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발견한 예술의 기쁨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영화배우 윤여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월 1일 12:00 오전


▲ 피아니스트 신수정

▲ 영화배우 윤여정

첫 만남, 자연스러운 운명

윤여정 클래식 음악을 하는 것이 드물고 귀하던 시절, 우리 세대에 신수정 선생님은 연주자로 정말 유명한 분이었어요. 특히 선생님은 학창 시절부터 피아노도 잘 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지인들을 통해 선생님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어떨까 늘 궁금했었어요.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물건을 사러 상점에 갔다가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죠. 고맙게도 선생님이 먼저 저를 알아보는 거예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신 선생님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저를 알고는 있었는데 우연히 마주치니까 반가운 마음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고 하더군요. 자연스러웠지만 운명 같은,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어요.

신수정 30여 년 전, 여정 씨야말로 유명한 배우였기 때문에 저로서도 늘 궁금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상점에 갔더니 여정 씨가 열심히 물건을 고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가서 인사를 건넸죠. 그 후 이화여고 선후배 모임을 가지면서 우리는 계속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렇게 인연이 이어져 친구로 지내고 있어요.

윤여정 신 선생님은 서울예고를 나오셨지만 당시 이화여고 모임을 함께하셨지요. 그때 그 모임을 가지면서 즐겁게 지냈던 선후배들이 꽤 많이 있었어요. 각자 다른 직업을 가져서 한번 모이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죠.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여 수다도 떨고 요리도 같이 해서 먹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게 어느덧 30여 년 전의 일이 되었네요.

신수정 인연이라는 것은 참 알 수 없죠. 우리 사이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졌어요. 여정 씨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과의 만남은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만 몰두해왔던 제게 더 넓은 삶을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숨통을 열어주었어요. 인생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요? 제가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막상 정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는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오래된 친구들과는 허물없이 만날 수 있어 마음이 편하죠.

윤여정 하지만 나이가 드니까 이제 세상을 떠나는 친구들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지금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이 더 애틋하게 느껴져요.

신수정 저도 몇 년 전, 가장 친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어야 했어요. 사실 옛 친구처럼 허물없는 친구가 어디 있겠어요. 서로 바라봐줄 수 있고 이해해줄 수 있으니 말이죠. 그런 면에서는 옛 친구가 참 좋아요. 하지만 저와 연배가 달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은 만남 역시 감사하고 의미 있어요. 우리 삶은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들이 늘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 역시 조화가 중요하겠죠.

윤여정 죽을 때 자기 곁에 있을 친구가 둘만 있어도 행복한 거라는 말이 있잖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에 참 공감이 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게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 영원한 관계란 존재하기 힘들잖아요. 신 선생님과는 서로 다른 분야에 있어서 그런지 만나면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어서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워낙 누구를 초대해 맛있는 거 해주는 걸 좋아해서 그냥 마음 편안하게 집으로 놀러 가서 만날 수 있어 좋아요.

청춘은 아니지만, 모든 꽃은 아름답다

신수정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의 발전이 수직 상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얼마 전에 어느 콩쿠르 심사를 갔었는데 정말 1등, 2등을 매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절실히 실감했어요. 요즘 아이들은 테크닉과 음악성이 정말 뛰어나고 열정도 대단하죠. 물론 정보가 너무 다양하다 보니 어린 나이 때부터 모방을 많이 하게 되고 연주가 획일화되는 면도 없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세대 아이들의 재능과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윤여정 영화 분야 역시 예전과 비교해보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과 발전이 있었죠.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성장이 이끌어낸 변화죠. 후배들도 저희 때와는 다르게 훨씬 더 잘하고 재능도 뛰어나요. 더구나 이제 저는 나이가 들어서 저와 비슷한 또래의 배우보다 후배들과의 만남이 훨씬 많아졌죠. 예전에는 비슷한 나이여야만 친구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다양한 연령대의 선후배들과 친구처럼 지낼 때도 많아요. 특히 젊은 배우를 많이 만나게 되니까 생각이 더 넓어지는 것 같아요.

신수정 저 역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후배들도 만나고, 젊은 세대들과의 만남도 늘어나고 있어요. 그들이 제게 주는 영감은 정말 놀랍죠. 지성과 감성, 패기와 당당함, 그들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그 음악성에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저렇게 연주를 잘할 수 있을까 대견하고 기특해요.

