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트 오이스트라흐 서거 40주년

‘아름다운 삶위대한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오직 음악 앞에 진실했던 인생

그는 눈부신 재능과 따뜻한 인품으로 한 시절을 풍미한 금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구 소련이라는 철의 장막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의 음악 세계를 들여다 본다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는 하이페츠나 밀스타인 같은 아우어 학파 출신의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점령하고 있던 서방세계에 대항할 수 있었던 구소련의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진정으로 새로운 러시아 악파였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비호를 받았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20세기 러시아 음악의 첨예한 현대성과 19세기의 엄숙함을 조화시켰던 인물인데, 무엇보다도 바이올린 음악에 있어서 고전주의 해석에 대한 일종의 표준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낭만적인 작품들보다는 소나타와 협주곡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주었다. 음색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극한을 넘어선 디테일과 보잉 테크닉을 통해 음악 그 자체의 논리와 작곡가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전달하여 감각을 넘어선 이성적인 충만감을 보여준 오이스트라흐. 그는 20세기 바이올린계에 있어서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경탄스러운 추앙의 대상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정확한 운지를 바탕으로, 그의 레가토는 비할 바 없이 유연했고 아주 짧은 음표에서도 맵시 있는 음향을 만들어내는 활 놀림은 건조하다기보다 믿음직스러웠다. 더 나아가 시종일관 긴장감과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격정의 순간에 토해내는 클라이맥스는 고귀한 영혼의 거룩한 일갈과도 같은 엄숙함에 가까웠다. 한편 그는 만년에 접어들며 은은한 은빛 칸타빌레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는 이전 시대의 슬라이딩 기법 혹은 현대의 벨칸토적인 칸타빌레와도 전혀 다른, 까닭 모를 투박한 질감과 현대적인 날카로움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기법적으로만 그의 음악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강건한 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외향적인 화려함보다는 내면으로의 침잠을 통해 음악의 정신을 찾고자 했고, 한 번의 보잉만으로도 듣는 이를 얼어붙게끔 하는 카리스마와 음악 전반을 통해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곡가에 대한 헌신, 그리고 러시아 작곡가들에 대한 가장 현대적인 해석이야말로 오이스트라흐의 위대한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부터 이미 소련의 명실상부한 단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는 아우어의 제자 가운데 가장 특별한 재능과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미론 폴리아킨이 일종의 ‘우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때 이른 죽음으로 서방세계는 그의 진가를 알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한편 진정한 인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컬어졌던 보리스 골드슈타인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소비에트 바이올린계를 양분할 것으로 기대가 높았지만, 정치적 이유로 그는 거의 잊힌 사람 취급을 받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왕성한 나이에 요절해버린 레오니드 코간은 오이스트라흐와는 다른 훨씬 강철 같고 철두철미한 스타일을 구사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올레그 카간은 오이스트라흐와 비교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 왼쪽부터 메뉴인·오이스트라흐

고전주의의 완성형

오이스트라흐는 1908년 9월 30일 우크라이나의 남부 도시인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유대인으로 아버지 다비트 쾰커는 문서 정리의 일을 맡은 하급 관리이자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 이사벨라 스테파노프카는 오페라 극장의 단역 가수 출신으로 어린 오이스트라흐를 음악회에 자주 데리고 다녔다. 다섯 살 때 그는 8인치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처음으로 선물 받은 뒤 교습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스승은 바로 아우어와 함께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를 대표하는 표트르 스토랴르스키였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제자로 나탄 밀스타인을 꼽을 수 있는데, 밀스타인이 콘서바토리를 졸업할 무렵인 1914년에 오이스트라흐는 처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1923년 오데사 음악원에 입학한 뒤 1926년까지 학업에 열중했고, 그해에는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과 루빈스타인의 비올라 소나타,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등의 프로그램으로 첫 공개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차이콥스키의 수제자였던 작곡가 글라주노프가 이곳을 방문했다가 오이스트라흐의 음악적 감수성에 매료되었다.

