아서 있지 않았을까? ‘발퀴레’에서 딸 브륀힐데에게 “나이 들어 사랑의 능력이 달리자 권력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던 보탄에게 깊이 공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