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박정원의 20년

내 인생의 아리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8월 1일 12:00 오전

한국 데뷔 20주년. 무대와 교단에서 열정을 펼쳐온 그녀의 시간들

1995년 9월, 국립극장은 저녁 시간이 되기 전부터 발 디딜 틈 없이 청중으로 가득 찼다. 당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의 대표적인 클래식 음악 매니저먼트 회사인 카미(CAMI)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소프라노 박정원이 한국 무대에 선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박정원은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 중 ‘그대의 부드러운 음성이 나를 부르고’를 노래하며 디바의 아름다운 위엄을 청중의 마음에 각인시켰다. 연주회가 끝난 후 청중은 일제히 기립해 브라보를 외쳤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한국 음악계는 눈부신 성장을 거뒀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번 한국 데뷔 20주년 음악회는 그녀의 인생 아리아들로 구성됐다. 한국 데뷔 무대와 다른 건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이 함께하는 무대라는 점이다. 제자인 소프라노 권은주, 테너 백윤기, 메조소프라노 김현영, 소프라노 노정애, 베이스 김철준이 그녀와 무대를 함께 한다.

한국 데뷔 20주년 음악회가 얼마 남지 않아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은데요.

요즘은 학기 중에 썼던 에너지를 연주를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하는 데 쓰고 있어요. 의미 있는 무대이니 몸 관리를 더 잘해야겠죠. 이번 음악회는 제가 한국에서 데뷔한 지 20주년이 되는 자리이고, 10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시간이어서 의미가 더 깊습니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세계 주요 오페라 무대에서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했는데, 당시 한국 데뷔 무대에 섰을 때 인기가 대단했지요?

귀국 후 주요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무대에 섰죠. 소프라노가 박정원밖에 없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웃음) 귀국 당시 저는 미국 매니지먼트사 카미에 소속된 한국 최초의 성악가였습니다. 지금은 훌륭한 후배들이 꽤 속해 있지만 그때는 음악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죠. 그만큼 우리나라 음악인이 외국에서 인정받기가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지요. 문화적으로 우리나라가 많이 낙후된 때라 동양인이 그것도 한국인 소프라노가 카미에 소속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단지 동양인 여성 소프라노가 할 수 있었던 역할은 많이 한정적이었어요. 공부하고 무대에 오르면서 행복했던 순간도 많았지만 그런 한계로 인해 겪은 절망의 시간도 무수히 많았지요.

한국 첫 데뷔 무대를 회상해본다면요.

1995년 9월 국립국장에서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를 노래했어요. 고국 무대라서 무척 떨렸던 생각이 납니다. 제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많은 분이 그날 극장을 찾아오셨죠. 특히 당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많이 왔어요. 나중에 제자들에게 들어보니 그때의 제 무대가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하더군요. 큰 영감을 받았다고요. 당시 공연장을 나서며 ‘이것이 진짜 오페라구나! 앞으로 성악을 더욱 열심히 공부하자’고 서로 마짐을 했다 하니, 꽤 성공적인 연주회였던 거죠?(웃음)

그동안의 노래인생을 추억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부를 작품들을 선정하면서 가슴 한구석이 찡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예고 정기연주회 때 뽑혀서 불렀던 곡, 대학 들어갈 때 불렀던 곡,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처음 불렀던 곡, 그리고 한국 데뷔 무대에서 불렀던 곡까지 모두 제 삶을 함께 했던 노래들이죠.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부터 베르디의 오페라 ‘청교도’ 중 ‘그대의 부드러운 음성이 나를 부르고’ 까지 모두 제 인생의 아리아들입니다.


▲ 대학 시절의 모습

줄리아드 음악원에서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 시절, 외국 유학이라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 자체로 감사한 시간이었죠. 어린 시절부터 유학 가기 전까지 저는 그저 노래만 불렀어요. 모두가 잘한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더 열심히 신나게 불렀죠. 그런데 줄리아드 음악원에 가보니 배워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딕션·음악코치·연기·음악분석·화성·연기까지 모두 새로운 세계였어요. 그리고 그 공부들이 너무나 재미있있어요. 몸의 율동과 음악, 연기까지 제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세상이었죠. 음악에서 오는 풍요로움, 지식과 감성이 쌓여가는 기쁨,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세계적인 공연무대들, 생각해보면 예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시절 같아요.

그렇게 좋은 기회들을 떨치고 한국에 와서 연주 활동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10년 넘게 세계 각지의 연주를 다니면서 시차와 언어, 문화, 음식 등에서의 차이가 힘들기도 했고, 피로가 많이 쌓이면서 몸과 마음에 많은 무리도 왔어요. 당시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쉬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연주 무대에서 좋은 평을 받았지만 당시는 아무리 잘해도 동양인 여성 소프라노가 할 수 있는 배역이 늘 정해져 있었죠. 여러면에서 서서히 한계가 느껴졌고, 새롭게 다시 출발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동안 한양대 교단에 섰는데요.

