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태형
서른 살을 맞이한 피아니스트. 20대에 모은 음악의 조각들
20대에 모은 조각들
“프로코피예프에게 이렇게 장난스러운 표정이 있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김태형이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며 말한다. 프로코피예프보다 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이다. 휴대폰을 보니 김태형의 말에 수긍이 간다. 프로코피예프는 항상 무겁고 점잖은 모습인데, 김태형이 보여준 사진 속에선 개구쟁이 소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이 사진을 발견하곤 휴대폰에 계속 간직하고 있단다.
“러시아 사람들은 다 이 표정을 갖고 있어요. 유머러스한 건 아닌데 굉장히 개구쟁이 같아요. 그래서 프로코피예프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곡을 썼구나 싶죠.”
김태형은 2012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프로코피예프를 ‘못되게’ 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러시아에서 공부하면서 내가 놓치고 있던 요소들을 알아냈어요. 굉장히 감각적인 부분이죠. 연주할 때 연상되는 이미지가 많아졌어요. 러시아에서 본 장면이 모여 또렷한 색채를 줍니다. 이제는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예프를 연주하는 것이 편해요.”
올해 서른이 된 피아니스트. 여기서 잠시 지난 20대 동안 그가 모은 조각들을 정리해보자. 김태형은 한예종에서 강충모를 사사한 뒤, 2008년 뮌헨 국립음대로 유학을 떠나 엘리소 비르살라제를 사사했다. 2010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해 5위를 수상했으며, 콩쿠르 직후 바인슈타트 매니지먼트와 계약했다. 뮌헨 음대를 정년퇴임한 엘리소 비르살라제는 정년퇴임제가 없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둥지를 옮겼다. 2011년 김태형은 엘리소 비르살라제를 따라 모스크바로 떠났다.
2015년 현재, 그는 다시 뮌헨에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첼리스트 헨드리크 블루멘로트와 트리오 가온을 결성해 뮌헨 국립음대에서 아나 추마헨코·프리데만 베르거·크리스토프 포펜에게 실내악 지도를 받고 있다.
러시아, 음악이 무르익은 곳
2007년 ‘라이징 스타’라는 수식어를 달고 ‘객석’ 첫 인터뷰를 했습니다. 23세였고, 한예종 졸업 학기를 다닐 때입니다. 당시 “러시아 연주자들에게 조그마한 차이가 발견될 때, 그게 뭘까 늘 궁금했다”라고 말했죠. 지금은 그 ‘조그마한 차이’를 알아냈나요.
‘뮌헨’에서 ‘독일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비르살라제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적 음악 테크닉을 배웠습니다. 러시아 유학도 나라를 좇은 것이 아니라 비르살라제를 따라간 겁니다. 러시아는 계통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각 클래스가 단단하게 구성돼 있죠. 교수마다 엄격하게 짜인 암묵적 ‘라인’이 있습니다. 교수 밑으로는 조교·작은 클래스·강사 등 ‘가족’이라고 표현할 만큼 견고한 울타리가 있어요. 교수는 이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타이트’하게 가르칩니다. 음악을 까다롭게 전수받다 보면 자신의 개성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연주자들은 오히려 견고한 규율 속에서 ‘나의 색’을 찾아냅니다. 자신의 음악을 속 시원하게 말하는 유럽과는 반대죠. 러시아 연주자들은 틀 안에서 음악적 개성을 분명히 고수하려 노력합니다. 그 열정이 ‘조그마한 차이’를 만들더군요.
러시아 예술만의 특징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러시아 사람들은 넓은 땅덩어리만큼 마음이 넓습니다. 그 부드러움이 모든 예술에 녹아 있어요. 세계적으로 예술 동향이 엔터테인먼트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티스트의 ‘스타성’을 내세워 홍보하고, 자극적인 요소를 끌어내죠. 하지만 러시아 예술에는 아직까지 ‘순수함’이 살아 있어요. 러시아 관객은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에 갑니다. 연주자보다 연주되는 ‘곡’에 더 관심을 가져요. 홍보할 때도 연주자의 특이성보다 레퍼토리를 내세웁니다. 반대로 유럽은 굉장히 엔터테인먼트적이에요. 유럽에는 훌륭한 연주자들이 많이 몰려 있어 각각의 개성을 부각시키는 편입니다. 러시아의 겨울은 정말 추워요. 순수한 예술을 위안 삼으며 긴 겨울을 견뎠습니다.
클래식 음악에서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는 어떻게 고려하나요.
관심은 당연히 좋은 겁니다. 하지만 그 관심이 얇은 껍데기로만 쌓여 있으면 곤란합니다. 아티스트의 스타성에 매력을 느껴 클래식 음악 예술성에도 가까워지면 좋죠. 하지만 얇은 막은 금방 벗겨집니다. 워낙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잖아요. 충분한 여유를 갖고 음악을 감상한 후, 마음속에 오래 간직되는 음악을 향유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러시안 시리즈’ 독주회를 제안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레퍼토리는 무엇인가요.
차이콥스키와 프로코피예프 소나타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장대한 러시아 레퍼토리를 원했는데, 곡을 모으다 보니 지나치게 넓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청중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곡을 떠올려봤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곡을 찾아 들려주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 소품으로 이번 프로그램을 구성했고, 곡마다 무게가 달라 순서 배치에 공을 들였습니다. 격동적인 라흐마니노프를 일부러 1부에 넣었어요. 라흐마니노프를 들은 뒤 감각적이고 색채적인 스크랴빈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유가 느껴집니다.
