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백건우

우리는 수없이 그를 기억하고 기록해왔다. 9월 국내 순회 연주를 앞두고, 이토록 잘 알려진 그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찾아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장시간의 인터뷰, 그 가운데 피아니스트는 여전히 작곡가와 음악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내 그 이야기는 음악으로 변화된 구도자의 내면을 향해 달려갔다.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는 ‘백건우의 스크랴빈’ ‘백건우의 라흐마니노프’였다. 변화를 거듭하며 결국, 이 피아니스트는 우리 앞에 새롭게 설 준비를 마쳤다. 그러므로 이제 이어질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백건우’의 ‘새로운 이야기’이다

‘우주’와 ‘인간’을 담는 열 손가락

9월. 그의 건반에는 스크랴빈의 우주와 라흐마니노프의 온기가 내려앉는다

백건우가 선보일 스크랴빈 24개의 전주곡 Op.11을 들으면서 나는 이 글의 시작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시인 릴케의 ‘세잔에 대한 편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히스라는 꽃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다.

‘태어나 처음 듣는 소리처럼 달콤하기도 한 이 향기 말일세. 이 향기에는 깊이도 있고, 무덤 같은 어둠도 있다네. 그러면서도 바람처럼 부드럽지. 타르 같기도 하고, 송진 같기도 하고, 실론의 차 같기도 하다네. 탁발승처럼 엄숙하고 초라하기도 하면서, 귀한 향처럼 은근하고 그윽하다네.’

꽃의 향(香)이 방 안을 채우듯, 음악의 향(響) 또한 공간을 채우지 않던가. 내년에 칠순을 앞둔 그의 향은 난초의 향과 닮았다. 지난 6월, 잔덜링/드레스덴 필과 함께 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4번과 앙코르로 포레의 곡을 선사했을 때, 그 향은 은은하되 묵직하게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그때의 기억을 안고 백건우가 있는 파리로 전화를 걸었다. 백건우는 11일 아르헨티나 테아트로 콜론 오케스트라(지휘 엔리케 아르투로 디에메케)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앞두고 있었다. 비행기에 오를 저녁을 앞두고 나눈 전화 인터뷰. 한국은 밤에 젖어 들어가고, 파리는 낮의 활기찬 낭만에 젖어 있었다. 내 방을 채우는 스크랴빈의 음악 소리도 전화기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라벨에서 생긴 갈증. 러시아로 적시다

“알로.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느릿한 그의 말투가 들려온다. 전주곡 중 4번 ‘렌토(lento)’처럼 느리고 차분하다.

러시아 음악에 대한 사랑. 조금 놀랍게도 그 시작에는 라벨이 있었다. 젊은 날의 백건우는 ‘프랑스의 세련미와 세공미’를 지닌 라벨에 푹 빠졌다. 1972년 뉴욕에서 라벨 독주곡 전곡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고, 그 이후에는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했다(1985, Orfeo). 하지만 깊숙한 곳의 아늑함은 바깥세상의 빛을 그립게 하지 않던가.

“시계공이던 라벨 부친의 피와 성격은 라벨의 음악에 고스란히 흐르고 있었어요. 섬세하고 세련됐지만, 내게는 그와 반대되는, 뭔가 서툴고 우악스럽고 인간미가 흐르는 음악이 그리웠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러시아 음악을 만난 것 같습니다.”

이 한마디는 러시아 음악에 대해 내린 백건우만의 정의이자 결론 같다. 그 후 백건우는 러시아 음악에 흐르는 피에서 인간적인 온기를 느끼고, 러시아 영화와 미술 속 설광(雪光)에 빠져드는가 하면 언어를 통해 그들의 문화를 흡수해갔다.

9월 17일부터 23일까지, 천안·구리·군포·서울·인천에서 백건우는 스크랴빈(1872~1915) 24개의 전주곡 Op.11과 라흐마니노프(1873~1943) 소나타 1번 Op.28을 연주한다. 음악학자 그라우트는 모스크바 음악원 동문인 두 작곡가를 라벨(프랑스), 파야(스페인), 본 윌리엄스·홀스트(영국), 야나체크(체코), 시벨리우스(핀란드)와 함께 ‘1세대 모던 작곡가들’로 불렀다. 두 작곡가는 남다른 모더니스트였다. 민속음악이나 동향의 음악 선배들이 쌓은 민족주의에는 별 관심이 없으면서도, 러시아 전통에서 세련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고, 피아니스트-작곡가라는 위치에 기반을 두고 활동했다.

