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슈트라우스 오페라에 특히 어울리는 소프라노 카리타 마틸라가 보여준 화제의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무대 현장 중계
2014년은 R.슈트라우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기에 다양한 해외 무대에서 그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올해에도 교향시는 물론 기악곡과 성악곡 등 다양한 분야에 자취를 남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매력적인 레퍼토리가 관객을 찾아간다. 그 첫 번째 무대는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흔히 ‘모차르트의 명작 오페라 뒤에는 다 폰테의 대본이 있었고, 베르디의 오페라 뒤에는 보이토가 있었다’는 말로 작곡가와 극작가의 함수관계를 비유하곤 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명콤비를 더하면 R.슈트라우스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아닐까. 두 예술가의 천재성과 재기발랄함이 창조한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가 파리 음악계에서 호평을 받으며 막을 내렸다.
신화를 모티브로 한 희비극의 믹스 매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가 지난 1월 22일부터 2월 17일까지 로랑 펠리 연출로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에서 리바이벌되었다. 2003년 가르니에 궁에서 초연할 당시 나탈리 드세(제르비네타 역)의 퍼포먼스가 큰 화제였다면, 이번 공연은 카리타 마틸라(아리아드네 역)가 장내를 압도한 환상적 무대였다.
제목에서 짐작하듯,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미궁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와 그를 도운 아리아드네가 주인공. 테세우스는 사랑을 맹세하며 아리아드네와 함께 낙소스 섬으로 가지만 결국 섬에 그녀를 홀로 남겨둔 채 아티카로 떠난다. 이 신화 속 이야기에 극작가 호프만슈탈은 새로운 빛깔을 입히는데, ‘제르비네타’라는 인물을 창조했다. 제르비네타는 테세우스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지조 있는 여인 아리아드네와 반대로 남성 편력을 즐기는 자유분방한 여성이다. 상반된 두 여인의 삶을 대조시키며 극은 마치 폴리포니(둘 이상의 성부가 독립된 가락을 가지면서 조화를 이루는 음악)처럼 흘러가는데, 이것이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의 묘미다.
R.슈트라우스가 이 곡을 창작할 당시에는 몰리에르의 연극 ‘서민 귀족’ 공연 때 더해질 보충 작품에 불과했지만, 초연 실패 후 프롤로그를 덧붙여 1막의 오페라로 완성했다. 광대들이 등장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즉흥 연희극) 버전으로 개작해 극중극 형식이 된 후 작품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구성상 이 작품은 희극과 비극이 두 축을 이룬다. 제르비네타를 중심으로 익살스러운 광대 아를르캥·스카라무치오·투르팔디노·브리가벨라가 펼치는 코미디 오페라적 면이 그 하나요, 다른 한 축은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 그리고 바쿠스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비극 오페라적 면으로 한 작품 안에 두 가지 오페라 스타일을 믹스 매치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두 스타일의 대립은 명료하다. R.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을 일종의 번호 오페라(Number Opera, 아리아·합창 등의 독립된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각 악곡에 번호가 붙은 오페라)처럼 작곡했다. 레시타티브와 아리아의 교차 배치가 바로 그것. 레시타티브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등장하는데, 주로 제르비네타와 네 광대의 익살극을 강조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인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요하는 오페라임에도 실내악 편성을 요하는 패시지가 많다는 점 또한 음악적 특색의 하나다. 풀 편성 오케스트라가 압도적 이모션을 연출하는 1막의 놓칠 수 없는 감상 포인트는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실내악 패시지의 감동이다. 무대 또한 이전 무대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해석이 돋보인다. 총책임을 맡은 로랑 펠리(연출 겸 의상)는 작품의 무대를 현대로 설정했고, 무대 미술가 샹탈 토마는 그에 어울리는 감각적인 세트를 선보였다.
