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1985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이유 있는 그들의 30년 발걸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3월 1일 12:00 오전

since 1985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이유 있는 그들의 30년 발걸음

우리나라 첫 민간 오케스트라가 걸어온 고난과 영광의 길을 듣다

2015년 3월 30일 창단 30주년을 맞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이하 코리안심포니)는 우리나라의 첫 민간 직업 오케스트라로 첫발을 내딛었다. 1987년부터 국립극장과 전속 계약을 맺어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의 공연을 맡으면서 국내 유일의 오페라•발레 전문 오케스트라로서 전문성을 인정받아왔다.
1989•1990년 잠실 올림픽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5000명 대합창 연주회’는 당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순수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지역•계층•세대 간 갈등으로 혼탁했던 사회 분위기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한편 제1대 음악감독 홍연택은 코리안심포니와 함께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용평뮤직캠프페스티벌을 개최해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통로를 마련했다.
코리안심포니는 2001년 3월 재단법인화되면서 예술의전당 상주 오케스트라로 새롭게 출발했다. 현재 연간 90회 이상의 공연을 올리고 있으며 폭넓고 유연한 레퍼토리와 탄탄한 실력으로 국립오페라단 국내 초연작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2011), ‘파르지팔’(2013)과 국립발레단 국내 초연작 ‘봄의 제전’(2014)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이 밖에도 플라시도 도밍고•호세 카레라스•라두 루푸 등 해외 유명 음악가들의 내한 공연에 함께했으며, 영화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O.S.T를 녹음했다. 이외에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연주,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폐막식 연주를 맡으며, 대중과의 다양한 접점을 시도해왔다.
창시자 홍연택에 이어 김민이 제2대 음악감독을 역임했고, 제3대 박은성, 제4대 최희준이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코리안심포니와 함께했다. 현재 2014년 1월 취임한 임헌정이 제5대 예술감독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 제1바이올린 이은정 조진원 김령 김나정 진한나 이주영 이정일(수석) 송은지 이지수(수석) 손수현 김민균(수석) 현효진 허명식

코리아심포니 공연 소개

정기공연 연간 6회가량의 정기공연을 통해 여러 레퍼토리를 선보여 왔다. 2014년 상주 작곡가 제도를 도입해 첫 번째로 김택수를 위촉했다. 김택수가 작곡한 오케스트라 편성의 두 작품은 2015년 중 초연할 예정이다. 기존 정기공연과 달리 2014년부터 3년간 예술의전당과 함께하는 브루크너 전곡 연주를 갖는다.

기획공연 15~39세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연주자를 대상으로 오디션을 통해 실력 있는 신인 연주자를 발굴하는 프로젝트 ‘라이징 스타’를 2012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오디션에서 최종 선발한 연주자는 ‘라이징 스타’ 시리즈 공연을 통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코리안심포니와협연 무대를 갖는다. 2014년부터는 인문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관현악 작품을 음악 칼럼니스트 최은규의 해설과 함께 감상하는 ‘토킹 위드 디 오케스트라’를 마련해 음악과 인문학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지방공연 ‘방방곡곡 문화공감’을 통해 매년 레퍼토리를 달리하며, 재정자립도 40% 미만인 지방 문예회관 및 소외 시설을 대상으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외부출연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 등 국립예술단체 공연을 맡고 있으며, 예술의전당의 ‘11시 콘서트’ ‘제야음악회’ ‘콘텐츠영상화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해외공연 2010년 미국 투어(뉴욕 카네기홀•LA 세리토스홀), 2013년 아시아 투어(방콕 국립극장•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를 진행했으며, 올해 창단 30주년을 맞아 유럽 투어가 예정돼 있다.
기타공연 현악 4중주•금관 5중주 등 실내악 편성에 해설을 곁들여 서울•경기 지역 소외 계층 시설을 방문하는 ‘찾아가는 음악회’를 진행하고 있다.