사실 한국에 들어와 한양대 교수로 처음 교단에 섰을 때는 2년 정도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내 안에 연주자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에서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음악을 더 넓게 바라보게 되었고요. 학생들이 음악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볼 때, 안 되던 테크닉이 완성되고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더구나 모교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더 깊은 애정이 느껴졌고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저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아요. 우선 화를 내면 제 목소리가 상하고 그 소리를 듣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상하거든요. 긴장하면 목이 많이 다치죠. 그러면 생각이 막히고 상상력과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연습을 안 한 학생들에게는 시간을 주고, 노력이 필요한 학생들에게는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해주려고 했지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는 어떤 점을 가장 강조하나요?

우선 교육자로서 가장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에요. 저는 학생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절대 편애는 하지 않고요. 다만 자신이 원하는 걸 제게서 가져가는 건 스스로의 몫이라고 늘 얘기해왔습니다. 그다음 강조하는 것은 착한 마음이에요. 노래와 음악은 영혼에서 나오는 거라서 영혼이 맑아야 음악도 감동이 있지요. 재능은 신이 주는 것이지만 노력은 스스로 하는 것, 자부심을 갖되 겸손함을 잃지 않는 자세, 그것이 음악인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도 그런 마음을 갖고 진심을 다해 노력한다면 모두가 영혼을 울리는 노래를 들려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영혼을 울리는 음악이란 어떤 음악인가요?

온 마음의 정성을 다하는 음악이지요. 머리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영혼으로 옮겨지는 것, 그것이 예술이니까요.

음악을 아주 늦게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기계체조 선수로도 활약했다고요?

어머니가 저에게 피아노 전공을 시키려고 어릴 때부터 음악을 시켜주시긴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전 피아노가 별로 좋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죠. 중학교 때는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할 만큼 활동적이었고요. 그런데 중학교 때 합창반 선생님이셨던 김정자 선생님이 제게 성악을 해보라고 권유하시더군요. 그리고 서울예고 이단열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래서 예고 시험을 보게 되었고요. 결국 합격해서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게 되었죠. 그 뒤 한양대 음대에 입학해서 훌륭한 스승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당시 전기 대학에 서울대를 지망했는데 낙방했었거든요. 악성 빈혈로 고생하던 때라 다시 대학입시를 공부할 상황이 아니었죠. 그래서 한양대에 2차로 들어가 입학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제게는 오히려 더 큰 ‘행운’이었어요. 당시 한양대에는 오현명·홍연택·장일남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 세 분이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아낌없는 음악적 지원을 해주셨죠. 그때 예술적으로 정말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분명 어려운 시절이 있었을 텐데요.

크게 두 번 정도 슬럼프가 있었어요. 저는 선생님이 하라는 건 그대로 하는 모범적인 스타일의 학생이었는데, 줄리아드 음악원 시절, 선생님이 바뀌면서 그분이 알려준 연습 방법이 저와 잘 맞지 않아서 한동안 고음을 못 내고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어요. 그 뒤 다시 이탈리아 선생님을 만나면서 다행히 소리를 찾을 수 있었지만요. 그만큼 선생님의 가르침은 학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죠.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얼마나 각 개인의 스타일과 음악성을 고려해서 가르쳐야 하는지는 제 학창 시절의 경험으로도 잘 알 수가 있어요. 그 경험은 제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또한번의 슬럼프는 한국에 들어오면서 겪었어요. 아마 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낯선 분위기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다 쌓여서 내 노래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노래 속에 담아야 할 수많은 감정은 우리의 삶 속에서 쌓이는 거니까, 결국 음악이 삶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삶이 또 다른 음악 학교인 셈인 거죠.

이번 공연을 앞두고 제자들과 의미 있는 연주 후원 단체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제게 주신 달란트는 노래하는 거였어요. 많은 분들이 제 노래를 사랑해 주셨죠. 이제는 기회를 얻지 못한 실력 있는 음악인들에게 제가 받은 사랑과 함께 무대에 데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어요. 더불어 뛰어난 연주자를 발굴하는 등용문도 세우고 싶고요. 이건 단순히 저와 제자들과의 연대가 아니라 음악 안에 있는, 성악을 사랑하고 연주자로 준비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연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또 봉사하는 단체로서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그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메신저가 되고 싶어요. 단체 이름은 ‘소누스’라고 지었는데, ‘소누스’는 라틴어로 ‘목소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우리들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세상에 퍼져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새로운 20년, 어떤 꿈을 갖고 있나요.

사명감이라는 말에 대해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노래는 나의 모든 것이고 노래만큼 행복을 주는 건 없지만, 이제 그 노래를 누군가와 더 깊고 넓게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악을 해 보니 성공은 순간이지만 노래는 영원히 남더군요. 삶은 행운과 불운이 함께 공존하지만 결국 누구에게도 공짜는 없는 것 같아요. 기초가 튼튼해야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죠. 실패가 아름다운 과정이 되어 음악으로 표현된다면 그 노래는 훨씬 더 감동적일 거예요. 이 세상에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저는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삶이 음악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제 인생의 아리아를 노래할 이번 무대가 그래서 더 기다려지네요.

자신의 생을 이끌어온 음악에 바치는 소박하고 따뜻한 사랑의 고백. 어느덧 은은하게 더 깊어진 그녀의 음악이 진정한 예술이란 실은 겸손한 것이라는 비밀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하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

소프라노 박정원 ‘한국 데뷔 20주년 음악회’

8월 11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벨리니 오페라 ‘청교도’ 중 ‘그대의 부드러운 음성이 나를 부르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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