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관현악단

새로운 음악의 개척자인가, 문제의 주범인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8월 1일 12:00 오전

걸어온 길&나아갈 길을 위한 제언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창단으로 인해 이 땅의 국악관현악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KBS국악관현악단의 창단으로 국악관현악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면서 국악관현악 르네상스는 절정에 달했다. 이 세 단체는 올해 각각 창단 50주년, 30주년, 20주년을 맞았다.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국악관현악단’이란, 한마디로 국악기를 서구식 오케스트라처럼 배치하여 관현악곡 연주를 목적에 둔 단체를 뜻한다. 국악관현악단의 역사는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창단을 준비하고 기념하는 공연이 많지만, 몇 단체를 제외하고는 국악관현악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많이 식었다. 왜 그러할까. 국악관현악의 역사와 문제점,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창단

1959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가 개설되었다. 국악이 국립대학에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자, 언론에선 서울대학교 내의 국악 관련 교과에 대해 매우 관심을 보였고 교내 정기연주회도 심도 있게 다루었다. 1960년대에는 국악기와 음악적 소재를 활용하여 새롭게 작곡한 ‘신(新)국악’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하에 1964년 7월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서 만든 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었고 9월 15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다. 국악관현악단의 창단 공연이었지만 12개의 레퍼토리 중 지영희와 이병우가 만든 2곡만이 관현악곡이었다. 나머지는 무용과 민속악 계통의 음악이었다. ‘프로그램이 잡다하고 혼잡한 속에서 관현악단 창립의 초점이 흐려졌다’ ‘예술적인 의식 추구보다는 대중음악으로서의 개척에 더 주안점을 둔 것 같다’는 이상만의 혹평은 당시의 분위기를 대변해준다(동아일보 1964년 9월 19일자). 여기에는 서구 오케스트라를 흉내 내고 싶은 욕망과 양악에 대한 동경도 뿌리에 자리했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성공이었을까

만약 당시의 국악예술학교 부설 국악관현악단이 성공의 가도를 달렸다면 그 뒤로 20여 년 동안 적당 수의 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악기로 구성된 우리만의 오케스트라란 시기상조였다. 국악예술학교 부설 국악관현악단은 여러 문제로 인해 운영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시는 그동안 유지 난에 빠졌던 국악예술학교 부설 국악관현악단을 인수했고, 1964년 12월에 서울특별시 산하단체로 편입되면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현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라는 존재는 어떤 가치를 지녔을까? 이러한 배경에 대해 평론가 전지영은 ‘조국근대화를 모토로 내걸었던 정권의 입장에선 전통음악이 다소 과거지향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창작국악 혹은 신국악이 ‘근대화’된 국악의 이미지와 함께 정권의 요구에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근대성의 침략과 20세기 한국의 음악’).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1980년대부터 여러 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기 전까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독주였던 것은 맞다. 그사이 민족문화 창달, 대외 전시용 등 여러 이유로 국악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관심이 증가했다.

1980년대 국악계는 붐이 일어났다. 1981년에 경북대·영남대·부산대·전남대에, 1982년에 우석대·단국대에 국악과가 신설되었다. 국악관현악단 창단은 국악과 개설에 이은 수순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국악제가 대한민국음악제와 별도로 개최되던 1985년에는 KBS국악관현악단과 전남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었다. 그해에는 동아콩쿠르에 국악 부문이 개설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국악은 전통문화육성정책에 의해 지원을 받아왔다. 이제는 지원 단계에서 벗어나 그 결실을 맺는 내실화의 시점이다. 이제 방송을 통해 국악을 자주 접함으로써 국악에 대한 일반인들의 귀를 틔워야 한다”라고 말한 이는 KBS국악관현악단 초대 상임지휘자 이상규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SNS가 없던 시절, KBS국악관현악단이 KBS 소속이라는 점은 막강한 권력이었다. KBS국악관현악단은 자체의 정기연주회는 물론이고, 1986 아시안게임과 국악제 등에 참가했다.

1980년대 국악관현악단의 르네상스

1980년대 국악관현악단의 전국적인 창단은 국악관현악의 르네상스와 실험기로 이어졌다. 국악·양악기가 혼합된 곡을 작곡하던 박범훈은 “서양의 악기를 빌어 우리의 음악을 표현한다면 창작국악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며, “그 결과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앞으로도 계속되어야”(경향신문 1986년 11월 13일자)한다며 권장했다. 또한 클래식으로 대변되는 양악도 수용한 지 1세기에 이르렀으므로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의 음악’을 정립해야 한다는 자의식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에 작곡가 백병동·김정길·이건용·박준상·나인용·강준일 등이 활발히 활동했다.