Korean Symphony Orchestra
Since its foundation on March 30th, 1985, Korean Symphony Orchestra has held more than 90 concerts over the last thirty years, ultimately establishing itself as Korea’s leading symphony orchestra. Through an agreement reached with the National Theater of Korea in 1987, Korean Symphony Orchestra has cultivated its reputation as the country’s only orchestra specializing in opera and ballet, staging performances with Korea National Opera, the Korean National Ballet, and the National Chorus of Korea. The Korean Symphony made news in 1989 and 1990 by holding at Jamsil Arena a special performance for the Grand Choir that featured a 5,000-member chorus. It has also performed for visiting world musicians such as Placido Domingo, Jos? Carreras, Angela Gheorghiu, and Radu Lupu. In June 2010, in commemoration of its 25th anniversary, the Orchestra held concerts at Carnegie Hall in New York and Cerritos Hall in Los Angeles, drawing raves from local media including ‘The New York Times’. In 2013, it was the sole orchestra to perform on stage at the 18th Presidential Inauguration Ceremony.

 


▲ 제2바이올린 최은주 강은미 신은진 박진희(수석) 박나은(부수석) 조진이 문재원 김정년 나카하라 교코 김은숙

코리안심포니 30년 역사
문화 예술 불모지에 뿌리내린 민간 오케스트라의 세월

국내 최초의 민간 직업 오케스트라의 탄생
“창단할 무렵엔 경제적인 여력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꿈도 못 꿨지요. 그저 오케스트라에 관심이 많고, 뜻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음악을 만들어보자는 것뿐이었어요. 매년 봄, 가을로 2~3번 정도 만나서 연주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그런데 의외의 성과를 거둔 것이지요. 처음에 40명쯤 모여서 출발했는데 청중의 호응을 받으며 민간 오케스트라가 설 땅의 가능성을 제시받은 것이에요”(‘객석’ 1991년 3월호).
이전에 고려교향악단 등 민간 오케스트라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직업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코리안심포니의 등장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더불어 관 주도형 악단인 서울시향과 KBS교향악단에 견줄 만한 수준급 앙상블을 갖춘 민간 주도형 악단의 태동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간 교향악단’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1985년 창단연주회
1985년 3월 30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코리안심포니가 창단연주회를 가졌다. 포디엄에 오른 지휘자 홍연택(1929~2001)과 상임단원 45명이 주축이 되어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몰다우’, 신수정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7번을 선보인 데 이어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연주했다. 이날 관객들은 ‘영웅’을 통해 현재를 목격하고 미래를 점칠 수 있었으리라. 당시 호른을 중심으로 관악기군에 대한 호평과 함께 새로운 민간 교향악단의 연주력에 대한 애정 어린 염려의 시선도 있었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교향악단에 아직 뚜렷한 후원처가 없다는 점, 관 주도 교향악단과 달리 ‘부단한 연습과 좋은 연주만이 살길’이라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이후 홍연택과 코리안심포니는 말러•브루크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바그너 등 당시 관객에게 낯선, 또 난해해서 여느 오케스트라도 시도하기를 꺼려한 작품들을 사명감을 갖고 꾸준히, 완벽에 가깝게 연주해냈다.
실력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홍연택은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연주자뿐 아니라 때에 따라 일본 등지에서 현지 오디션을 통해 연주자를 섭외했다. 어려운 재정임에도 당시 클라리넷•오보에•바순•호른•팀파니를 일본이나 유럽, 동구권 연주자로 채웠다.


▲ 손치호(Db·부수석) 정인경(Va) 김성은(Va) 변진원(Va) 유상미(Va) 이무열(Va·부수석) 양지선(Va) 여수은(Va·수석)김리경(Va)원영석(Va) 정지선(Db)장인영(Db)

