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오페라, 세 개의 주변 음악회로 짜인 라인스베르크 성 체임버 오페라 페스티벌은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균형성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세계 무대를 꿈꾸는 젊은 성악도들의 재능과 열정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젊은 성악도의 세계 진출을 위한 예비 무대
라인스베르크가 위치한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주는 한국으로 말하자면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경기도 정도에 해당된다.
웬만하면 베를린의 대중교통수단으로도 이 주의 소도시로 이동할 수 있다. 베를린에는 1,000석이 넘는 객석을 가진 오페라 전용극장이 세 개나 있어서 오페라 애호가들은 1년 내내 기호에 맞는 공연을 골라서 갈 수 있다. 그러니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브란덴부르크 주 극장의 규모나 수요는 아무래도 미흡하다. 매년 여름, 베를린에서 약 1시간 20분 거리에 위치한 라인스베르크에서는 성을 중심으로 체임버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이는 수도권 대중을 겨냥한다기보다는 젊은 성악도들의 세계 진출을 위한 예비 무대의 성격을 띤다고 하겠다.
라인스베르크 성은 프리드리히 대제가 왕자 시절을 보낸 곳으로, C.P.E. 바흐가 대제를 따라 포츠담 성의 쳄발리스트로 입성하기 전, 카펠레의 악장을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후에 낭만시대의 현실주의 작가 테오도르 폰타네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작가 쿠르트투 투촐스키의 문학 작품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라인스베르크 성 체임버 오페라 페스티벌은 1990년, 한스 아이슬러의 수제자 지그프리트 마투스가 설립, 24년 동안 예술감독을 맡아왔다. 쿠르트 마주어·다니엘 바렌보임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 페스티벌은 그리스·스웨덴과 같은 해외 오페라와의 합작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페스티벌에서 공연할 성악가들은 매년 콩쿠르를 통해 발탁되는데, 전 세계에서 400~500명의 젊은 성악도들이 콩쿠르에 참여한다. 현재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소프라노 박현주가 2005년 ‘노르마’로 이 페스티벌을 다녀간 바 있다. 이번 페스티벌을 위한 콩쿠르에서도 450명의 성악도가 참여해 열띤 경쟁을 벌였는데 한국 출신 성악도들의 이름도 종종 눈에 띄었다.
예술감독 지그프리트 마투스는 현재 브란덴부르크 주의 창작 문화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작곡가이자 극작가, 문화 행정가이다. 그는 구동독 시절 베를린 코미셰오퍼에서 39년 동안 실내음악제를 주도했는데, 이때 서독 작곡가들을 초청하는가 하면, 1989년 자신의 작품 ‘유디트’가 루드비히스부르크 성 페스티벌에서 공연되는 등, 동서독 문화 교류에 기여한 바가 큰 인물이다. 지금까지 무려 11개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오페라 창작 실습소를 함께 창설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작곡과 텍스트 실습에 대한 워크숍을 극작가·작곡가·음악학자 등과 함께 개최하고 있다.
그의 오페라 ‘황태자 프리드리히’는 라인스베르크 성 극장이 재건축된 1999년과 2000년,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제 탄생 300주년인 2012년에 공연되었고, 올해는 ‘유디트’의 주요 장면들, 연가곡 ‘밤의 노래들’이 연주되었다.
올해 80세를 맞는 마투스는 이 페스티벌를 마지막으로 예술감독직을 내려놓는다. 그럼에도 같은 주의 네체반트 연극 페스티벌 감독이자 연극배우인 그의 아들 프랑크 마투스가 새 예술감독으로 부임을 앞두고 있어, 오페라 페스티벌에 대한 그의 자문 역할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레퍼토리와 공간 모두 균형잡힌 페스티벌
8월의 첫날, 호수를 끼고 서 있는 라인스베르크 성 공원에 들어서니 싱그러운 목소리가 공원의 숲을 뚫고 들려왔다. 8월 8일 공연 예정인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야외 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17개 국가에서 온 총 40명의 젊은 성악도가 기량을 발휘했다. 이들은 콩쿠르 합격 후 해당 악곡을 각자 미리 연습한 뒤, 페스티벌 시작 몇 주 전에 라인스베르크에 입성해 극작가·예술감독 등 관련자와 숙식을 함께하며 공원과 호수 등 자연 속에서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공연 리허설을 한다.
세 개의 오페라, 세 개의 주변 음악회로 짜인 이번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은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균형성을 보여주었다. 라인스베르크 성의 거울홀에서는 비교적 진지한 예술가곡이, 같은 날 실외 그리네리크 호수의 배 위에서는 가벼운 민요가 청중에게 제공되었다.
가곡 공연 때는 저녁 또는 밤을 주제로 하는 포레·레스피기·카플·마투스의 작품들과 탄생 450주년을 맞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 음악을 붙인 토머스 몰리와 존 다울런드의 작품들이 연주되었다.
필자가 관람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스트라빈스키의 ‘마브라’가 라인스베르크 성 안에 있는 극장에서 공연됐고,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야외에 자리한 헥켄극장에서 대미를 장식했다.