KBS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된 1985년. 당시에 ‘86’과 ‘88’은 문화를 부흥시키는 코드와도 같았다. 바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다. 이 시기는 민간 자본으로 오케스트라를 세울 정도로 문화적 붐이 일어났고, 1985년에 코리안심포니가 창단기되기도 했다. 지방에서도 춘천시립교향악단과 강릉시립교향악단, 울산시립교향악단이 발족되어 ‘오키스트러의 지방화 시대를 열었으’며 ‘3개 직할시와 각도에 하나씩 교향악단이 생겨 외형적으로 전국적인 균점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경향신문 1985년 12월 16일자). 서울 올림픽이 있던 1988년에는 청주시립국악단·전북도립국악단·한국청소년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1990년 천안충남시립국악관현악단, 1991년 영동난계국악단, 1992년 경상북도립국악단, 1994년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1995년에는 1985년 비상임체제로 창단한 청주시립국악단이 상임체제로 재창단됐다.

그리고 1995년 1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당시 외부로 부각된 창단 목적은 ‘국립극장 산하단체의 반주를 중점적으로 맡는다’는 것이었다(조선일보 1994년 11월 14일자). 하지만 초대 단장 겸 상임지휘자인 ‘박범훈’이라는 코드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단순히 반주의 역할로만 국한되지 않고 새로운 스타일을 지향하는 국악관현악단으로 창단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당시 박범훈의 계획과 전망에는 1987년에 최초의 민간 국악관현악단으로 창단된 중앙국악관현악단과 그 활동을 통해 차별화된 국악관현악의 새 흐름을 만든 것, 1993년 한국·중국·일본의 전통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아시아(Orchestra ASIA)를 결성하여 통(通)아시아적 교류를 시작했던 것이 녹아들어 있었다.

또 다른 배경은 1994년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국악의 해’의 지렛대 역할이다. 여느 해보다 국악 공연이 다양해지고 양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를 통해 사회에 국악이 지닌 문화적 가치와 전망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즉, 창단의 표면적 이유는 국립극장 산하 단체의 공연을 위한 ‘반주단’이었지만, 이면의 동력은 ‘국악의 해’를 통해 확산된 국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및 전환, 그리고 ‘박범훈’이 수년 간 이끌어낸 차별화된 음악성과 등의 이유로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국악관현악단 창단은 이어졌다. 1996년 경기도립국악단, 1997년 공주시충남연정국악단, 1999년 강원도립국악관현악단, 2001년 김천시립국악단, 2004년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2005년 서울시청소년국악관현악단과 성남시립국악단이 창단됐다.

문제작은 없고 문제만 많은

국악관현악단마다 창단의 원인과 배경은 각기 달랐다. 오늘날의 문제는 관객의 수요보다는 관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 단체들은 지금의 문화적 감각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악관현악단의 시스템을 통해 그 필요성을 인식하며 1980년대를 달구었던 국악기개량사업도 이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음악적 문제는 운영에서 생기는 문제와 관련된다. 단원들의 안정성이 보장된 국악관현악단은 점점 폐쇄화하고 단원들의 나이 또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관객들이 선호하지 않기에 어떠한 시·도도 예산을 늘리려 하지 않는다. 매해마다 주어지는 예산은 같지만 공무원급 대우를 받는 단원들의 호봉은 높아지고, 작품 제작·개발비로 들어갈 자본은 그들을 대우하는 데로만 빠져든다. 더구나 고정된 수입이 보장된 연주자며 정규직 노동자인 단원들은 자신의 직장이 주는 브랜드 가치를 바탕으로 공연과 레슨에 있어 독식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악단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취업 희망 1순위였던 국악관현악단이 이렇게 폐쇄화되어가자 대학 졸업생 대부분은 시·도의 지원기금을 활용하여 중·소 규모의 앙상블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연주력이 모자라도 고용 안정성을 빌미로 버틸 수 있는 국악관현악단의 단원과 자생력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앙상블의 대결. 후자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보폭이나 속도에서 더욱 적극성을 띄게 된 지금이다. 반면 국악관현악단은 관제의 예산으로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헐떡거리고 있는 셈이다.

국악관현악단이 서구의 관현악단을 ‘복사’하여 만든 거대한 모방체라는 점에서 우리는 지금 서구 오케스트라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읽어야 한다. 국악관현악단이 원본체로 삼은 국내외 오케스트라의 문화와 지형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관객에게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국악관현악단이 ‘침체기’가 아니라 긍정의 ‘과도기’로 인식하게 할 방향 전환과 실험과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작곡가를 ‘발명’해야 한다

새로운 작곡가와 새로운 곡이 국악관현악단을 살린다. 국악/양악이라는 이분법이 작곡기법이 미흡하고 시대착오적인 몇몇의 국악작곡가들을 보호해왔다면, 지금은 이러한 국악작곡가의 시대가 저물고 국경과 반경이 없는 작곡가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이러한 이분법을 넘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여기에 좋은 예는 작곡가 정일련이다. 그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11년에 선보인 ‘파트 오브 네이처’를 통해 국내 악단에 이름을 알렸다.

또 다른 예로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13년에 선보인 ‘리컴포즈’를 꼽을 수 있다. 국적이 각기 다른 4명의 해외 작곡가는 그들이 바라본 한국 음악의 특징을 바탕으로 새로운 곡을 내놓았다. 마이클 팀슨(미국)은 시나위를, 보두앵 드 제르(벨기에)는 북청사자놀음을, 타카다 미도리(일본)는 산조를, 치천 리(대만)는 대풍류에서 영감을 받았다. 문제와 골칫거리인 국악관현악단이라는 매체는 이들에게 새로운 음색과 음향을 빚어내는 새로운 도구로 활용되었다.

