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1990년대는 어땠나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3월 1일 12:00 오전

1990년대를 맹렬히 지나온 ‘키드’들은 이제 클래식 음악계를 이끄는 ‘줄기’가 되었다. 개방과 국제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음악 매체의 변화와 속도는 빨라지고, 산업 경제의 흥망에 따라 클래식 음악계 양상도 달라졌던 그때 그 시절.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겪어온 이들의 기억을 통해 1990년대를 다시 불러본다


▲ 크레머·아르헤리치 내한 공연(1994)

1990년대의 삶이란 1970년대, 1980년대와는 현격히 다르다. 1960년대 이래의 정치·경제적 성과가 집결되어 나타나는 시기였다. 국가 주도의 급격한 경제개발의 결실이 최고조의 모습으로 가시화되어 드러난 시기로, 그 어떤 시기보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흘렀다. 또한 1988년 올림픽과 한중·한소 수교 등을 계기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음악 수입 통로가 확장됐다. 하지만 1997년 말 외환 위기와 국제통화기금 금융 위기(IMF)의 시작은 경제적 호황의 풍요로움 속에서 다소 들뜬 상태로 이어져오던 1990년대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1990년대 서양음악 문화는 특정 계층과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영역에 거세게 침투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철의 장막’이라 불리던 소련과 수교(1990), ‘죽의 장막’이라 일컬어지던 중국과 수교(1992)가 이뤄진다.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의 오케스트라·실내악단과 독주자들이 한국의 무대를 찾았고, 동유럽의 지휘자들이 연달아 한국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다. 냉전 기류의 붕괴로 남한과 북한은 화해 분위기에서 송년통일전통음악회(1990)를 갖기도 했다.

세계화의 폭이 넓어지면서 국내 연주자들의 의식도 많이 바뀌었다. 1960년대 이후 안착한 예술중·고등학교와 음악대학, 그리고 본고장에서 유학을 마친 이들이 가장 많이 안착한 시대가 1990년대다. ‘본토 연주자’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직간접적으로 받은 연주자들은 전문성을 보다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마련했다. 이른바 클래식 음악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모차르트·베토벤 등의 ‘전곡’ 연주로 1990년대의 초입을 장식했고, 임헌정/부천필이 말러 사이클로 말미를 장식했다. 이러한 전문성의 심화는 레퍼토리의 변화 외에도 실내악에 영향을 미쳐 금호 현악 4중주단 등 실내악단이 양적으로 늘어났다. 실내악단의 탄생은 레퍼토리의 다양화를 촉진했고, 한편 연주로 이어지기 힘든 오케스트라 곡보다는 발표가 비교적 쉬운 실내악을 쓰는 작곡가가 늘어났다.


▲ KBS교향악단과 협연한 야노스 슈타커(1996)

자신감과 다양성이 넘친 시대

1990년대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는 우리만의 ‘자신감’이 넘쳐흐른 시기였다. 이에 힘입어 ‘유학 보내지 않고 우리 손으로 세계적인 연주자를 길러보자’는 슬로건 아래 실기 중심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이 1993년 개원했다. 같은 해 예술의전당 내에 오페라극장을 개관하며 서양 예술의 대표 장르인 오페라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예술 각 분야에서의 다양한 뒤섞임이 나타날 뿐 아니라, 중심적 가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 역시 이제는 당혹스럽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퓨전’ ‘크로스오버’라는 말이 신선한 용어였지만,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이 말을 쓰는 것이 새삼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각 영역의 뒤섞임은 흔한 현실이 되었다.

이는 클래식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곡·창작에서 대중음악 일각에서 해오던 즉흥적인 방식과 편집·구성 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쓰인다. 특히 영화·연극 음악 등 인접 예술과 결합한 작업을 할 때, 컴퓨터 및 전자음악을 위한 기기가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이는 작곡가들에게 별도의 연주자 없이 일인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통용되었다. 1990년대 말 인터넷을 타고 더욱더 적극적으로 유입된 탱고, 뉴에이지 음악 등 이른바 ‘월드뮤직’은 국내 음악 장르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클래식 음악가들의 레퍼토리 다양화에 기여했고, 국악 창작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코리안심포니 교향악축제 공연(1998)

속도와 욕망의 시대

1990년대는 유입되고 생산되는 문화의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가동하는 기술의 변화가 예전에 비해 놀랄 만큼 빨라졌다. 그것은 ‘풍요’를 바탕으로 한 ‘속도’의 시대였다. 각 세대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속도가 한 시공간에 묘하게 ‘공존’했다. 예를 들어 거실에는 아버지가 애용하는 LP와 듬직한 오디오가 자리한다면, 대학생 누나는 카세트테이프가 담긴 워크맨을 들고 다녔고, 동생의 가방에는 파나소닉에서 제작한 CD 플레이어와 음반이 들어 있었다. CD는 LP와는 전혀 다른 음악 수용 방식을 만들어냈다. 개인 소유의 작은 재생기로도 좋은 음질의 소리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CD 문화가 확산되면서 음악 감상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아닌 혼자서 누리는 것으로 차츰 바뀌기 시작한다. 당시 삼성·SKC 등 국내 대기업이 음반 회사를 만들었고, 중소기업 규모의 종래 음반사와 달리 장르에 상관없이 상업적이지 않은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1994년부터 1997년 정도에 불과했다. 1997년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대기업들이 재빨리 손을 뗀 것 역시 음반 산업이었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클래식 음악을 넘어 문화 전반이 일종의 ‘카오스’였다. 하나의 프레임에 담아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욕망의 스펙트럼이 커지면서 그 속에서 작은 트렌드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는 뜻이다. 이 시대는 큰 중심에서 여러 개의 작은 중심으로, 도덕에서 욕망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념적인 압박감은 줄고, 분단과 분배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망에 몰입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고도 소비사회로 진입했다. 사회적 흐름과 변화를 꼼꼼히 읽는다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해졌다.

근래에 ‘1990년대’의 코드가 뜨고 있다. ‘복고(復古)’란 사전적 의미로 과거의 모양·사상·제도·풍습 따위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지나간 시대의 문화가 ‘복고’할 때는 그것을 문화상품으로 만들거나 소비할 수 있는 강력한 문화적 주체가 있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에 돈을 투자할 수 있는 경제력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감수성을 지녔으며, 먹고살기 위해 몰아쉬는 가쁜 숨에서도 잠시 눈을 돌려 청춘의 기억을 구매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내 청춘을 달궜던 그것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면서. 그래서 ‘응답하라 1994’와 ‘응답하라 1997’ 같은 드라마는 한편으로는 그들의 청춘을 물들였던 상품을 전시한 카탈로그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 이제 같이 들여다보도록 하자. 당신의 1990년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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