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섭과 황덕호는 무뚝뚝하고 까칠한 디제이다. 하지만 그들이 선곡한 음악을 귀에 담으면 ‘밑줄 긋고 싶은 음악이란 이런 것!’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정만섭과 황덕호는 화려한 언변이나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다. KBS 1FM(93.1)에 주파수를 맞춘 오후 2시, ‘명연주 명음반’의 도입부에서 정만섭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간혹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음악 듣겠습니다.” 이후 120분 동안 전곡 위주로 흐르는 음악과 무뚝뚝한 곡 안내만 있을 뿐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밤 12시에 문을 여는 ‘재즈 수첩’에서 황덕호는 빅밴드의 경쾌한 파열음으로 첫 문을 연다. ‘당신의 밤과 분위기를 위한 재즈’가 아니라 밀려오는 잠을 깨워가며 ‘재즈를 위해 당신의 밤을 만들라’고 선포하는 것 같다.
방송을 통해 나오는 음악이 궁금하다면 그 나머지는 청취자의 몫이다. 정만섭은 “홈페이지를 이용하라”고 조언할 뿐이고, 황덕호는 방송에 담지 못한 말을 단행본과 번역서에 부지런히 담을 뿐이다. ‘명연주 명음반’은 12년 동안, ‘재즈 수첩’은 15년 동안 그렇게 오직 음악으로만 말을 걸어왔다.
방송 외에는 어떤 일을 하나요?
정만섭 예전에는 강의를 많이 했는데 요새는 조절하고 있고, 술 마시는 건 예전과 똑같죠. 음반사의 전집물 시리즈 같은 기획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좀 알려야 되겠다 싶은 음반들이 있죠.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포더, 피아니스트 잉글리트 해블러 등의 기획에 참여했어요. 제 프로그램이 음반사와 금전적인 거래가 있다고들 오해하는데··· 저는 사실 음반사 관계자들이 그렇게라도 돈을 많이 벌었으면 하는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음반 시장도 예전 같지 않아서.
황덕호 10년 가까이 음반 매장을 운영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지금은 재즈 음반 구매자가 별로 없어서 규모를 줄여 온라인 매장으로 운영 중입니다. 방송 외에는 시간 나는 대로 책을 써요. 최근에는 에릭 홉스봄의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을 번역했고, ‘당신의 첫 번째 재즈 음반 12장’의 두 번째 편과 세 번째 편을 낼 예정입니다. 읽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두 분 모두 글로도 명성이 자자한데요.
정만섭 절필한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그사이 아주 안 쓴 건 아니고. 예전보다 통찰력이 떨어져서 쓰면 안 되겠다 싶어서요.
황덕호 통찰력 때문도 있지만 돈도 안 되죠(웃음).
정만섭 그게 정확한 표현이지(웃음).
방송에 소개된 음반에 관한 반응은 어떻게 느끼나요?
정만섭 여러 경로로 피드백이 들어오는데 아무래도 음반 관계자들이 제일 민감하죠. 지난번에 방송된 음반이 엄청 팔렸다면서요.
황덕호 어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명연주 명음반’에 소개된 음반’이라고 소개하던데요.
정만섭 맞아. 그럴 때마다 제 프로그램의 영향력을 느끼고 더 조심하고 철저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방송의 득을 본 음반을 예로 든다면요?
정만섭 지휘자 르네 라이보비츠(1913~1972)요. 그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 ‘리더스 다이제스트’ 부록으로 찍은 LP판으로 나왔는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베토벤 교향곡 2번은 정말 라이보비츠죠. 방송에 소개되니까 판매가 잘되어 본사에서도 새로 찍었다고 하더군요. 잠자던 음반을 깨우는 영향력이 있어요.
황덕호 제가 볼 때 라디오를 통해서 특정 음반이 팔린다는 건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현상일걸요? 재즈는 클래식보다 음반 시장이 작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현상을 옆에서 보면 부러울 따름이에요. 스마트폰 나오고 음반 시장이 거의 사멸해가는데, 클래식음악 팬들은 음반이라는 매체를 완강히 유지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재즈는 특정 아티스트를 깊이 있게 조망해 음반을 만들어도 안 팔려요. 그래서 기획도 많이 줄고 있죠.
정만섭 생각해보면 지금은 음반에 다가가는 루트가 거의 없어요. 1980년대에는 ‘음악동아’나 ‘레코드음악’ 등이 소개하고 라이선스도 많이 제작했는데, 지금은 좋은 음반을 찾으려고 하면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어요. 제 프로그램이 그런 가치 있는 음반을 알려줄 수 있는 통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둘러보면 다른 프로그램들은 상대적으로 소프트해지고 있어요. 제가 ‘어중 띤 메뚜기들 잡지 말고 울타리 안의 양을 잘 키워라’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크로스오버나 말랑말랑한 음악을 통해 근처에 왔다가 고전음악의 정체성과 핵심을 파악하면서 마니아가 된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 ‘은파’를 틀어주는 걸 상식으로 알고 있는데, 차라리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처럼 메탈리카보다 더 자극적인 것을 냅다 틀어줘야죠. 정서적인 자극을 먼저 줘야 해요. 이런 상식과 금기를 깨는 것도 ‘명연주 명음반’이 하는 것 중 하나라고 봐요.
