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안스네스와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선사하는 가장 인간적인 베토벤의 음악 세계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가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여행’이라는 프로젝트로 한국을 찾는다. 그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연주자다. 성실한 성품과 깊이 있는 음악이 매력적인 안스네스가 1996년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첫 내한 공연을 가질 때만 해도 그의 존재는 유망한 젊은 피아니스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세계 음악계에서 촉망받는 연주자를 넘어 거장으로 진화해가는 최전성기의 음악가로 변모하고 있다.
안스네스의 이력을 보면, 여느 성공한 연주자처럼 화려한 콩쿠르 수상 경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섯 살 때 음악 교사인 부모에게 피아노를 처음 배우고 본국인 노르웨이 베르겐 음악원에서 공부한 안스네스는 1987년 오슬로에서 데뷔한 이래 뉴욕과 워싱턴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점차 음악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경우다. 하지만 그가 음악가로 성공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레코딩에서 보여준 음악적 역량 때문이다. 그가 음반에서 보여준 섬세하고 시적인 해석은 그리그의 서정 소곡집의 감성을 더욱 빛냈고, 청명한 타건과 깨끗한 음색은 슈만 협주곡의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있게 완성했다.
그동안 그는 그리그와 라흐마니노프,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많은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해왔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베토벤’을 통해 그가 전하려 한 음악 정신을 심도 있게 탐구한다. 40대에 이르러 비로소 ‘베토벤’을 제대로 탐구하기 시작한 그가 오랜동안 자신과 음악적 가치를 공유해온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의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자못 기대된다.
2012년부터 전 세계 22개국 55개 도시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베토벤 여행(The Beethoven Journey)’ 프로젝트는 4년간 세계 주요 무대에서 총 150회 이상 베토벤 공연을 선보이는 것으로, 소니 클래시컬을 통해 발매한 세 장의 음반과 곧 공개할 예정인 필 그랍스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등이 이 베토벤 여정에 포함되어 있다. 프로젝트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2015년, 아시아 투어 기간 중 내한하는 안스네스와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이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선보인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음악의 진실성을 믿었던 베토벤의 정신을 전하고 싶다는 안스네스와 그가 추구하는 베토벤 음악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여러번 내한한 것으로 안다.
1996년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서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데뷔 무대를 가졌을 때, 한국이라는 나라와 청중에 대해 무척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음악을 대하는 청중의 열정이 인상적이었고, 특히 젊은 청중이 많은 것에 놀랐다.
당신이 음악으로 만난 베토벤은 어떤 존재인가?
학생일 때는 베토벤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힘과 에너지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베토벤의 섬세한 음악적 표현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음악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베토벤은 과장된 미사여구나 관능미를 배제하고 오로지 내면의 순수한 진실만 표현하려 노력했기에 그의 음악은 질리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하다. 그의 음악은 쇼팽이나 슈만의 음악처럼 친근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고결한 이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그의 능력은 그 어떤 작곡가보다 뛰어나다. 그 능력은 자신의 음악을 더 강렬하게 만든다. 그는 인간적으로 비이성적이고 때로는 변덕스러웠지만 정신만은 맑고 순수했으며, 모든 내면을 음악에 녹여낸 작곡가였다.
베토벤의 작품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베토벤의 음악이 위대한 것은, 한 작품에 많은 메시지를 다양한 표현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강렬한 음악은 시종일관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몽환적’이라고, 또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낙천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각 작품 간에 대조적인 표현이 많아 오히려 평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보면, 그 대조적인 표현이야말로 두 곡을 위대한 작품으로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베토벤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베토벤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이상’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다. 그의 음악에는 자기 연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것 같아도 언제나 희망을 향해 나아갔다. 베토벤의 음악에는 무엇보다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 인간적 위안을 갖게 하고,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준다.
음악 작업을 함께해온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만의 특징이 있는지 그들과 함께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을 만난 건 내게 큰 행운이다.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그들과 연주하면서 “내가 꿈꿔온 바로 그 소리야!” 하고 외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의 열정과 몰입은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작품에 담긴 따뜻한 감성이 살아나 전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소리로 승화한다.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했던 연주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언제였나?
베토벤 여행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각 나라에서 그의 음악을 연주한 것은 큰 행복이었다. 특히 베토벤의 제2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할 때 느낀 여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00여 년 전 베토벤 음악이 탄생하고 초연한 바로 그 자리에서 펼친 연주는 홀의 아름다운 음향과 함께 내게 평생 간직할 감동을 선물했다. 빈에서의 공연과 함께 얼마 전 나의 고향인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치른 연주회 역시 아름답고 황홀했다. 최근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가 조산하는 바람에 ‘베토벤 여행’의 일부를 취소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베르겐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끝부분을 지휘할 때쯤 갑자기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것은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진 기쁨의 그 순간이 너무 감사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연주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모든 위대한 음악이 그렇듯이 진정성이 있을 때 마음이 움직인다. 깊은 진실성으로 청중에게 이야기를 전하듯 작품을 연주하면 감정이 그대로 전해질 거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음악 자체가 훌륭하면 청중은 자연히 감동받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흥미 위주로 즉흥적으로 흘러가는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은 사람들이 자신에게로 향해가는 내면의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어떤 분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클래식 음악의 힘이다.
‘베토벤 여행’ 프로젝트의 끝은 어디인가?
‘베토벤 여행’이 끝나면 모든 종류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싶다. 예를 들면, 더 많은 프랑스 음악이나 쇼팽의 곡을 연주할 수도 있고, 그 밖에 다양한 레퍼토리를 마음껏 연주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은 내게 생소한 길이지만,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한국의 음악 애호가에게 한마디 한다면.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어 설레고 기쁘다. 한국에서 공연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때마다 늘 행복한 기억이 있다. 한국의 청중과 ‘베토벤 여행’의 여정을 함께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음악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베토벤의 정신이 그날 한국의 음악 팬에게 잘 전해지기를 바란다.
사진 고양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