국립극장과 전속 계약을 맺다
창단 2년 만인 1987년, 코리안심포니는 당시 문화부 소속의 국립극장과 전속 계약을 맺고, 국립극장 산하 단체였던 국립오페라단•합창단•발레단의 반주를 도맡았다. 첫해 5000만 원에 계약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1억 원에 국립극장 측 연주 행사를 맡게 됐다. 정기연주회와 엑스트라 연주를 통해 운영비를 마련하는 오케스트라로서는 안정적인 수입이 생긴 셈이었다.
“정기연주회를 월 1회 정도 가지며, 1회 정기공연시마다 700여만 원의 적자가 난다. 이 적자를 80~90여회의 엑스트라 연주회를 통한 수입으로 메워 정기연주회를 많이 가질 수 없는 것이 고충이다”(‘매일경제’ 1987년 11월 23일)
당시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의 연 예산은 각각 20억여 원과 10억여 원이었다. 민간 교향악단이 국립극장과 전속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은 실력과 가능성에 대한 인정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공연 하나하나가 계약 연장을 위한 평가 대상이었다.
오페라와 발레 음악을 연주하던 오케스트라 피트는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단단한 체질을 갖추는 체력 단련실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오페라를 위해 내한한 해외 유명 지휘자들의 각기 다른 지휘봉은 코리안심포니를 더욱 강력하게 훈련시켰다. 여기서 쌓인 내공은 지금까지도 코리안심포니의 저력이 되고 있다.


▲ 1989년’5000명 대합창 연주회’

기네스북에 오른 ‘5000명 대합창 연주회’
1989년 12월 2일 잠실 올림픽 실내체육관에서는 안익태 ‘한국 환상곡’과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연주됐다. 200여 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와 5000여 명의 합창단에 의한 매머드급 콘서트였다. 당시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베토벤 교향곡 9번 1만 명 대합창 연주회’를 목격한 홍연택이 “우리도 할 수 있다”를 외치며, 지역•계층•세대 간 갈등으로 혼탁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순수 음악의 대중화와 국민 화합을 위해 대규모 음악회를 추진한 터였다. 이를 위해 연초부터 특별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지역•연령별로 다양한 단체와 개인이 참여했다. 이 행사는 이듬해인 1990년 10월에 한 번 더 열렸다. 당시 특별준비위원회를 이끌며 연출을 맡은 최영석(현 국립오페라단 본부장)이 당시를 회고해주었다.
“각 파트별 악보를 방방곡곡으로 보내고, 행사 전날엔 예비군 수송버스 70대를 각 지역으로 보냈어요. 음악회 당일 출연자들의 도시락도 큰 문제여서, 김밥 6000개를 서울 시내 김밥집 곳곳에 나눠 주문했죠. 학생들을 동원해 체육관 자리마다 김밥을 놓는 데 1시간 넘게 걸렸어요. 음악회 당일, 라디오의 10분짜리 단막 드라마 속 등장인물 대화에서 ‘5000명 대합창 연주회’가 언급될 정도였으니 국민의 관심이 엄청났죠.”
18세부터 61세까지, 90여 개의 단체와 200여 명의 개인이 참여한 ‘5000명 대합창 첫 연주회’는 국내 기네스북에 올랐다. 동시에 민간 오케스트라인 코리안심포니가 클래식 음악 애호가뿐 아니라 대중에게 선명하게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 권영주(Db) 정선애(Db) 홍석진(Db) 김지훈(Vc·부수석)예지현(Vc) 문수현(Vc) 윤지원(Vc·수석) 심은주(Vc) 박혜진(Vc) 한혜미(Vc) 이재준(Db·수석)

