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강영호

조진주의 THE ART OF PRACTICE ①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4월 1일 12:00 오전

세상의 모든 예술가에겐 자신만의 시스템, 즉 수련 방법이 있습니다.

설사 그 수련 방법이 신나게 노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죠.

사전은 인격·기술·학문 따위를 닦아 단련하는 것을 수련이라 말하지만,

우리는 조금 다른 ‘수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편집자 주)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듯, 진지하고 느리게 그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카페의 바리스타가 그러하고, 얼마 전 제주도에서 본 라면 가게 사장님이 그러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아무 상관없는 이방인까지도 자신의 행위에 몰입시킨다는 것인데, 그 반복된 행위를 정성 다해 되풀이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적으로 느껴져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이끌리곤 한다.

무대에서 폭발적 에너지를 뿜어내기까지, 연주자들은 고립된 상태에서 ‘반복적 행위’를 ‘예술적 과정’과 결합하며 끊임없이 분투한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수련’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각각의 수련 방법과 그 과정만큼 한 예술가의 기질을 잘 드러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연주자들은 신(神)적인 참을성을 발휘하며 지치지 않고 연습을 해나가지만, 나처럼 연습만 시작하면 배가 살살 아프거나, 문득 좀 전까지 읽던 소설책의 결론이 참을 수 없게 궁금해지는 사람들은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수련의 조합이 존경받을 만한 예술가의 레시피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예술이 수련을 부르고, 수련이 예술을 부르는 끊임없는 상호작용 시스템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지성과 이성, 본능, 1%의 엑스터시까지 동반하는 진정한 예술가 말이다.

항상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것을 꿈꾸지만 소위 ‘귀차니즘’이 충만한 나는 언제나 매력적인 예술가들의 수련 과정을 궁금해한다. 그래서 좋은 연주자들을 만날 때면 그들에게 내가 만족할 만큼 집착하면서 물어보기에, 아마도 그들은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이번 호부터 시작되는 이 칼럼은 그 집착의 연장선이다. 동시에 존경해 마지않는 예술가들의 수련에 집중하고, 그들의 수련을 나의 수련에 적절히 버무려 나 또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고 싶은, 아주 사적인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수련의 예술’을 시작하며

오랜만에 만난 사진작가 강영호의 얼굴에는 평안과 안정감이 특유의 광기 어린 에너지와 묘한 교집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그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생겼다고 했다. 앤디 워홀처럼 드라마틱하고 치명적인 사랑만 할 것 같던 그에 대한 나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 초현실적 판타지에 존재하던 그는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일까.

강영호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라이선스 패션지 기사를 통해서였다. 자극적이면서도 지적인 자화상과 함께 눈길을 끈 것은, 아름답게 묘사되어 대조적 미를 뿜어내는 작품의 제목들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는 무엇에 홀린 듯, 성곡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전시를 본 나는 급기야 사심 가득한 팬레터를 보냈고, 신기하게도 그 이메일이 계기가 되어 강영호는 내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첫 비주얼 아티스트가 되었다.

‘수련의 예술’을 주제로 하는 칼럼에 첫 인터뷰이로 강영호를 지목한 것에 그 스스로 의아해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매우 본능적이고, 스쳐가는 순간의 우연을 믿고 작업하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체계 없이 작업하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그만의 프로세스가 있기 마련이고, 혹 없을지라도 ‘무질서의 질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강영호 작가를 첫 인터뷰 상대로 정했다. 큰 범주 안에선 이 또한 수련이기 때문이다. 체계를 없애는 과정이자 수련이랄까. 그와 얘기를 나누면 ‘수련’이라는 단어의 폭을 확실히 넓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의 진화 _관계 속에서 본질을 찾기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강영호 작가는 ‘예술’에 대해 “나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열정적인 노력”이라 자신 있게 말한다. ‘예술은 나의 운명’이라는 둥 허공에 떠도는 메아리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에 비하면 상당히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정의라 볼 수 있다.

어른이 되어서야 사진을 접한 그는 이것이 의외로 간단하게 나온 답이라 말했지만, 상업 사진 작가로서 순수예술에 발을 담그는 과정의 성장통과 변화를 다각도에서 고심한 흔적이 느껴졌다. 복잡한 개념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더 깊은 고민을 동반하는 법이니까.

