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금요공감 ‘보두엥 드 제와 산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9월 1일 12:00 오전

8월 7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멍하게 듣되, 사유하게 한 자연-음악

벨기에 작곡가 보두엥 드 제(1962~)의 음악을 듣고, 집에 와서 부지런히 찾은 글귀 한 구절. 그것은 황지우 시인의 것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푹 파묻힌 채 멍하게 실내를 응시하면서 시간이 지겹도록 느린 간격으로 내 곁을 경과하게 했다.”

보두엥의 음악은 시인이 흘려보낸 ‘시간’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멍하게’ 그의 음악들을 ‘응시’했고, 그 음악들이 ‘느린 간격으로 내 곁을 경과하게 했(었)다’. 그의 음악은 특별한 귀 기울임을 요청하지 않았다.

첫 곡은 ‘가야금 산조’(2008)였다. 이화영의 왼손은 농현보다는 오른손을 도와 자유롭게 움직였다. 무반주 12현 가야금이 내는 음은 귀를 낚아채는 선율도, 안정적인 조성도, 듣는 이를 자극하는 대목도 없었다.

두 번째 순서로 이아람이 연주한 대금 독주곡 ‘마흔 두 가지 풍경’(2009)도 그랬다. 정악대금을 사용한 이 곡은 중저음으로 읊조리는 정악곡 같았지만 앞서 들은 ‘가야금 산조’처럼 국악 창작에 작용하는 모든 중력과 법칙을 내려놓고 들어야 하는 곡이었다. 보두엥은 이 곡에 대해 “마흔 두 가지 작은 조각으로 엮인 기하학적인 한 개체가 그것을 관찰하는 이의 주변을 돌며 (···) 선율을 전달”하는 느낌을 담았다고 했다. 나는 편안하게 두 곡을 흘려보냈다.

세 번째로는 국악관현악곡 ‘사자춤(The Lion Dance)’을 거문고 독주곡으로 편곡한 버전을 선보였다. 이 곡은 작년 6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공연 ‘리컴포즈’에서 초연한 곡으로 북청사자놀음 중 사자춤의 반주 음악을 모티브로 한 15분 분량의 관현악곡이다. 거침없이 치고 세차게 빠지며, 고음의 선율이 갖는 긴장과 타악의 힘이 역학을 이룬다. 이정아는 거문고의 대모나 좌단을 술대로 ‘탁탁’ 두드려 타악기의 효과를 재연하여 원곡의 묘미를 살렸다.

보두엥의 부인인 류경아(무용)의 춤과 시나위 음악이 함께한 ‘시나위, 음과 형상’을 지나고 마지막으로 선보인 ‘잠시 눈을 감으면’(2012)도 원래는 관현악곡이었으나 5중주(거문고·가야금·정가·대금·타악)로 편곡하여 선보였다. 이 곡에 대해 보두엥은 “무한의 공간 속을 천천히 순회하며 소리를 듣는 이(聽者)로서 여행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가 상상으로 지은 무한 공간 속의 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창법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안정아(정가)는 ‘노래’와 ‘노래가 아닌 소리’의 연금술과 야금술로 묘한 소릿결을 연출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무조건 옳은가라는 의문을 가져보았다. 오리엔탈리즘··· 그것은 서양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일컫는 말이다. 황병기의 가야금과 김영재의 거문고 소리를 접하고 한국음악과 국악기의 매력에 눈떴다는 보두엥은, ‘동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자연주의와 그 미학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는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시선이다.

하지만 나는 보두엥의 음악을 들으면서 국내 창작 진영을 다시 되새겨볼 수 있었다. 요사이 우리는 너무 많은 조미료를 가미하면서 그것을 ‘창작’이라고, ‘컬래버레이션’이라고 명명한다. ‘멍’하게 듣거나, ‘내 곁을 경과’하는 음악을 최근에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보두엥의 오리엔탈리즘은 우리를 반성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었다.

사진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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