쌍용그룹의 후원
1989년 초, 쌍용그룹 경영을 맡고 있던 김석원 회장은 한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창립 50주년을 기념할 만한 사업 때문이었다. 문화사업 쪽으로 방향을 잡은 김 회장은 오케스트라 창단을 고려했으나 결국 음악 단체를 지원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고, 순수 민간 오케스트라로 활동 중인 코리안심포니와 인연을 맺는다. 쌍용과 코리안심포니는 ‘순수한 형태의 예술 단체 지원’인 점에서 기업과 예술의 이상적인 결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자체 수익이 적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코리안심포니는 쌍용에 연간 3억 원씩 3년간 지원하면 정상화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1989년 2월 쌍용은 일체의 조건을 달지 않은 ‘순수 예술 지원’을 결정했다. 지원 시작 때부터 자금 운용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못 박았을 정도다. 이를 계기로 코리안심포니는 임의 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이후 코리안심포니는 찬송가 전집 CD 제작에 나섰지만, 이 사업은 오히려 큰 어려움을 남겼다. 당초 예상만큼 CD가 판매되지 않은 것. 계약 기간인 3년이 지난 후에도 쌍용은 코리안심포니를 후원했고, 1995년까지 총 24억 원을 지원했다.
1995년 말 쌍용그룹과 코리안심포니는 어느 때보다 지원 계약에 진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4월 그룹 총수가 김석원 회장의 동생인 김석준 회장으로 바뀐 데다 코리안심포니와의 재계약도 세 차례 연장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지원을 계속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1994•1995년 4억 원, 1996•1997년엔 전년 대비 40% 증액된 5억5000만 원이 지원됐다. 1998년 IMF 여파에도 불구하고 2억 원을 지원했으나, 쌍용그룹은 사실상 해체 위기를 맞으며 이후 모든 지원을 멈추게 된다.


▲ 전미영(Ob· 수석) 김영민(Ob·객원부수석) 박시내(Cl)주장현(Fg)김지혜(Fl) 이미선(Fl·수석) 신주연(Fl·부수석)표규선(Fg·수석)박정환(Cl·수석) 김대건(Ob) 장재경(Cl·부수석) 김건철(Fg)

다음 세대를 위한 용평뮤직캠프페스티벌
홍연택은 오케스트라를 통해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통로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의 꿈은 코리안심포니와 쌍용그룹의 공동 개최로 운영된 용평뮤직캠프페스티벌을 통해 실현됐다. 쌍용그룹은 행사 예산으로 매년 3억 원가량을 지원했다. 이 덕분에 평균 10만~15만 원 안팎의 비교적 싼 참가비로 1년 전부터 출연을 섭외한 유명 강사진의 성실한 강의가 참가자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졌다.
용평뮤직캠프페스티벌은 크게 개인 레슨과 강의, 연주 지도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캠프와 연주회인 페스티벌을 함께 운영했는데, 외국의 저명 음악가들이 캠프 강사이자 페스티벌 연주자로 참여했다.
1989년 첫해에는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야외 연주회가 취소되어 500석 규모의 용평리조트 강당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부터 제대로 된 행사를 치르게 됐는데, 당시 코리안심포니 총무로 캠프를 주관한 최영석(현 국립오페라단 본부장)이 그때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여덟 개로 시작한 강좌는 마지막 해인 1997년엔 열여섯 개 강좌가 됐고, 대학생과 일반인뿐 아니라 고교생까지 참여하게 됐죠. 다른 부문보다 성악, 피아노는 인기가 많아 사전 오디션을 통해 캠프 참가자를 선발할 정도였어요.”


▲ 용평뮤직캠프페스티벌. 매일경제 1989년 6월 8일자

1995년 창단 10주년
10년 전 45명의 단원으로 시작한 코리안심포니는 10년 후 75명의 유급 단원을 거느리게 됐다. 1995년 4월 1일 홍연택이 지휘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이 창단 10주년 기념 무대에서 연주됐다. 무대에는 오케스트라 단원을 비롯해 이규도(소프라노)•김신자(메조소프라노)•성남시립합창단•한양대음대합창단 등 300여 명의 출연진이 올랐다. 이날의 연주는 5악장에 나오는 ‘삶을 위해 나는 죽지 않으리라’라는 노랫말처럼 언제나 관객 곁에 있겠다는 코리안심포니의 다짐이 됐다. 이듬해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카를로 팔레스키를 수석 객원지휘자로 맞이했고, 단원 여섯 명을 보강해 정식 3관 편성 체제를 갖추게 됐다.