윤여정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확실히 대화의 소재 자체가 달라지긴 해요. 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건강’에 관한 거예요. 그리고 세월 가는 이야기, 누구 아픈 이야기 등. 그런데 젊은 친구들과 만나면 이야기의 소재가 더 폭넓어져요. 저도 그 속에서 배우게 되고요. 그리고 그런 다양한 만남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지금은 무척 감사해요. 젊은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엄마로서 제 아들들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요.

신수정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한 것 같아요. 결국 ‘음악’을 통해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가 음악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구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잘하는지를 찾아야 하는데, 그 과정은 시대를 떠나 언제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인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좋은 것도 많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예술을 더 넓게 깊게 바라보게 하지요.


클래식,
그리고 영화

윤여정 제가 예전부터 청바지를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편하게 청바지를 입을 때가 많아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청바지 입은 모습이 어울린다고들 하는데, 사실 나이와 청바지가 무슨 관계가 있나요? 나이가 들었다고 청바지가 안 어울린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안 입게 되고, 그러니까 어색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자꾸 시도하다 보면 어울리는 시점이 있죠. 클래식도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클래식이 많이 낯설었어요. 그런데 신 선생님 덕분에 클래식을 가끔 듣고 또 공연장에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클래식이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은 공연이 처음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져요. 그건 예술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떤 분야든 가까워질 시간이 필요하죠.

신수정 동생이 미술을 하고 주위에 다른 분야의 예술가가 많이 있지만 사실 피아노라는 것이 정말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 오래 하기가 힘든 악기예요. 그러다 보니 영화나 연극, 뮤지컬 같은 다른 장르의 공연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하지만 영화는 여정 씨 덕분에 저도 좋은 영화를 꽤 볼 수 있었죠. 영화와 클래식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추구하는 것들은 하나이지 않을까 싶어요.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 그것이 예술이 가진 위대한 속성이죠.

윤여정 제가 처음 배우를 시작하던 때는 ‘배우’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직업은 아니었어요. 또 개인적으로 젊은 시절에는 손·발·머리·목소리같이 모든 몸을 통해 표현해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이 더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랬던 마음이 근래 어떤 분을 만나면서 바뀌게 되었어요. 제가 단역으로 잠깐 워쇼스키 감독과 영화 작업을 함께했었거든요. 촬영이 끝나고 워쇼스키 감독이 “촬영이 어땠느냐”고 제게 묻더군요. 그래서 “신인 때 이후 처음으로 더 잘할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솔직히 말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감독이 “그럼 다시 찍자”고 하는 거예요. 알다시피 영화라는 것은 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단역인 제가 제 연기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 모든 사람을 다시 연기하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미안해요. 너무 깜짝 놀라서 “아니라고,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어요. 그때 감독이 그러더군요. “나는 배우라는 직업을 매우 존경한다. 당신의 살아 있는 자신 전부를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선하고 존경스럽다”고요. 본능적인 감각을 그대로 보여줘야 하는 배우의 숙명, 저는 왠지 그것이 싫었는데 그날 워쇼스키 감독의 한마디가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어요.

신수정 도구는 달라도 결국 예술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클래식과 영화, 모두 같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사회가 발달하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도 인간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서로 다른 분야지만 그래서 더 순수하고 오픈된 눈으로 바라본다면 서로 깊은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윤여정 클래식을 들으면서 좋은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런데 클래식을 들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 아닌가 싶어요(웃음). 특히 처음에는 더 필요하죠. 영화는 보면서 팝콘이라도 먹을 수 있는데, 클래식을 들을 때는 정말 그 음악에만 집중해야 하잖아요.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가 어색하고 힘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고요. 그런데 자꾸 듣다 보니 어느새 클래식 음악이 친근해지기 시작하더군요. 특히 지난번 대관령국제음악제 때 음악가들과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는데, 참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음악가들과 청중이 함께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고 좋았어요.