이번에 선보이는 스크랴빈 소나타 4번은 2007년 금호아트홀 라이징 스타 공연에서도 연주했어요. 8년이 지나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곡’을 다시 연주합니다.
그때 스크랴빈 소나타 4번을 연주했는지 몰랐습니다.(웃음) 3개월 전에 연주한 곡을 다시 칠 때도 새로워요.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볼 때, 작품의 주제는 똑같이 파악되지만 작가가 주제를 위해 구성한 문단이 보이는 것과 비슷해요. 악보 곳곳에 숨어 있는 작곡가의 의도를 발견하는 거죠.
어릴 때 연주한 음악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나이가 들수록 표현하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 싶은 ‘요소’들을 구분했어요. 지금은 음악을 진행할 때 가야 하는 길이 모호하면 그 요소들을 연결하는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보다 입체적으로 접근하게 됐어요. 스물두 살 즈음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연주했던 영상이 가끔 방송되는데, 정말 민망해요. 너무 평평하게 들린달까. 그때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이제 그만 나왔으면 좋겠는데(웃음)!
러시아에서 경험한 음악이 연주에 어떻게 녹아드는지 궁금합니다.
친구들과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3중주 2번을 연습하다가 1악장 도입부의 슬픈 선율에 대한 의논이 펼쳐졌어요.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슬픔에도 종류가 많잖아요. 애잔하게 슬플 수도 있고, 먹먹하게 슬플 수도 있고, 희망이 없는 슬픔도 있습니다. 그 곡에 담긴 ‘슬픔’을 단어로 정의 내리진 못하겠어요.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표현하려던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겠더라고요. 러시아에서 공부한 이후로 주변에서 색깔이 다양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줍니다.
트리오 가온, 새봄이 찾아오다
‘러시안 시리즈’ 일환으로 트리오 가온 리사이틀을 선보입니다. 앙상블을 결성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에도 뮌헨에서 자주 연주를 했습니다. 프리데만 베르거가 실내악을 정식으로 배워보면 어떨지 제안을 했지만, 함께할 단원이 없었어요. (이)지혜와는 예원학교·서울예고·한예종 동기입니다. 실내악을 해보겠느냐고 물으니, 열의에 찬 목소리로 승낙했어요. 헨드리크 블루멘로트는 뮌헨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첼리스트입니다. 단원 모두 무대 경험이 많은 편이라, 함께 피아노 3중주를 하면 무대를 ‘주물럭주물럭’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온’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요.
첼리스트 헨드리크 블루멘로트가 한국어로 짓자고 먼저 제안했어요. 의미도 중요했지만, 외국에서 발음하기 쉬운 팀명이 필요했습니다. 고심 끝에 ‘세상의 중심’과 ‘온도를 가한다’는 뜻의 ‘가온’으로 결정했어요. 처음엔 임팩트가 약한 것 같았는데, 이름에 강한 심지가 있습니다. 오래 두고 볼수록 괜찮은 느낌!
한국에서 실내악이 대중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실내악은 다른 클래식 음악보다 공연장에서 ‘자주’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관령국제음악제나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이미 훌륭한 실내악 레퍼토리를 많이 발굴했습니다. 하지만 축제 실내악단들은 보통 단발성으로 구성돼요. 결속력을 갖고 장기간 함께 호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해 3월, 빈에서 열린 하이든 실내악 콩쿠르에서 트리오 가온이 3위를 했습니다. 앞으로도 콩쿠르에 도전할 생각인가요.
자제할 생각입니다. 순수한 의도로 모인 팀인데, 콩쿠르에 포커스를 맞추면 ‘열정’이 ‘경쟁’으로 변질됩니다. 오히려 이번에 콩쿠르에 참여하면서, 트리오 가온이 추구하는 방향을 확실히 알았거든요.
이제 서른 살입니다. 지난 20대를 떠올릴 때, 떠오르는 단어 하나는.
열심!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후회가 없어요.
앞으로의 30대는 어땠으면 좋겠나요.
예술에 대한 뜨거운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나이 들수록 예술에 대한 열망이 적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예술, 참 힘들잖아요. 무대에서도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변수가 생기기도 하고, 음악에 대한 나의 색채를 고집하는 데에도 염려가 있죠. 예술가란 자기 인생을 오롯이 예술에 헌신해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마다 아직은 스스로를 불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음악이랑 연관된 인생입니다.
무언가를 열망하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경험이 선물해준 의연함으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게 된다. 더 단단해질 줄 알았던 그의 타건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고 여유로워진 터치는 지금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성장을 열망하게 만들고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김태형의 조각은 그 자신과 피아노, 단둘뿐이다.
글 장혜선 기자(hyesun@gaeksuk.com)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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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오 가온(바이올린 이지혜, 첼로 헨드리크 블루멘로트, 피아노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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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피아노 독주회
4월 16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라흐마니노프 ‘6개의 악흥의 순간’,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4번 외
트리오 가온 리사이틀
4월 23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3중주 1·2번, 아렌스키 피아노 3중주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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