저도 가끔 그 불친절하고도 자극적인 충격을 받습니다. ‘명연주 명음반’ 시그널이 나가자마자 “시간 없습니다. 바로 음악 듣죠” 하고 곧바로 40~50분짜리 대곡이 나오더군요.
정만섭 그런 경우 많습니다!
황덕호 정 선배가 시원히 이야기했는데 제 이야기도 가감 없이 담아주세요. 클래식을 잘 안 듣는다고 하지만 팬의 층과 열정은 재즈에 비한다면 엄청나죠. 음··· ‘재즈 수첩’의 신청곡 10곡 중 8~9곡은 라틴음악이나 집시음악이지 정통 재즈가 아니에요. 심지어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을 신청하기도 해요. ‘재즈 수첩’이 ‘명연주 명음반’처럼 일주일 내내 나간다면 저도 눈 딱 감고 한 번은 그런 곡을 내보내겠죠. 이럴 때마다 재즈라는 음악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음반사에 근무했던 20년 전보다 재즈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대중화되었는데, 역으로 퇴보한다는 느낌도 많이 들어요. 빠르게 확산은 했지만 진지한 감상을 요하지 않는 음악이라는 생각? 만나는 사람마다 재즈 좋아한다고는 하는데 어떤 뮤지션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거의 못해요. 재즈 페스티벌은 곳곳에서 생기죠? 가보면 사람들이 가득한데 그날 누가 연주했는지는 거의 아무도 모릅니다. 그게 지금의 재즈 동네인 거 같아요.
정만섭 역사적으로 볼 때, 재즈와 클래식을 비교한다는 건 형평성이 안 맞아. 하지만 그런 맥락을 무시하고 현실적으로 볼 때, 재즈의 파수꾼은 견고하지 못하고 클래식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강한 편이지.
황덕호 그렇죠. 팬들의 충성심이라고 할까요?
정만섭 팝이나 1990년 전후로 불었던 ‘프로그레시브 록’ 바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결국 지지층이 견고하지 못했던 거죠. 당시에 자칭, 타칭 팝 칼럼니스트가 꽤 많았고, 그들이 방송국에 드나들며 방송도 많이 했는데 음악이 없어지니 이들도 상대적으로 많이 없어졌습니다.
황덕호 방송 형평성의 문제도 있죠. 팝 문화가 없어지니 방송도 소홀해지고 가요로 대부분 대체되고요.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팝송인 걸 원하지는 않지만 음악 문화를 전문적으로 이끌 누군가는 계속 나타나야 하죠. 지금은 전문 디스크자키(DJ)보다는 유명 연예인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 장르를 특화하는 힘도 필요해요. 클래식이나 재즈··· 장르를 넘어 팝에서도 배울 게 많거든요. 하지만 앞서 말한 것들이 전반적인 흐름이라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참 난감해요.
정만섭 모 방송국은 오후 6~8시에 올드팝만 틀어놓아도 청취율이 충분히 나온다고 하더라.
황덕호 지금은 가요를 다룬다 해도 정작 음악 프로그램이 아니에요. 출연진이 대화를 하다가 중간에 가요 한 곡씩 들려주는 격입니다. 음악을 정작 음악으로 대해주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시대예요.
정만섭 청취자 참여란에 보면 진행자의 언변보다는 음악을 진지하게 감상하길 원하는 마니아들이 많다는게 느껴져요. 그런 층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전문화된 포맷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쉽게 다가가기 위한 수많은 ‘편법’보다 정공법이 사라진 지금 시대에는 오히려 ‘정공법’으로 나가는 게 성공하는 길입니다. 그냥 첫 곡부터 버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확 틀어주고.
황덕호 그렇죠. 어설픈 크로스오버나 접경지대에 있는 것보다는 딱 잘라 오리지널 정통 재즈를 들려주는 것.
정통성과 정공법을 위해 선곡하는 것도 쉽지 않겠습니다.
정만섭‘명연주 명음반’과 ‘재즈 수첩’은 대본이 없어요. 저는 대곡을 중심으로 그 사이를 연결하는 곡들로 선곡하고 신보도 섞어요.
황덕호 저도 비슷해요. 꼭지 하나를 30분 넘어가는 지점에 박아 넣고, 그 사이마다 브리지 곡이 있고 마무리하는 곡이 있어요. 첫 곡은 웬만하면 강렬한 곡을 쓰려고 해요. 재즈가 좀 그런 성격의 음악이잖아요.