▲ 창단 10주년 기념행사

IMF로 인한 위기
1997년 국제통화기금 금융 위기(IMF)로 인해 쌍용그룹의 지원이 1998년 하반기에 중단되면서 코리안심포니는 해체 위기에 직면한다. 존폐의 기로에 선 코리안심포니를 안타깝게 여긴 국내 음악인들이 무보수로 나서서 기금 조성을 위한 특별연주회 ‘코리안심포니와 친구들’을 마련한다. 하지만 티켓 판매 수익만으로 오케스트라의 살림이 펴지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월급제 대신 수당제로 전환한 1999년은 코리안심포니 최대 위기의 해였다. 연주가 있을 때마다 악장 20만 원, 수석 15만 원, 평단원 10만~13만 원을 수당으로 받으며 생활을 꾸려나갔다. 위기는 오케스트라의 유연성과 외연을 넓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같은 해 코리안심포니는 영화 ‘쉬리’의 O.S.T를 맡으며 이전까지 신시사이저나 컴퓨터 음악, 현악 4중주가 주를 이룬 국내 영화음악 풍토에서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얻는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오케스트라 인지도 역시 높아졌고, 이후 영화와의 인연은 ‘태극기 휘날리며’로 이어진다. 이외에도 스리테너 콘서트를 비롯해 해외 유명 음악가들이 내한할 때, 대부분의 음악은 코리안심포니의 몫이었다.

예술의전당에서 새롭게 시작하다
2000년에는 국립극장이 책임운영기관으로, 예술의전당이 비영리재단법인에서 특별법인으로 출범했다. 국립합창단과 국립오페라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 예술의전당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간 국립극장 상주 단체로 국립발레단과 국립오페라단 공연 연주를 맡았던 코리안심포니는 2001년 재단법인으로 바뀌면서 예술의전당과 상주 단체 계약을 맺는다. 예술의전당은 문화부에서 예산을 추가로 배정받아 단원 인건비를 제외한 대관료•홍보비•기획 공연 출연료 명목으로 연간 10억 원을 지원했다.


▲ 조성호(Perc) 김은정(Perc)김한규(Timp·수석) 고영석(Bass Tb) 정대환(Tb·부수석) 윤승호(Hn·수석) 신지현(Hn) 김기범(Hn) 박현욱(Trb) 김동균(Hn) 김정완(Hn·부수석) 김성중(Trp) 이응우(Trp·부수석) 박윤근(Tb)

오랜 재정난이 불러온 두 번째 시련
모든 것이 괜찮다 방심하는 순간, 몸살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오랜 재정난 속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코리안심포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2년 사단법인에서 재단법인으로 전환해 예술의전당 상주 오케스트라로 ‘입성’하게 된 과정을 두고 단원들 사이에 온갖 의혹이 제기되면서 당시 단장을 맡고 있던 이운환 단장과 마찰을 빚은 것.
같은 해 6월 민간 오케스트라로는 처음 결성된 노조 측은, 재정난으로 단원들의 월급은 최저임금 규정에 저촉될 만큼 열악한 상황에서 단장의 연봉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재단법인 전환 당시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두 달 치 월급과 퇴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오케스트라 운영 예산 내역 공개를 요구하게 된 것도 갈등이 불거진 요인이었다. 단장과 단원 간 불신은 사퇴 요구 및 고소, 고발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2003년 초 단장과 이사진이 사퇴했고, 당시 바로크합주단을 이끌던 김민이 신임 이사장 자리에 올랐다. 김민은 “낙관 80%, 걱정 20%다”라는 취임 소감으로 녹록지 않은 상황에 대한 심경을 표현했다. 그럼에도 “우리를 결속시키고 있는 것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말과 함께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예술의전당 사장 김용배가 이사장직을 겸하고, 김민은 음악감독직을 맡는다.
코리안심포니는 예술의전당 기획 프로그램 연주를 전담하는 등 공연의 폭을 넓히고 재정적으로 안정되어갔지만, 상임지휘자의 부재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로버트 쾨니히(2005), 러시아 국립교향악단 부지휘자 박태영(2006)을 객원 지휘자로 영입했지만, 상임지휘자의 필요성은 여전했다. 이후 2007년 한양대 교수이자 서울시향, 수원시향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박은성이 코리안심포니 제3대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한다.