신수정 음악은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는 사람에게도 인내가 필요한 분야죠. 특히 악기는 워낙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인내심이 많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역할이 아주 중요해요. 음악가 중 어린 시절에 부모님한테 야단 한번 맞지 않고 음악을 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러면서 혼란도 겪게 되죠. 이걸 꼭 해야 하나? 끝도 없는 방황 속에서 헤매기도 하고요. 하지만 ‘음악’이라는 그 자체가 얼마나 좋은 것임을 알게 되면 쉽게 포기할 수도 없죠. 또 재능이 있으면 계속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힘들어도 포기하기 힘든 게 음악인 것 같아요. 물론 그만큼 음악을 통해 얻는 기쁨도 크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해주신 부모님께 참 감사해요. 덕분에 이렇게 뛰어난 젊은 세대의 연주자들과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고마운 일이 늘어가는 것 같아요.

예술가의 길, 두려움과 외로움의 경계에서

윤여정 배우에게 필요한 건 우선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끼와 본능이죠. 물론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은 처음엔 특별히 주목받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진짜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해요. 정말 훌륭한 배우는 결국 철학자가 되어가지요.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잘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전에는 자신감이 더 많았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신수정 연주자에게 필요한 것도 역시 재능이죠. 하지만 연주도 재능만 가지고는 결코 성공할 수 없어요. 노력과 열정, 인내가 필요하죠. 예술가는 자신의 모습과 삶이 음악에 반영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닮아가지요. 그래서 더욱 평생을 걸쳐 인내하고 노력하고 지성을 쌓고 도전하면서 매 순간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해요. 예술가라면 자신감,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요. 또 어느 순간 외로움과도 마주쳐야 해요.

윤여정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인생이 뭔지 영화가 뭔지 잘 모르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감은 배우에게는 정말 중요한 요소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붙는 순간 ‘자만심’이 함께 생기게 돼요. 그리고 자만심이 생기면 두려운 것이 없어져요.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인 순간이 되는 것이죠. 함께 작업하는 배우들도 대중도 두렵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면 배우에게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때예요. 사실 우리가 하는 작업은 정답 같은 것이 없어요. 클래식의 경우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달라요. 불특정 다수의 모든 관객에게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래서 대중이 좋아하는 배우와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달라요. 선배 입장에서는 자만에 빠진 배우보다 지금은 잘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무대 앞에서 두려워하는 배우가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신수정 사실 예술가가 가져야 할 ‘자신감’에 대해 말한다면 저는 어릴 때부터 그런 자신감이 많이 없었어요.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만 연주가 끝나면 늘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아요. 연주자에게 자신감은 꼭 필요하죠. 하지만 여정 씨 말처럼 한편으로는 그 자신감이 지나칠 때 여러 면에서 부작용이 생기게 돼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 중에는 성격이 괴팍하거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성품을 지닌 사람도 꽤 있는데 그런 연주자가 연주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떻게 저런 음악이 나올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하지요. 음악가에게는 강력한 카리스마도 중요하지만 음악을 하다 보면 다른 의미에서 겸손한 사람만이 좋은 음악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음악을 하면 할수록 음악이 얼마나 어렵고 넓고 깊은 것인지를 깨닫기 때문이지요. 음악이라는 위대함 앞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라고 해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예술가에게 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두려움에 대한 용기예요. 누구에게나 무대는 언제나 두려워요.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 카리스마 넘치는 피아니스트 아르헤리치도 무대 뒤에서는 굉장히 떨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생각해보세요.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무대에 혼자 나가서 악보도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두 시간 넘게 연주해야 한다면 누구도 그 시간이 두렵지 않겠어요? 그래도 무대에서 내가 연주하는 곡을 통해 누군가 함께 공감하고 느껴주는 그 기쁨 때문에 두려움을 뒤로하고 또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제가 진짜 신기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요즘 젊은 연주자들이에요. 그들은 무대에서 떨리지도 않나 봐요. 얼마나 자신감 있고 하나같이 자신의 색깔을 능숙하게 표현하는지 어느 때는 제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예전에 태어났다는 것이 고맙게 느껴질 때가 있다니까(웃음).