최근 강영호 작가는 반복적인 자기 학대를 통한 변신의 방식을 벗어던졌다. 카메라와 거울이라는 포맷은 같지만 공동 작업을 통해 관계 속에서 본질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의 표현으론 ‘차원 높은 둔갑술’이란다. 현대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위 ‘막눈’인 내게도 조금 더 집중도가 높은 접근 방식으로 보인다. 그는 예전처럼 분장하고 찍는 것에 질렸거니와,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강박이 힘들었단다. 한동안 공황장애로 작업하지 못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제는 내 모습이 사진에서 많이 빠졌고, 컬래버레이션 개념으로 나와 다른 이의 관계 속에서 퍼포밍을 합니다. 예전엔 스스로 변신하고 둔갑술을 펼쳤다면, 이제는 타인에게 빙의해 대상을 지휘하는 거죠.”

이 모든 것을 실현해내는 도구는 언제나처럼 카메라와 거울이며, 여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것 또한 늘 그렇듯 음악이다. 다시 만난 그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보는 시각 또한 점차 달라지고 있기에 다행스럽다고, 그리고 스스로 발전하는 것을 느낀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관념적 수련 _상상으로 구현하는 세계

수련, 연습이라는 단어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강영호에게 이 칼럼에서 말하는 ‘수련’이란, 사실상 예술적 ‘프로세스’에 가깝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기본적으로 그는 수련보다는 ‘예술적 에너지’를 중요시했다. ‘재능’을 이야기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는 예술가도 팔자인지라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며 동심을 파괴하는 답을 내놓았다.

“예술혼을 머금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다 그것을 열정적으로 뿜어내는 에너지는 예술가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해요. 오랜 시간 연습하고 다듬어야 나오는 사람들은 예술가보다는 장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장인정신만으론 종합적인 예술가가 되긴 힘들지 않을까요.”

노력만 해서 되는 건 아니라는 그의 말. 그렇지만 나는 반박하고 싶었다. 예술적 에너지와 수련이 적절히 어우러져야 깊은 의미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 때문이다. 그는 좀 더 구체적인 자신의 생각을 연이어 말해주었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표현의 테크닉은 수련할 수 있지만, 상상력을 가능케 하는 본질적 에너지는 노력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죠. 테크닉은 연습으로 향상될 수 있지만 그 테크닉을 운영하는 디렉션 능력에서 예술가의 급이 갈린다고 생각해요. 본능적이고 본질적이며 직관적인, 선천적 에너지 없이는 높은 수준의 예술가가 될 수 없어요.”

충격을 받았다. 예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과연 이 에너지를 지니고 있을까?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던져온 질문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는 ‘상상력’ ‘판타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판타지라는 단어는 각종 광고에 쓸데없이 남용되는 말이니 그러려니 해도, 상상력은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들어본 것처럼 왠지 생소한 느낌이 들어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강영호의 예술적 판타지는 반복된 상상의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마치 거짓말을 되뇌면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 스스로 느끼듯, 그는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해 관객과 그 자신까지 그 세계가 실존한다고 설득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강영호의 수련은 그 무엇보다 반복을 거듭하며 상상력의 한계를 밀어붙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피사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모습을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설령 그것이 변신이든, 실체가 없는 형태로 표현되든 말이다.

강영호의 수련은, 상상력으로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그 판타지가 다시 상상력의 한계를 부추기는 상호작용을 반복하는 것이다.

행동적 수련 _몰입 높은 리허설의 반복

강영호는 즉흥적 몰입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었다. 나라면 작품의 완성도를 좀 더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애쓸 것 같은데, 그는 동선이나 안무 혹은 콘셉트마저 사전에 상의하거나 계획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술적인 부분을 모르면 누군가에게 물어보면서 배웠거니와 작업 방식을 계산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정말 그에겐 무질서 속의 질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행동의 반복은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묘사할 때만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대상자로 하여금 이 작업을 좋아하게끔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해요. 실제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작업 첫날부터 빠져들긴 하지만 그때의 결과물은 약간 촌스럽습니다. 대상자를 두고 일반적인 촬영을 먼저 하고, 또 내가 거울 앞에서 작업하는 걸 보여주기도 해요. 서로 가까워지고 다듬어지면서 깊은 것들이 점점 나오기 시작하죠. 서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되, 서서히 거울 안에 들어가도록 신경 씁니다. 보통 4~5회가량 작업을 반복하며 작품을 이끌어내는 편이에요.”

작업 방식에 대한 그의 설명을 연주자에 비유하면, 혼자 하는 연습보다 몰입도 있는 리허설을 여러 차례 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실력과 별개로, 작품과 함께 동고동락한 시간을 속일 수 없다는 나의 평소 생각과 맞아떨어져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이런 생각을 느꼈는지, 그가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너무 많이 반복하면 매너리즘이 생겨요. 그래서 그냥 관둘 때도 있어요.”

