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37년 열정이 남긴 선물
“가르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바이올리니스트 중에는 김남윤 교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연주자가 드물다. 그만큼 김남윤은 훌륭한 연주자이자 교육자로서의 한 길을 오롯이 걸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열정을 다해 걸어온 인생의 길 어느 한 지점에 서 있다. 38년 동안 교단에서 연주를 가르쳐온 그녀는 내년 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새로운 시작과 도전의 시간을 맞고 있다.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정에도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봄을 준비하며 학기를 맞았던 교정이 이제 한해를 마무리하는 실기시험과 입시로 분주한 모습이다.
“정년 기념 음악회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조용히 정년을 맞는 분들도 많은데 괜히 떠들썩하게 공연을 준비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막상 준비를 하다 보니 할 것도 많고 계속 가르치면서 연습도 열심히 해야 하고, 이미 때는 늦었지만 왠지 후회가 되네요(웃음).”
연주회를 앞두고 후회하는 것은 어린 학생이나 평생을 무대에서 보낸 전문 연주자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시간이 정말 빠르군요. 바이올린을 시작하고 지금까지의 제 삶을 돌아보니 기쁘고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절망과 슬픔 때문에 눈물흘렸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제자를 키웠지요. 가끔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애꿎은 오해와 원망도 많이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 와서 보니 지나간 제 시간의 결들이 헛되이 쌓인 것 같지는 않아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이제는 힘든 시간들을 지나 지금 이 자리까지 온 제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1974년 오랫동안 수상자가 없던 세계적인 콩쿠르인 스위스 티보바가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김남윤은 당시 클래식이 발전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뉴욕 카네기홀·워싱턴 케네디 센터 등의 무대에서 청중과 비평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연주자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경희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주자와 교육자로서 안정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신설됐을 때, 그녀는 서울대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당시 제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직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이 걱정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예술 실기 교육과정에 큰 문제가 있음을 느껴왔고 전문화된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워낙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그들의 눈높이에서 성심성의껏 가르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는 연주를 잘하는 아이들이 아주 많고 자신의 재주를 잘 살린다면 충분히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만한 인재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을 발굴하고 함께 노력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의 시간들이 제게는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순간들이었습니다.”
유학 가는 일이 아주 드물었던 시절,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세계적인 교육자 이반 갈라미언을 사사했던 그녀는 외로운 유학 생활 동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의 가르침은 지금의 교육자 김남윤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갈라미언 선생님은 아주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분이셨어요. 칭찬을 많이 해주는 분은 아니셨죠. 한 번도 ‘Good’이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무리 잘해도 ‘Okay’가 최고의 칭찬이었죠. 선생님은 연습할 때 집중력을 가장 중요시했는데, ‘소가 밭을 갈 때 얼굴에다 나무판을 씌우는 것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일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다’라며 늘 정신 집중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 역시 학생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많이 주문하는 편이에요. 또 집중력만큼 중요한 것이 정신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체력 관리’인데, 평소에 자기 관리에 대해서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남윤의 정년을 앞둔 얼마전, 내로라하는 미국 대학에서 그녀에게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해왔지만, 우리나라에서 우리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원장으로서 우리나라 영재교육에 다시 한 번 헌신할 계획이다.
“음악가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알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제자들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습에 매달려 그 나이에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측은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내 품에 있는 아이들, 성장해서 떠난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새로운 아이들까지 모두 내 아들딸과 같이 귀한 존재이지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 역시 그들을 끝까지 가르치지 못했을 겁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열정과 아낌없는 사랑으로 수많은 제자를 키우며 한국 음악 역사의 지형을 바꿔놓았던 김남윤이었지만 직접 본 그녀의 손과 몸은 생각보다 작고 여렸다. 안식년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쳤던 열정이 그 작은 몸 어디에 숨겨져 있나, 의아할 정도였다.
“얼마 전 문득 창밖을 내다보다 새삼 저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저절로 제 제자들 얼굴이 하나하나 생각나더군요. 그러면서 다시 깨닫게 되었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좋은 것이 음악이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스승의 마음이고 사랑이라는 것을요.”
1977년 김남윤이 처음 교단에 선 이후 어느덧 37년이 흘렀다. 아이들은 자랐고 레코드판은 이제 작은 휴대전화 속에 담겨질 정도로 음악계도 변화했다. 그녀가 뜨겁게 열정을 쏟았던 시간이 이제 저만치 가고 있지만 제자들의 연주 속에는 여전히 그녀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37년 열정이 남긴 선물, 지금 어른이 된 제자들이 하나 둘씩 무대로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 심규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