윤여정 배우에게도 두려움을 넘어설 용기가 필요한 순간은 늘 존재하죠. 감독이 내 연기를 보고 “오케이”라고 했을 때 그게 70점이라서 오케이를 한 건지, 아니면 정말 100점이라서 오케이를 한 건지 모르잖아요. 내 연기가 어떤 상태인 건지를 모를 때 사실 두려워요. 이제는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감독인데, 연배가 높은 나에게 ‘다시 한 번 더 찍자’고 말하는 것이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방향이 맞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다시 하자고 말하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무엇보다 배우에게 가장 큰 감정적인 문제는 외로움일 거예요. 배우라는 직업처럼 상실감과 외로움이 큰 직업도 드물죠. 특히 젊은 친구들의 경우 감정의 기복이 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아요. 특히 스타였을 때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경우 더 심해요. 인기라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계속 이어지기 어려운 것인데 막상 인기가 사라지면 굉장히 허탈할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지나친 관심과 기대 때문에 방황하기도 쉽죠. 그러니 한 배우가 그런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좋은 배우가 된다는 것은 철학자가 되는 과정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요.

신수정 피아노를 하는 사람 역시 외로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혼자 연습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하고, 닿을 수 없어서 절망하면서도 그곳을 향해 다가가야 하고 절박한 심정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피아노처럼 또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파트너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드물 거예요. 전 그런 연주 무대를 많이 즐기는 편이에요.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도 있지만 함께 누군가와 음악을 한다는 것은 연주자에게는 큰 기쁨이자 즐거움이죠. 특히 창작을 하는 작업에는 외로움이 늘 따르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런 과정을 통해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요.

나의 꿈, 우리의 꿈

윤여정 이제 저는 배우로서는 오염된 사람이에요. 예전에 배우 배두나 씨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너는 배우로서 순수하니 네가 못 느끼는 것은 하지 마라.” 저도 신인이던 때가 있었지만 아무리 연륜이 깊어 훌륭한 배우도 신인의 순수함과 떨림은 따라갈 수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고 기쁨이죠.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이제 예전보다 더 절제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어떤 위기에 대처하는 태도 같은 것은 아무래도 경험이 있으니까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을 수밖에 없겠지요. 사실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오늘만 있을 뿐이에요.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즐기고 감사해야 하죠. 배우로서 꿈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지금 제 나이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할머니’ 나이인데 요즘의 할머니는 예전의 할머니 모습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지는 연령대의 모습을 그냥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연기하는 것을 많이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꾸 흉내 내게 될까 봐요. 대신 실생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찍은 다큐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냥 느끼려고 노력하죠.

신수정 좋은 연주란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만 작품보다 앞서지 않는 연주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자기 자신은 자연스럽게 연주 속에 묻어나죠. 그게 진짜인데 그게 그렇게 힘드네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음악을 시작한 학생이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당당히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것처럼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도 없죠. 음악의 길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잘 알기 때문에 애처롭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요.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쉴 틈이 없이 바쁘냐고들 말해요. 저도 계속 음악 안에 있다 보니 세월의 흐름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주어진 일들을 하고 있지만 저도 사실 체력과 능력의 한계가 있음을 종종 느끼게 돼요. 이제 조금은 여유를 갖고 제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음악을 통해 클래식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해요. 특히 가르침의 경우 경험이 많을수록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많거든요. 그런 면에서 제가 갖고 있는 것들을 어린 후배들에게 계속 더 많이 나눠주고 싶어요.

윤여정 예전에 마이클 래드포드의 영화 ‘일 포스티노’를 참 좋게 봤어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대중에게 인기가 없잖아요. 가끔 그런 종류의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감독들도 있는데, 아무리 좋아도 대중의 관심을 무시할 수 없으니 무턱대고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겠죠. 그런 가운데서도 가끔 저는 왜 내가 영화배우를 하고 있을까 스스로 물을 때가 있어요. 가만히 보세요. 좋은 영화는 늘 우리 곁에 머물러 있잖아요. 저도 영화의 마지막 신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의 설렘 때문에 지금까지 배우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몰라요. 제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배우죠. 제가 연기하고 싶은 것은 내일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의 모습이에요. 이 순간의 느낌, 감정을 지금 잘 표현하고 싶어요.

황혼의 아름다움이 청춘의 아름다움보다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의 아름다움이 살아온 삶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해가 질 무렵부터 피아니스트 신수정의 집 정원에 눈이 오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눈이 그친 후, 새봄의 정원 역시 아름다울 것이다.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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