음악은 순간적으로만 존재하는 무형의 예술이기에 컨트롤하기가 까다롭다. 두 번째 기회는 없다. 그렇기에 바이올린이라는 한정된 악기로, 무언가 더 큰 의미를 담으려는 욕심을 내다가 나도 모르게 몸짓이나 표정이 소리를 앞지를 때가 있다. 그때는 몰입으로 착각하고 만족하기 쉽지만, 나중에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엉망진창이기 일쑤다. 순간적 감정이 이성적 판단, 즉 소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비주얼 아트는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 예술이기에, 이것을 끊임없이 퍼포먼스와 버무려내는 이 미디어 아티스트의 레시피가 궁금했다.

“사진을 신경 쓰면 몸이 덜 움직이고, 퍼포먼스에 신경 쓰면 사진이 덜해지고. 몰입한 순간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 있어요. 연습 때보다 관객이 있을 때가 훨씬 잘되는 것 같아요.”

맙소사, 그는 이런 부분조차 노하우 없이 그저 우연에 맡기는 것일까. 그는 “내 열정이 확 뿜어져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그 조건을 만드는 것도 아티스트의 능력”이라는 말을 건넸다. 그가 말하는 조건은 의외로 단순했다. 최적화된 사운드 시스템과 짜증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주위에 없는 것…. 그리 유난스럽지 않은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그는 스스로 머금은 예술혼을 자신 있게 뿜어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수련 _하고 싶지 않은 걸 해야,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

강영호는 논리적이지만, 복잡한 것을 무척 귀찮아한다. 지식이나 교양의 틀을 지키되, 지식이 본능을 길들이는 것을 허락지 않는 야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 야성은 타인을 무척이나 긴장하게 만들거니와, 주변인을 그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살아라, 뭐든지 다 해봐라, 하고 싶은 걸 할 때 행복하다’고 말하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난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진, 정말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게으름을 이기고 힘을 내서 합니다. 내게 예술은 삶의 수단, 명예의 수단, 돈의 수단, 표현의 수단이자 내 행복의 수단이기 때문이죠. 신기한 건, 일단 시작만 하면 정말 좋아해서 시작한 것처럼 움직이게 돼요. 몰입하는 사이 디테일에 대한 욕심도 늘어나죠. 일을 하는 중엔 ‘끝나면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러고선 나중에 또 작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해요.”

그의 작품을 두고 혹자는 ‘부담스러운 자기애가 거북하다’고 평한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작업이 무르익어갈수록 그의 작품들엔 점차 ‘힘’이 빠지고 있지만, 그의 내러티브엔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진작가 강영호의 힘은 아무런 방어기재 없이 그 나르시시즘을 담백하게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거기에 담긴 진심이다. 때문에 그의 작업 방식에서 드러나는, 어쩌면 과하다 싶은 드라마적 요소는 몇몇 평론가의 생각처럼 작가가 임의적으로 만들어놓은 센세이셔널한 미술적 장치가 아닌 그의 진심이며, 그의 본질이다. 더 세게, 더 크게 가다가 몰락할 것이라 예측한 이들의 생각과 달리, 그는 멈추지 않고 발전하는 중이다.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은 그의 몇 마디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내가 몇 년에 걸쳐 힘들게 얻은 교훈을 그는 시크하고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에너지가 강해서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예술가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만 추구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닌 방만함이다. 귀찮음을 감수해야 내가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오늘, 행복을 추구하고자 불행을 감수하는 나의 직업이 자랑스럽다.

사진작가 강영호

강영호는 항상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듯 대상과 교감하며 사진을 찍는 독특한 방식으로 ‘춤추는 사진작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홍익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2000년대 초, 광고사진 업계에 등장해 영화 ‘인터뷰’ 포스터와 패션 브랜드 지오다노의 광고 사진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켜왔다. 2009년부터 자신의 상상력을 순수예술계로 확장해 작품 ‘99 Variations’를 내놓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는 한국에서 태어나 예원학교를 수석 입학, 재학 중 인생의 멘토 폴 켄터를 만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국 클리블랜드로 유학을 떠났다. 매년 은밀히 서울대 입시를 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은 커티스 음악원을 거쳐 다시 폴 켄터의 문하로 돌아가 클리블랜드 음악원 학사 학위를 마쳤다. 제이미 라레도 교수와 동 학교에서 석사·전문사 과정을 마쳤으며 최근 세계 3대 콩쿠르인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1위(2014)를 수상했다.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거리 공연 프로젝트 ‘클래시컬 레볼루션 코리아’의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동물을 사랑하고, 아이폰 중독자이며, 자연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TV 보는 것을 음악보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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