라인스베르크 성에서 재탄생한 러시아의 단막 오페라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와 스트라빈스키의 ‘마브라’, 이 두 단막 오페라는 7월 25일부터 8월 2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함께 공연되었다. 두 작품의 텍스트 모두 러시아의 국민 작가 알렉산더 푸시킨의 드라마와 운문 소설에 기초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두 작품의 진지성과 희극성, 양식의 대비로 변화를 주었다. 러시아에서 영입된 젊은 성악도들이 러시아어로 노래하고 이를 번역한 독일어 텍스트가 무대 자막으로 올려졌다.
단조로운 무대장치의 두 공연은 오페라이기보다 음악극적 장면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오페라의 전통 양식을 탈피해가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폴란드 리타우엔 출신의 다아나 아다마가 연출을, 미하일 게르트 지휘로 프렌츠라우 지역 악단 프로이센 카머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1898)는 두 작곡가의 관계를 그린 푸시킨의 드라마를 음악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단 두 명. 살리에리가 위대한 음악가의 조건은 노력이라고 하며 작곡하고 있는 순간,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모차르트의 완벽한 음악이 그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한다. 이어 모차르트가 청중의 뒤에서부터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를 데리고 무대 위에 등장한다. 모차르트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틀리게 연주하는 악사의 ‘즐거움’이 중요한 반면, 살리에리에게 이것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극작가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독약을 먹이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함께 들고 있는 밀짚이 이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분리하는 상징성을 띤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마치 모차르트를 모방하면서도 그와 구분되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자신을 은유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에 차용된 모차르트의 음악은 미리 녹음된 스피커로 대치시킴으로써 실제 연주와 분리시켰다.
극 전개를 주도하는 레치타티보적 러시아어가 작은 실내 공간에서 독특한 음향을 자아냈다. 살리에리 역을 맡은 베이스 빅토르 랴우즈초프와 모차르트 역의 테너 파벨 치카놉스키가 체구와 성역에 있어서 적합하기는 했으나, 무대 자막이 높이 설치되어 있어서 연기의 시각적 효과가 줄어드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마브라’(1922)는 푸시킨의 운문 소설에 기초한 텍스트를 오페라화한 것이다. 19세기 초반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 기사 바실리를 사랑하는 여주인공 파라샤는 떨어져 있는 시간을 한탄하는 노래를 늘 부른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요리사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중, 파리샤는 바실리를 여성으로 분장시켜 어머니에게 ‘요리사 마브라’라고 소개한다. 기쁨도 잠깐, 극은 우연히 면도하는 바실리를 보고 졸도하는 어머니와 도주하는 바실리, 그 뒤를 쫓아가는 파라샤의 해프닝 장면으로 끝난다.
스트라빈스키 특유의 리듬 양식이 극적 전개에 박진감을 더해줌으로써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작품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었다. 파라샤를 맡은 예브게니야 크라프쳉코의 노래와 극적 기량이 돋보였고, 그녀와 바실리의 중창, 어머니와 이웃 여인의 중창, 그리고 이들의 4중창이 희극적 뉘앙스를 무난히 소화해냈다.
체임버 오페라 페스티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
올해까지 공연된 페스티벌의 레퍼토리를 보면, 실외의 헥켄극장과 성의 정원에서는 주로 전통적인 작품들을 마이크 기술의 도움을 받아 올렸으며, 성의 실내에서는 주로 현대 오페라, 또는 부대 장르들이 공연되었다. 이 점은 실내(외) 공간이 음악극 장르에서 지니는 의미를 인식한 콘셉트로 파악된다. 극장 내에 오르는 오페라는 장면적으로 음악극 이상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젊은 성악도들에 대한 예비 무대라는 점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새 예술감독을 맡는 프랑크 마투스는 그가 1996년부터 감독해온 네체반트 연극페스티벌에서 신크론 극(Synchron Theater)을 실험해왔다. 가면, 텍스트 테이프가 이 연극 공연에서 많이 활용되는데, 그의 이러한 감각이 라인스베르크의 실내 오페라 페스티벌와 어떻게 결합하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라인스베르크 성 체임버 실내 오페라 페스티벌이 한국 오페라 문화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작곡가·대본가와 함께 오페라 창작을 실습하고 이를 극작가·음악학자와 함께 연구하는 준비 과정이다. 재정적 문제, 마케팅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궁극에는 정신적 차원의 것들이 페스티벌의 내용을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독일의 페스티벌들이 비교적 오래 유지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일관된 콘셉트를 받쳐주는 문화 마인드 때문이 아닐까. 예컨대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이러한 작업에 대한 의식 및 일관된 콘셉트를 개발한다면 더 훌륭한 페스티벌로 도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서울시오페라단이 작곡가와 극작가로 구성한 ‘세종 카메라타’가 작년에 리딩 공연을 통해 네 개의 창작오페라를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의 체임버 오페라 페스티벌이 이곳 문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한국 문화 특유의 예술 언어, 또는 장르를 개발해 시대적 가치를 창출하는 공연 문화를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