작곡가를 ‘발견’해야 한다

지금 ‘국악작곡’이라는 장 너머를 보면 수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는 작곡가들이 있다. 다만 그들이 ‘국악 작곡’이 아니라 ‘양악작곡’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발굴과 위촉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악작곡가 중 많은 이가 단순히 멜로디 메이커로서 국악관현악곡을 작곡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국악관현악단은 다양한 국악기가 총체화된 음향적 기계라기보다는 그들의 선율을 연주하여 표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련된 작곡기법에 대한 연구와 구현보다는 하나의 멜로디만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국악기의 집합체가 동원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악관현악단의 발전은 새로운 작곡가에 대한 발굴, 그에 대한 도박과 관련된다. 새로운 얼굴의 발굴, 위촉 후에 악단의 특성을 체득할 수 있는 상주 기간과 워크숍이 있어야 한다. 명성만 남고 이제는 퇴물이 된 지방대학교 교수에게 작품 위촉하는 문화도 뿌리 뽑혀야 한다.

거대한 음향 실험 도구로서의 국악관현악단

동시대 서구 음악계에선 오케스트라를 거대한 음향 실험 도구로 사용·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음악’과 ‘음향’ 사이에서 동시대 음악이란 어떠해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실험하며 묻는다. 국내에선 서울시교향악단의 아르스노바 시리즈가 좋은 예다.

과거 국악관현악단은 국악의 대중화를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새로운 음악을 탐색하는 작곡가들의 실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즉, 국악관현악단만을 위한 실험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창안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작곡가의 발명·발견과 연관된다. “저래도 되나?”라는 ‘물음표’와 “저래도 되는구나!”라는 ‘느낌표’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지휘자와 예술감독. 무엇이 대안일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지휘자 부족 현상이다. 예전에는 관현악곡을 작곡한 작곡가가 초연 시 지휘자로 서기도 했다. 박범훈·이상규·김용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은 몇몇 대학교에 국악지휘 전공이 있다. 하지만 젊은 지휘자들의 발굴도, 포디엄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드는 실정이다. 작년 6월 국립국악관현악단 ‘리컴포즈’에서 서울시향 부지휘자 최수열이, 올해 4월 ‘임헌정과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임헌정이 바통을 잡고 성공적인 연주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먼저 ①제대로 훈련받고 현장에서 활용하는 명성 있는 지휘자를 국악관현악단이 초빙하여 첨예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구사하겠다는 의욕을 읽을 수 있고, ②서구식 지휘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해석·지휘할 수 있을 정도로 국악관현악곡도 이제는 서양음악의 문법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③한편으로는 국악계에 제대로 된 ‘국악지휘자’가 없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는 그동안 국악관현악의 현장이 지휘자 육성을 게을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휘자에 대한 유무도 잘 따져보아야 한다. 평론가 윤중강은 ‘(국악관현악단은) 우리 음악의 특성 중 하나인 연주자 중심의 자율성이나 즉흥성에 비중을 뒀다’며, ‘그저 앞에 지휘자가 있고, 자신의 앞에는 보면대가 놓여 있을지라도 그것과 자신의 조화를’ 찾는 것을 이점으로 꼽았다. 지휘자로부터 음악적 명령을 받는 단원이라고 해도 그 이면에 있는 연주자 중심의 연주 형태를 높이 산 윤중강의 의견과 달리 평론가 이소영은 ‘연주자들이 곡 진행의 안내를 서구처럼 지휘자 1인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와 지휘로 이분화하기 때문에 지휘자의 인도에 크게 의존하지 않게’ 되는 것을 문제 삼기도 했다.

앞서 말한 지휘자 문제와 관련하여 ‘지휘자+국악관현악단’ 체제로 가야 할지, 아니면 다양한 연주 형태를 구사할 수 있는 ‘예술감독+국악단’ 체제로 가야 할지도 고민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즉, 관현악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단체들은 ‘단(團)’ 체제를 고수할지, 아니면 여러 국악기를 재배치하여 다양한 앙상블을 가동시킬 수 있는 연주 집합체로서 기능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시나위 프로젝트’와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나무 곁에 눕다’ 시리즈는 지휘자 없이 단원들의 연주·구성력을 통해 소·중 규모 앙상블로 꾸린 기획 공연이었다. 따라서 예술감독의 기획 아래 국악관현악 형식 외에도 더욱 다양한 형식을 선보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국악(관현악)단이 되어야 한다.

이제 하반기가 되면 서울시국악관현악단·KBS국악관현악단·국립국악관현악단은 각각의 창단을 기념하는 성대한 잔치를 벌일 예정이다. 무엇보다도 국악관현악단의 ‘큰 형님’ 격인 세 개의 관현악단이 앞장서서 고질화되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과 행동의 미덕을 보일지,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져야할 것이다.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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