창단 25주년, 그리고 미국 순회공연
창단한 지 꼭 25주년이 되던 2010년 3월 30일 기념연주회에서 상임지휘자 박은성과 코리안심포니는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협연 조성진), 모차르트 ‘마술피리 서곡’을 선보였다. 창단 기념 해를 맞아 작고한 초대 음악감독 홍연택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고른 레퍼토리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뉴욕 카네기홀과 LA 세리토스 퍼포밍 아트센터에서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뉴욕 공연은 바이올리니스트 주디 강, LA 공연은 피아니스트 홍국희가 협연자로 나섰다.

창단 28주년, 아시아로 열린 창
2011년 독일 작센 주립극장 수석지휘자 최희준이 제4대 예술감독(이때부터 음악감독에서 예술감독으로 명칭 변경)으로 취임한다. 당시 국내 최연소 상임지휘자라는 수식어가 그에게 붙었다. 유럽에서 막 돌아온 신예 지휘자와 함께 젊고 싱싱한 연주로 함께 성장해나갈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당시 최희준은 지휘자로서 느낀 코리안심포니의 장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코리안심포니는 국내 어느 교향악단보다 연주회 횟수가 많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집중이나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 어떤 지휘자가 오더라도 적응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다양한 지휘자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많다보니 지휘자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물론 평가는 매우 정확하다. 그래서 예술감독으로서 항상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 있다. ‘어떤 지휘자가 오더라도 흐트러지면 안 된다. 지휘자가 바뀌더라도 항상 일정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어야 한다”(‘객석’ 2012년 1월호).
최희준과 코리안심포니는 2013년 11월 한국문화원 개원 기념음악회(태국 방콕 국립극장)와 싱가포르 한인 50주년 기념음악회(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로 아시아 투어를 가졌다.

창단 30주년, 브루크너 전곡 연주 시작
2014년 1월 제5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임헌정은 2016년까지 예술의전당과 함께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한다. 지난해부터 ‘철학’을 주제로 음악과 인문학이 만나는 형태의 공연인 ‘토킹 위드 디 오케스트라’도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다.
임헌정은 지난해 ‘객석’과의 커버 스토리 인터뷰에서 코리안심포니의 열악한 임금 구조에 대해 “사회적인 지지를 받으려면 우선 음악가로서 할일을 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일단 연주를 잘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공감을 얻겠죠”라는 말을 건넸다.
떠올려보면 2015년 예술감독 임헌정의 고민은 30년 전 오케스트라 창단 시절 홍연택의 고민과 일면 맞닿아 있는 듯하다.

 


▲ 2010년 창단 25주년 미국 순회공연(뉴욕 카네기홀)

 