정만섭 선곡에도 영감이 찾아올 때가 있어요. 곡들이 막 떠오르고 방송 시간과도 ‘착착착’ 맞아떨어지죠. 때로는 중간에 “쉬었다 가겠습니다”라면서 빌 에번스가 연주한 클래식 곡을 틀기도 하고요. 6분짜리 한 곡씩을 꼭 넣어야 할 때는 존 루이스가 재즈로 편곡한 바흐의 ‘푸가’가 적당하고요. “이런 곡이 이 방송에 나가네”라면서 놀라는 청취자도 있는데 자크 루시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전곡을 1시간 이상 튼 적도 있습니다.
*오후 2~4시에 방송된 ‘명연주 명음반’은 다음 날 새벽 3시부터 4시 54분까지 재방송된다. 재방송 때 6분 분량의 곡이 빠지고 애국가가 나온다.
황덕호 전 정작 그런 거 틀고 싶어도 분량이 짧아 못 틀어요.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1975) 같은 건 엄두도 못 내죠(웃음).
선곡은 개인 컬렉션을 기본으로 하죠?
황덕호 그렇죠. 근데 정 선배, KBS자료실 가 본 지 며칠 됐어요?
정만섭 1년 넘었어. 저도 개인 자료들입니다. 자료실에 들어오는 속도로 소개하면 신보를 이제야 소개한다는 비판이 많아요. 맞는 얘기죠. 전문 프로그램으로서 공신력을 키워야겠다는 의미에서 남들보다 빨리 움직여야 하고 음반에 ★로 점수도 매기고.
황덕호 재즈는 들어오는 게 끊겼더라고요.
정만섭 전문 MC란 진행자일 뿐만 아니라 새로 나온 음반을 빨리 접하고 트렌드를 파악하여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말만 잘한다고 전문 MC가 되는 건 아니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던 2009년에 ‘명연주 명음반’ 첫 곡으로 푸치니의 현악 4중주 ‘크리산테미’가 나오더군요. 그날은 세상의 모든 레퀴엠이 1FM을 타고 흘러나왔어요. 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비극 앞에서는 선곡도, 음악을 대하는 자세도 다를 거 같습니다.
정만섭 개인적으로 틀고 싶은 곡이 있어도 방송이기에 중립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저는 그때 부르크너와 말러의 아다지오 악장만 연이어 틀었어요. 개인적 취향이었으면 그렇게 안 하지. 다만 어설픈 공인이라···
황덕호 재즈는 클럽이나 술집 같은 곳에서 많이 연주하잖아요. 물론 그런 상황하에서 예술적인 기법을 발전시킨 음악이고요. 청취자들에게 이런 예술적인 속성과 변천사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거 같습니다. 재즈도 사람이 하는 음악이다 보니 슬픔을 노래한 곡이 많습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돌아갔던 때 방송국에 다시 와서 첫 곡을 바꿔 재녹음했어요. 세월호 참사 때도 흥겨운 곡과 멘트는 많이 자제하려고 했죠.
방송 후 ‘다시 듣기’로 모니터링을 하나요?
정만섭 거의 안 들어요. 멘트를 받는 마이크 볼륨과 음악 볼륨이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 멘트 후 정확히 3초 뒤에 음악이 나가야 하는데 그 간격이 잘 맞는지 확인하는 정도?
황덕호 저도 안 들어요. 제 목소리를 다시 듣는 거 너무 힘들더라고요(웃음). 멘트 점검하려고 가끔 들어보는데 멘트 나오면 볼륨을 확 줄여버리고 음악만 들어요.
정만섭, 황덕호와 나눈 인터뷰 녹음은 정확히 1시간 분량이었다. 녹취하면서 수차례 반복해 듣기··· 방송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라 정만섭의 목소리와 말투는 슈만의 선율처럼 부드러웠고, 황덕호는 빌리 홀리데이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문장과 내용은 마치 현대음악과 프리재즈처럼 날카로웠다. 편법과 재미만을 추구하는 세태를 꼬집을 때는 그 날카로움을 더 드러냈다.
결론은 정통성과 정공법. 재미와 쉬움이 미덕이라 생각하는 이 시대에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명연주 명음반’과 ‘재즈 수첩’이 장수하고 사랑받는 비법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심규태
황덕호는 2004년부터 재즈음반전문매장 ‘애프터아워즈’를 운영하고 있으며 ‘당신의 첫 번째 재즈 음반 12장’ ‘그 남자의 재즈일기’를 썼고 ‘재즈-기원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빌 에반스-재즈의 초상’ 등을 번역했다. 일요일과 월요일 밤 12시부터 1시까지 방송되는 ‘재즈 수첩’에서 스탠다드 재즈 넘버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Jazz A to Z’ 코너는 재즈 입문자와 애호가들에게 사랑 받는 코너다.
정만섭은 ‘CD 가이드’ ‘스테레오 사운드’ ‘레코드리뷰’의 기자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연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방송되는 ‘명연주 명음반’은 협주곡(월), 교향곡·관현악곡(화), 독주 및 소나타(수), 실내악(목), 성악(금), 피아노독주(토), ‘일요 BGM’ 순으로 진행된다. 전곡 감상 위주이며, 다음날 새벽 3시부터 4시 54분까지 재방송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