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루비니 오페라 ‘메데아’

열광으로 가득찬 그랑 테아트르 무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6월 1일 12:00 오전

‘메데아의 교과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전설의 등장! 마리아 칼라스의 현신이라 불리는 알렉산드라 데조르티의 열연이 빛난다

루이지 케루비니, 관객에게는 낯설지만 베토벤과 베를리오즈에게 영향을 준 19세기의 대표적인 음악가다. 오페라와 종교음악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케루비니의 대표 오페라 ‘메데아’가 지난 4월 프랑스의 보르도 무대에 올랐다. 장소는 세계적 건축물로 인정받는 극장, 그랑 테아트르. 9일부터 24일까지 공연한 ‘메데아’는 독일 연출가 크리스토프 로이가 디렉팅한 것으로, ‘올 시즌 그랑 테아트르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케루비니의 초창기 ‘메데아’는 오페라 코미크로 1797년 3월 17일 파리 페이도 극장에서 초연했다.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을 다룬 이 작품은 장중한 줄거리에 서민적 오페라 코미크 형식을 띠고 있어 당시 프랑스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프랑스 버전의 실패 후 사라질 뻔한 작품 ‘메데아’가 다시 무대에 등장한 것은 1802년.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메데아’가 등장하면서부터다. 19세기 절정을 달리던 케루비니의 인기가 20세기 들어 빛을 잃었고, 공연장에서 작품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뛰어난 작품은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그 빛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1948년 ‘케루비니협회’를 설립하며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메데아’는 굵직한 공연 계보를 잇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메데아’는 대중적이지 않다. 첫 번째 이유는, 음악적 요소보다 드라마적 요소에 집중하기 때문. 메이저 작품으로 분류됨에도 ‘메데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아리아가 없다는 것은 이 작품이 멜로디 흐름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다. 특히 오리지널 버전은 대화체 위주의 대사가 오페라의 주가 되고 있으며, 클라리넷과 트롬본 같은 관악기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드라마의 밀도를 높인다.

두 번째 이유는, 마리아 칼라스라는 세계 최고 메데아가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디바로 평가받는 칼라스가 ‘메데아’에 출연한 것은 1953년. 그녀는 오페라의 타이틀 롤뿐 아니라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메데아’에도 출연했다. 마치 분신처럼 완벽한 연기를 선보인 마리아 칼라스는 ‘메데아의 교과서’처럼 여겨졌으며, 그 누구도 그녀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 메데아 역의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데조르티

마리아 칼라스를 잇는 소프라노의 탄생

그럼 왜 그랑 테아트르는 대중적이지 않은 까다로운 작품을 프로그램으로 선택했을까? 그 시작은 2012년 크리스토프 로이가 연출한 ‘맥베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이디 맥베스로 분한 메조소프라노 제니퍼 라모어는 연출가와 끊임없는 교감을 나누었고, 그 결과 작품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를 인상 깊게 본 그랑 테아트르 측은 두 사람에게 꼭 어울리는 다음 작품으로 ‘메데아’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이후 라모어는 로이와 아이디어를 서신으로 주고받으며 자신이 연기할 메데아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고, 새로운 메데아 캐릭터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자송에게 버림받은 희생양 메데아가 아닌 성악적 개성을 지닌 한 여성이자 인간 메데아가 바로 그것. 이 작품은 제니퍼 라모어가 재단한 오트 쿠튀르 같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제니퍼 라모어는 공연 열흘 전 급작스러운 목 염증으로 중도 하차한다. ‘짧은 기간 동안 누가 제니퍼 라모어가 탄생시킨 역할을 완벽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골머리를 앓던 그랑 테아트르는 캐나다 출신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데조르티를 발견하고 탄성을 지른다. 혜성처럼 나타난 그녀는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 투테’의 피오르딜리지 역과 ‘돈 조반니’의 돈나 안나 역으로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뉴욕 앨리스 부시 오페라극장에서 이미 메데아 역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 갑작스러운 타이틀 롤의 교체에 관계자들은 노심초사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4월 9일 오프닝 공연에서는 예술성과 흥행성을 모두 만족시킨 최고의 공연에 갈채가 이어졌다. 언론은 한결같이 ‘알렉산드라 데조르티, 그랑 테아트르를 불사르다!’라는 타이틀로 이날의 흥분을 표현했다. 성공의 주역 데조르티는 콜로라투라 스타일의 고음을 수려하게 완주한 것은 물론, 배신당한 여자의 허탈감과 복수심을 섬세하게 연기했다. 손동작 하나까지 계산한 데조르티의 열연에 관객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화체에 가까운 레치타티보를 자극적이고 귀에 거슬리게 부른 것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오프닝 공연 후 그랑 테아트르 극장장 토비아스 리히터는 “알렉산드라 데조르티 자신이 메데아였다”라고 극찬했고, 데조르티는 하루아침에 마리아 칼라스의 전설을 잇는 디바에 합류했다.