▲ 2012년 제182회 정기연주회 협연자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


▲ 2013년 제 186회 지휘자이자 협연자 오보이스트 알브레히트 마이어


▲ 2013년 싱가포르 한인 50주년 기념음악회(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

창시자 홍연택의 외침
‘객석’이 지켜본 지휘자 홍연택의 이상과 현실

코리안심포니 30년 역사에서 가장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 이는 단연 지휘자 홍연택이다. 한국 지휘계 1세대로 1985년 문화 예술의 불모지에서 첫 민간 오케스트라를 태동시킨 그의 발자취에는 기쁨과 고뇌가 공존한다.
1927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홍연택은 1953년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1963년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로 떠난다. 유학 중 지휘와 작곡을 배운 그는 귀국 후 안익태•김생려•임원식•김만복 등과 함께 1세대 지휘자로 활약하며 당시 국내에 거의 연주되지 않던 후기 낭만파 작품을 암보로 지휘하곤 했다.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를 비롯해 브루크너•말러•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곡이 그의 손을 거쳐 국내 초연됐다. 이후 홍연택은 1972년 국립교향악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했지만 10년 후 국립교향악단 운영권이 KBS로 넘어가면서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교향악에 미쳐 있던’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민간 교향악단’이란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연습하고 연주하며 코리안심포니가 창단된 과정을 지켜본 이들은 홍연택의 ‘모든 것을 오케스트라에 쏟아부은 정신, 연주력을 갖추기 위한 피나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건넸다.
코리안심포니를 움직이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2001년 5월 17일 타계하기까지 그가 ‘객석’과 주고받은 이야기, ‘객석’이 바라본 그의 발자취를 다시 들여다본다.
오케스트라 연습 현장에서 그의 철저한 음악관에 언급한 기사 중 홍연택은 오케스트라 연습과정에서 남다른 정열을 가지고 프레이즈마다 “다시!” “다시 한 번!” ”한 번 더!” 등의 말을 수없이 써가면서 혹독하리만큼 반복된 연습을 강요해 나간다. 오케스트라 연습 바톤을 손에 쥐면 그는 카리스마있게 단원들을 리드해 나간다. 숨이 막히도록, 아니 손끝이 저리도록 단원들에게 연습, 연습, 연습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해서 각 프레이즈와 파트의 부분연습이 끝나면 그때부터 그는 끝없이 흐르는 가락과 화음 속에 절도가 있거나 유연한 리듬에 그의 혼을 실어 본격적인 예술의 재창조 작업으로 들어간다. 여기서부터 그는 관현악적 음악 밸런스와 형식미를 살려가기 시작한다. 그는 음악적 조화의 맥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짚어간다. 그러다가도 어쩌다가 단원의 실수가 발견될라치면 여지없이 신경질적인 발언을 참고 지나는 일이 없다. 음악의 재창조에 있어서는 ‘적당히’라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인 듯하다.
사람이 제대로 되지 않고는 음악가가 될 수 없다는 지론을 이야기하며, “음악에 있어서 조기교육은 꼭 필요한 것이고, 가정에서 나름대로 또 그렇게 시키고 있지요. 그리고 사정에 의해 국민학교나 중학교 때 일찍이 유학을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우리 유학생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상대적으로 성공한 음악가는 잘 나오고 있는 편이 아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너무 빨리 출세만 시키려고 지향하다보니, 공부를 바닥부터 철저히 하지 못해서죠. 그저 콩쿠르에 나가 이기면 부모의 자랑거리고, 인기를 끄는데 급급했지요. 우리는 어려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배웠으면서도 사는 동안 자꾸 망각하는 것 같아요. 거북이가 나중에 앞서는 것을 알면서 토끼가 되려고 하지요.”
1990년대 후반 국내 교향악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는 질문에, “너무들 연습을 안 해. 지휘자는 공부를 안 하고. 내가 지휘를 할 때만 해도 브루크너고 말러고 모두 암보했어. 지금은 그런 곡 제대로 연주도 안 하잖아? 도대체가 고전주의 레퍼토리를 넘어서질 못해. 어떻게 오케스트라가 모차르트만 하고 베토벤만 해서 크길 바래? 바그너•브루크너•말러•스트라빈스키를 연주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교향악단이 될 수 없어.”
2000년 코리안심포니 창단 15주년 인터뷰 당시 소감을 묻는 질문에, “만감이 교차하지. 그래도 10주년 때는 리셉션이라도 할 여유가 있었고, 내가 직접 말러 2번을 지휘할 수 있었어. 이제는 봉급도 못 주고 있는 게 벌써 2년째야. 건강 때문에 지휘도 못하고. 난 이렇게 15주년을 맞은 게 기적 같아.”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코리안심포니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유가 있겠어. 음악에 미치고, 교향악에 미친 게 큰 죄라면 죄지.”
‘객석’이 건강으로 인해 지휘를 그만둔 지 오래된 그에게 다시 지휘봉을 잡을 생각이 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다시 무대에 설거야. 그때는 코리안심포니를 데리고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연주하고 싶어. 1971년에 내가 전 KBS교향악단(국립교향악단 전신)을 데리고 국내 초연한 곡인데, 지금 다시 연주하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

‘객석’ 1989년 12월호, 1991년 3월호, 2000년 5월호, 2001년 6월호 발췌

글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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