그는 오이스트라흐에게 “키예프에서 내 지휘로 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그는 이 행운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니콜라이 말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도 협연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1934년 모스코바 음악원에서 선생의 자리를 얻게 되었고(1939년에는 교수로 발탁된다), 1935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그리고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했다. 바르샤바에서 열린 이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는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당시 1위는 지네트 느뵈, 4위는 보리스 골트슈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승에 대한 갈망으로 1937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했고 국제적으로도 그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이 당시 그는 1927년 제1회 쇼팽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과 평생에 걸친 파트너십을 이루며 첼리스트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세비치와 트리오를 결성하기도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그는 당의 지시로 공장과 병원에서 연주를 펼쳤고, 배급이 끊긴 레닌그라드 대공방전의 와중에 그는 바로 레닌그라드에 남아 항쟁 의지를 북돋우는 콘서트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42년 스탈린상을 받으며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음과 동시에 미아스코프스키와 하차투리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받고, 프로코피예프의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으로 편곡을 의뢰하여 초연(1944)했으며 쇼스타코비치와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그의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헌정받아 초연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9년 헬싱키에서, 1951년 이탈리아를 거쳐, 1952년에는 독일, 1953년에는 프랑스, 1954년에는 영국, 1955년에는 미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며 그 존재감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1959년에는 지휘자로도 활동을 시작했고, 1967년에는 은퇴한 오보린의 뒤를 이어 리흐테르와 전설적인 듀오를 결성했다. 1960년대는 오이스트라흐에게 최고의 시절이었다. 매번 매진 사례를 거듭하는 연주회도 그러하거니와 언론으로부터의 과도할 정도의 찬사, 청중의 히스테릭할 정도의 열광이 이를 반증한다.

 


▲ 아들 이고리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음악과 청중에 대한 헌신

당시 많은 소련 내의 예술가들이 자유를 찾아 서방세계로 망명했지만 오이스트라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던 프랑스의 브루노 몽생종은 이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호모 소비에티쿠스(소비에트적 인간)라는, 다소 비난조로 들리기도 하는 언사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의 조국은 그로 하여금 당에 복종하라고 요구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음악과 청중에 대한 헌신뿐이었다. 그는 일체의 정치적인 고려와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예술과 인간 그 자체의 순수함과 이치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리흐테르를 들 수 있겠는데, 오이스트라흐에게 있어서 소비에트 체제는 자신을 위한 최선의 환경은 아니었을지언정 조국과 전 세계 청중에게 최선을 다하는 음악가로서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한 위대한 음악가로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지금까지 존경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진실함은 수많은 음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레퍼토리가 주로 협주곡과 소나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다른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들과 구분되는 점이다. 특히 그는 소련에서 많은 양의 음반을 제작했는데, 한결같은 러시아적 스케일과 거인과도 같은 풍모를 보여주는 녹음들로 대단히 높은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한계상 그의 대표적 명반은 대부분 서방세계에서 녹음한 것들이다. DG와 필립스 레이블에서 대표적인 협주곡들과 더불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를 녹음해 애호가들로부터 전설적인 음반으로 추앙받았고, 열광적인 미국 데뷔 이후 당시 CBS 레이블에서도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1번을 비롯한 몇몇 협주곡 녹음을 남겼다.

그가 집중적으로 음반을 제작한 곳은 바로 콜롬비아로부터 HMV에 이르는 EMI클래식스(현재 워너뮤직으로 편입) 레이블로, 현재 CD 17장 분량의 전집이 발매되어 있다.

1968년은 그의 60번째 생일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그레이트 홀에서 게나디 로제스트벤스키의 지휘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해 성대한 자축연을 가졌다. 이제 오이스트라흐는 루마니아의 에네스쿠나 영국의 메뉴인과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하이페츠처럼 소련을 대표하는 바이올린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으며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당시 소련의 모든 동료 음악가들이 보드카로 인해 그러했듯이‐그는 심장 질환이라는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리흐테르와 리사이틀을 열거나 지휘자로서 활동하는 등 새로운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지만, 이는 그에게 있어서 죽음을 앞둔 마지막 산책이었을 뿐이다. 1974년 암스테르담에서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브람스 사이클을 진행하던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하릴없이 이곳에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저 성스러운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제 그는 저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청중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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