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이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컨템퍼러리 서커스 음악극 ‘사물 이야기’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지난 4월 말 개관한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개관 기념작으로 세계 초연한 ‘사물 이야기’는 한국의 전통적 사물인 꽹과리·북·장구·징을 찾아 떠나는 네 아이의 모험을 중심축으로 삼고, 여기에 호주의 재즈와 서커스를 한 축으로, 한국의 전통음악과 연희를 또 다른 축으로 삼아 그려낸 입체 도면 같은 작품이다.
호주에서 30년간 움직임 중심의 드라마 작업을 해온 단체 렉스온더월의 퍼포머들과 한국의 전통음악가 및 연희자들, 국제공동창작을 전문적으로 맡아온 아시아나우는 2012년부터 작품을 개발해왔다. 그간 네 차례에 걸쳐 시드니와 서울을 오가며 이뤄진 워크숍을 통해 예술가들은 언어와 문화, 창작 방식의 차이를 서로 경험하고 공유하며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갔다.
한국과 호주의 퍼포머 각 세 명과 음악가 각 두 명까지 총 10명이 무대에 오른 가운데 1시간가량 공연한 ‘사물 이야기’에는 전통 연희의 줄타기·버나돌리기·열두발 상모 등과 서양의 텀블링·공중곡예 등이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했고, 때때로 한 호흡 안에 각각의 요소를 주고받기도 했다. 여기에 라이브로 연주한 음악은 극의 처음이자 마지막 같은 존재였다. 어쿠스틱 기타·재즈 트럼펫은 북·장구·꽹과리·징과 만나 각자의 다름을 채워주는 동시에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퍼포머들을 이끌기도 하고, 극적인 순간마다 색채를 더하며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중에서도 소리꾼 배일동의 구음은 이 작품을 차별화하는 제3의 악기로 기능했다.
더불어 기자의 눈에 들어온 이는 음악감독을 맡은 타악 주자 김동원이었다. 첼리스트 요요마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의 멤버로 2000년부터 합류한 그는 현재 원광디지털대학교 전통공연예술학과의 교수이자, 199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한국음악과 사물놀이를 비롯한 전통 타악에 관해 알리며 전방위적 융합 예술 작업을 해왔다. 또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김석출 선생의 연주에 감명받은 호주의 유명 재즈 드러머 사이먼 바커가 한국음악을 통해 자신의 음악 세계를 완성해가는 7년간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땡큐, 마스터 킴(Intangible Asset Number 82, 2008)’에 출연해 우리 음악의 정신과 여러 전통음악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캐나다 겔프 대학교 국제즉흥음악비평학연구소(IICSI)와 월프리드 로리에 대학교 방문교수 겸 레지던시 즉흥음악가를 역임했다. 이번에 공연한 서커스 음악극 ‘사물 이야기’는 사물놀이에 담긴 뜻과 기원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김동원이 그림책으로 내놓은 ‘사물놀이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이번 공연을 지켜보는 내내 익숙한 악기가 들려주는 새로운 음색과 리듬의 결합이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는 것, 어설프거나 인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A+B=C’까지는 아니어도, 해체와 재구성이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일종의 가능성과 마주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반가웠고, 더욱 듣고 싶었다. 그들에게 도대체 어떤 고민과 노력이 있었는지 말이다.
서울에 이어 부산 공연이 끝난 지난 5월, 타악 주자 김동원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특정 개인이나 단체, 장르에 한정된 것이기보다는, 동시대 예술을 만들어가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내용이었다.
한국과 호주 예술가들의 협업을 통해 세계 초연한 ‘사물 이야기’의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김동원의 목소리로 정리해 지면에 옮겨본다.
원리를 발견·해체할 때 진정 내 것이 된다
우리의 사물놀이에 담긴 뜻과 기원을 풀어쓴 동화 ‘사물놀이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투르기에 서양의 곡예와 재즈, 한국의 연희와 국악 장단과 판소리 같은 요소를 융합하는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음악과 음악으로만 만나는 작업에 비하면, 참여하는 예술가 모두 공감하고 동의하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공연의 구심점으로 존재했기에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예술적 요소를 마음을 모아 헌신하고 봉사하는 과정이었다고 할까요.
이번 작업을 통해 느꼈지만, 퓨전이나 크로스오버를 통한 창작의 성패는 ‘얼마만큼 잘 해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음악적 블랜딩은 DNA 단위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나와 다른 상대와 더불어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무장해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해체해야 할 대상은 음악가로서 수십 년에 걸쳐 체득한 음악 어법과 형식일 겁니다. 지금까지 가져온 자신의 음악, 악기에 대한 익숙한 접근과 감상을 과감히 버리고 해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음악가에게 상당한 시간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음악가라면 누구나 좋은 소리를 내길 원합니다. 이 소리는 어떻게 힘을 쓰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남들에게 보여주는 제스처로서 기본적인 움직임과는 다릅니다. 어떤 소리든 그것과 수반한 움직임이 존재하죠. 내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모르는 상태로 연주하면 결국 스승의 것만 따라 하는 데 머무르고 맙니다.