프롤로그, 예술을 위한 예술을 노래하라
막이 열리면 거대한 기둥이 늘어선 아르데코풍 저택과 계단이 보이고, 기둥 뒤로 눈발이 흩날린다. 마치 오스트리아 산속의 별장 같은 느낌이다. 무대 앞쪽에는 젊은 작곡가가 하얀 소파에 앉아 악보(자신이 작곡한 오페라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다. 티롤풍 민속의상을 입은 하인들은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이때 고급 승용차에서 내린 네 명의 광대가 까불거리며 등장한다. 뒤이어 짐 가방을 들고 투덜거리며 까다로운 프리마돈나가 들어온다. 도입부부터 개성적인 인물이 연이어 등장하자 청중의 호기심은 한껏 부풀었고, 미카엘 숀반트의 수려한 지휘가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이때 집사가 나와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청탁한 후원자의 메시지를 전한다. 마지막 부분을 도입부로 바꾸어 공연하라는 내용이 그것. 비로소 청중은 지금껏 등장한 인물들이 작품 공연을 위해 초청된 예술가임을 알아챈다. 아리아드네를 연기하기 위해 온 프리마돈나 역의 카리타 마틸라는 할리우드 육체파 배우처럼 잘록한 허리에 둔부를 강조한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연설을 경청하고, 바쿠스 역을 맡은 테너 가수 클라우스 플로리안 포그트는 스모킹 차림이다. 제르비네타 역의 다니엘라 팔리는 붉은 펑크 머리에 광대 같은 붉은 줄무늬 티셔츠 그리고 붉은 타이츠에 꽃분홍 신발, 선정적인 미니스커트 차림이다. 그녀의 광대 친구들도 오렌지빛 정장의 눈에 띄는 차림이다. 회색 정장에 단정하게 머리를 다듬은 수줍은 젊은 남자 작곡가 역은 여성 소프라노가 맡았는데, 요즘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는 소프라노 소피 코크가 분했다.
이 시끌벅적한 프롤로그의 진정한 메시지는 젊은 작곡가의 고뇌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만 살아온 젊은 작곡가는 자유분방하게 성적인 유혹을 일삼는 제르비네타에게 반한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 것인가? 육체적인 욕망, 즉 먹고살기 위해 살 것인가?’ 갈등하던 작곡가는 탄식하듯 노래를 부른다. ‘음악은 무엇인가? 신성한 예술… 나의 운명인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죽도록 내버려달라!’며 부르는 그의 아리아에서 소피 코크는 고운 발성과 고취된 정감으로 예술가의 영적인 차원을 환상적으로 그려냈다.
비극적 사랑을 절대미로 승화시킨 디바
프롤로그에 이어 오페라 속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가 시작됐다. 무대는 공사가 중단된 집,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낙소스 섬이다. 이곳에서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아리아드네와 젊은 바쿠스는 운명적으로 만난다.
극중극 무대에서 중요한 패시지는 제르비네타와 네 광대의 퍼포먼스다. 그들은 섬에 놀러 온 관광객으로 등장하는데, 폐허가 된 집에 들어와 정신 나간 아리아드네를 보고 야릇해진다. 제르비네타 역의 다니엘라 팔리는 작지만 근사한 몸매로 이 장면에서 비키니 차림의 섹스어필 매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어느 청중은 카리타 마틸라의 환상적 퍼포먼스보다 팔리의 그것에 더 취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콜로라투라 기교가 쉬지 않고 등장하는 20여 분간 그녀 혼자 거대한 바스티유 무대를 독점한 데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일단 바스티유 무대는 그녀의 성량으로 커버하기에 너무 컸고, 테크닉상으로 완주했어도 초연 무대에서 차돌 같은 카리스마를 보여준 나탈리 드세를 넘어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만남과 이별. 낙소스 섬에 나타난 바쿠스를 보고 아리아드네는 그가 테세우스인 줄 알고 뜨겁게 포옹하지만 이내 그가 아님을 깨닫는다. 바쿠스 역의 클라우스 플로리안 포그트는 건장한 체구에 강한 고음으로 바쿠스 역을 무난히 소화했다. 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빛깔과 색채 넘치는 이모션으로 가득 찬 카리타 마틸라의 보이스 옆에서 그의 강건한 퍼포먼스가 거의 단세포적으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향취 나는 오래된 와인과 떫은 새 와인의 차이라고 할까.
다시 절망에 빠진 아리아드네를 보며 제르비네타는 “신이 지나가면 다시 버림받는구나!”라며 그녀의 슬픈 운명을 동정한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동경과 실연의 고통으로 홀로된 아리아드네 위로 조명이 비추고 극중극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무대의 불이 꺼진 뒤에도 잔상처럼 남는 것은 무너져버린 아리아드네를 연기한 카리타 마틸라의 절대적 아름다움이었다. “브라바! 대디바, 카리타 마틸라여!”
사진 Bernard Cout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