▲ 웨딩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부티크로 찾아간 메데아

악의 화신 메데아, 그랑 테아트르를 불사르다

연출가 크리스토프 로이는 고대 그리스 신화 ‘메데아’를 현대판으로 각색했고, 무대 장식가 헤르베르트 무라우어는 신화적 발상을 염두에 둔 현대적 무대장치를 선보였다. 막이 열리면 무대는 나무 벽들이 부조된 인상적인 클래식 세트가 보인다. 그 가운데 마치 창문처럼 설치한 사각 테두리 안으로 원근을 살린 코린트 양식의 아름다운 전원이 들여다보인다. 이때 연출 포인트는 편안한 분위기 아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서스펜스를 전달하는 것.

무대 바닥보다 높게 설치한 오케스트라석 뒤로 이어진 포디엄은 패션쇼의 런웨이처럼 보이는데, 여기에도 연출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소규모로 편성한 오케스트라의 어쿠스틱만으로 거대한 그랑 테아트르홀을 가득 채우겠다는 것과 에피다우루스 같은 고대 노천 원형극장의 구조를 재현하겠다는 것. 의도는 적중했다. 메데아가 ‘내 갈 길은 어디인가’라며 포디움을 무겁게 오가는 장면에서 관객은 현장감과 생생한 고뇌를 체감할 수 있었다. 마르코 레토냐의 지휘로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시작되자 두 청소년이 등장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논다. 야구 모자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은 자송(테너 안드레아 카레)과 메데아가 낳은 두 아들. 이때 검은 정장을 입은 신사가 등장해 아이들을 훈계하는데, 촌스러운 복장의 처녀가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신사는 코린트의 왕 크레옹(베이스바리톤 대니얼 오쿠리치)이고, 처녀는 왕의 딸 디르세(소프라노 그라치아 도론치오)로 자송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이어서 디르세는 검은 스커트 정장 차림의 두 어시스턴트를 따라 여자들이 마네킹처럼 포즈를 취한 부티크로 이동한다. 웨딩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찾아간 부티크는 프라다·구찌를 연상시키는 럭셔리한 공간. 이곳은 메데아를 버리고 디르세와 결혼하는 자송의 동경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연출가는 자송의 허영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자송은 훔친 황금 양피를 들고 가서 정식으로 디르세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디르세는 황금 양피가 메데아의 도움으로 훔친 것이란 것을 알고 두려움에 떤다. 사람들은 메데아를 죽이라고 아우성치지만 크레옹은 죽음 대신 추방을 선포한다. 이후 다시 나타난 메데아는 자송을 유혹하다 실패하자 크레옹 왕에게 접근한다. 메데아에게 홀린 채 유혹을 어렵게 뿌리치는 크레옹 역, 오쿠리치의 설득력 넘치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2막 디르세와 자송의 결혼식은 마치 스냅 사진 같다. 연출가 로이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디르세와 신랑 자송 주변으로 친구와 가족들을 일렬로 배치, 포즈에 따라 이미지가 스타일리시하게 변하도록 연출했다. 캘빈 클라인이나 돌체앤가바나 광고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자송의 허영을 꼬집는 아이러니한 설정이다.

코린트 시민의 위협을 무릅쓰고 최후의 복수를 다짐한 메데아는 마술 드레스와 왕관을 디르세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의식을 치르듯 속옷 차림의 두 아들과 마지막 식사를 한다. 메데아의 의도를 모르는 디르세는 왕관과 마술 드레스를 입고 독살당하고 만다. 이제 남은 것은 메데아의 죽음뿐.


▲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3막

3막은 거대한 화염으로 시작한다. 극장 전체가 화염으로 휩싸이고 자송은 디르세의 시체를 들고 휘청댄다. 그 가운데 두 팔을 쭉 뻗고 도도한 시선으로 경악하는 코린트 시민을 응시하는 메데아. 분노로 가루가 되듯 그녀 또한 화염 속으로 사라진다. 비극적이고 스펙터클한 마지막 장면을 보며 관객은 무엇에라도 홀린 듯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데조르티의 소름 끼치는 연기가 그랑 테아트르를 녹여버릴 듯한 순간이었다.

사진 Wilfried Hö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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