감사하게도 그동안 제가 만난 선생님들은 본인이 지닌 예능 자체로 위대한 분들이고, 그것의 작동 원리를 발견하고 안목을 키울 수 있게 이끌어주셨습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김덕수 선생님과 15년 정도 함께하며 해외 음악가 혹은 다른 장르 음악가와의 퓨전 작업을 목격하며 배웠고,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선 좋은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걸 임동창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임동창 선생님은 “제일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기가 막힌 신념을 늘 의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술가·수행자·구도자는 머물면 안 된다는 의미지요. 성취와 학습의 과정은 발견의 연속에서 이뤄지는데, 어느 한 지점에 만족하고 머무는 순간 그걸로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전통음악이 작동하는 원리를 발견했고, 그 이후엔 연주가 한결 편해졌습니다. 여기에서 얻은 자신감과 인연을 바탕으로 퓨전 작업을 시작했고, 이제는 새로운 해체 방식을 찾는 데 고민이나 두려움 없이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협업에서 천편일률적인 굿거리장단을 치지 않고서도 굿거리의 아름다움과 정수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됐어요. 이것은 장구를 가지고 서양의 리듬이나 음악적 어프로치를 적용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또 악기가 무엇이든, 어떤 장단을 즉흥적으로 치든 그 리듬과 어법은 틀림없이 한국적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해체된 파편에도 한국적 DNA는 있다
음악적인 면에서 ‘사물 이야기’를 보면, 즉흥연주처럼 완벽한 해체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어요. 전통 이야기 기반에 사물놀이가 필수로 들어가고, 연희자들도 등장하기에 특정한 리듬을 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연출 방향이 계속 바뀌는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음악감독으로서 호주의 재즈 음악가들이 버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해체를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특정한 리듬과 전통 장단을 쓰는 대신, 악기에 접근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바꾸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휘모리장단 하나를 쳐도 그것을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연주법이나 채를 바꾸려는 시도들을 가져갔어요. 제겐 한국적 음악 요소를 아무리 해체해도, 파편화된 낱낱의 것들에 여전히 한국적 DNA가 담겨 있고 그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특수한 스탠드를 고안해 발로 징과 북을 치고, 손으로 꽹과리와 장구를 쳤어요. 동시다발로 여러 악기를 연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여기에도 원칙은 있었습니다. 서양의 드럼은 두들기는 면이 수평인 반면, 꽹과리·장구·북·징의 두들기는 면은 수직이라는 아주 중요한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죠. 전통적 장단을 칠지언정, 징을 엎어놓거나 북을 뉘여 치는 건 본질에서 멀어지는 겁니다. 악기 고유의 특성을 지키고, 타법도 유지하되 스토리텔링에 맞게 음악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실험하면서, 호주의 재즈 음악가들과 드라마투르기, 아크로바틱이 영향을 주고받고 서로 융합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이런 융합과 융통성의 과정이 잠깐의 만남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친 워크숍을 통해 한국의 연희자들은 서커스의 몇몇 요소를 배우고, 호주의 퍼포머들도 한국의 버나돌리기 등을 배우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음악을 장난감 레고 블록에 비유해볼까요. 각자 갖고 있는 블록을 모두 해체해 서로 하나씩 바둑돌을 놓듯 만들어가는 것이 퓨전 작업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전통적 환경에서 태어나고 윗사람의 좋은 습관을 따라 하고, 체화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해왔습니다. 여기에는 굳이 말없이 공유되는 무언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언젠가 기막힌 창작에 시나위를 거듭하며 모양을 갖춰나가던 예술이 세대와 세대를 넘어 전달되면서 점점 고형화, 고착화됐습니다. 또 그다음 세대는 그것을 애지중지하며 가져오고 있어요.
스승이 레고 블록으로 만든 용을 그대로 건네받는 것이죠.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 스승의 스승은 자신만의 모듈을 갖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그 용을 만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결국 국악이라는 큰 레고 블록 덩어리를 두고 자신 스스로 모듈레이션을 해보고 여기에 대한 안목을 길러야 그것을 해체할 수도, 새롭게 조립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국악 공연 때 두루마기를 입지만, 수영장에선 수영복을 입잖아요? 상황에 따라 입는 옷은 달라지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동일하죠. 진정한 ‘전통’은 그 단어대로 본질을 전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술적 영감, 창작의 새로운 원천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영감, 창작의 아이디어나 재료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도 같아서, 입에 달아도 그걸 소화할 능력이나 과정이 없다면 뱃속에서 독이 됩니다. 소화의 첫 시작은 이로 으깨고 분해하고 삼키는 것이죠. 이후 위에 다다르면 강한 위산이 음식물을 가장 작은 단위로 해체해 내 몸이 흡수하게 만듭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든 결국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연습 끝에 완전히 소화된 그 무엇인가가 나와야 진정 자신만의 창작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김동원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사물 이야기’는 그야말로 현재진행형의 실험실이었다. 각자의 세계에서 오랜 시간 독자적으로 구축해온 음악과 퍼포먼스를 단순한 결합 그 이상의 것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익숙하고 편한 땅을 떠난 이들은 이제 더 먼 곳으로 시선을 맞추고 있다. 이들의 실험은 6월 3~7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계속된다.
사진 아시아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