스크랴빈, ‘백건우의 우주’를 비추는 거울

그런 스크랴빈은 쇼팽풍의 야상곡·전주곡·연습곡·마주르카를 작곡했다. 이후 리스트와 바그너를 흡수하는가 하면, 드뷔시와 러시아적 감수성을 자신의 음악에 병치했다.

“피아니스트는 ‘한도가 없다는 것’을 정해놓고 새로운 세계·소리·메시지에 접근합니다. 음악 언어와 악기는 연주자에 따라 무한한 것을 표현할 수 있죠. 스크랴빈은 피아니스트로서 보면 굉장히 혁명적인 작곡가예요. 그의 음악에 대해 누군가는 죽음을, 또 누군가는 에로틱함을 떠올려요. 음악은 아름다움을 항상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스크랴빈의 음악에는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는 거예요. 이 점이 제일 끌렸어요. 피아노를 통해서 그 넓은 세계를 그릴 수 있는 가능성… 그 세계를 피아노로 체험해본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죠. 그는 피아노가 내지 않는 소리까지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앞서 혁명이라고 했죠? 덧붙이면, 그의 음악은 우주의 음악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25년 전 스크랴빈을 연주할 때 초기 작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만져보듯 연주하고 그의 세계에 푹 빠졌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니 더 이상은 못하겠더라고요. 음악이 너무 진했던 겁니다. 내가 미칠 것 같았고. 그래서 나 스스로 멈춰야겠다고 의식적으로 중단했던 작곡가는 스크랴빈뿐이에요.”

백건우는 24개의 전주곡을 비롯하여 스크랴빈의 피아노곡이 담긴 음반 2종을 발매(1993, Dante)했고, 프랑스 디아파종 상을 수상했다. 혁명과 우주를 담은 음악. 하지만 스크랴빈이 24곡 중 6곡을 스위스에서 작곡했기에 스크랴빈과 스위스를 백건우로 이어달라는 루체른 페스티벌의 초청 등을 제외하고는 음반에 쏟았던 열정만큼 무대에 쏟지는 않았다.

“스크랴빈을 처음 마주했던 25년 전이나 그 어려움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넘어야 할 산이죠.”

올해는 스크랴빈이 서거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가 들려줄 24개의 전주곡은 한 피아니스트가 사랑한 작곡가의 추억과 무덤에 바치는 24개의 꽃이 아닐까. 백건우는 24곡의 순서를 바꾸어 연주한다.

“곡은 그렇게 작곡되었지만, 그 곡을 연주하기 위해 무대에 섰을 때 시간·공간·청중의 관계는 또 다르잖아요. 그 상황과 사람에게 맞춰야 하죠. 음악은 휴먼 드라마잖아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예술이니까.”

그 말은 아다지오로 흘렀다. 하지만 시간은 프레스토로 흐르고 있었다. 내 곁에는 나지막이 깔아놓은 전주곡 중 16번 ‘미스테리오소(misterioso)’가, 쇼팽의 ‘장송 행진곡’과 닮은 그 곡이 시간을 경과하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인간 백건우’를 담은 유리창

스크랴빈의 곡이 끝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라흐마니노프로 넘어왔다.

“교향곡처럼 느껴지는 소나타 1번은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했다고는 하지만, 이 곡을 연주할 때면 러시아의 경치가 떠올라요. 할머니와 교회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정원에서 작곡을 하던 라흐마니노프의 향수와 그리움이 이 곡에 있어요. 고향을 사랑하는 그 감정들이.”

라흐마니노프가 러시아를 사랑한 감정은, 이 피아니스트가 라흐마니노프를 사랑하는 감정과 닮았다. 백건우는 피아노 전주곡과 첼로 소나타를, 합창곡 ‘저녁기도’와 ‘성 요한 코리소톰 전례’를, 늘 듣는 교향곡 2·3번을,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알레코’ ‘인색한 기사’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에 대해 줄줄 이야기한다. 느리게 노래하되, 음과 음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제 스스로 규칙에 따라 선을 잇고 있는 피아니스트처럼. 백건우가 페도셰예프/모스크바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음반(RCA)은 1998년에 세상에 나왔고, 나는 그 음반을 CD 플레이어에 처음 넣던 날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했다. 각 협주곡마다 2악장은, 백건우의 피아노가 느리게 노래를 부를 때 심장은 빨리 뛴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무렵 백건우는 고국은 물론 작곡가의 고향과 유럽을 러시아의 색채로 물들였다. ‘걸작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실수로 산산조각이 났다고 해도 남겨진 작은 파편을 신중하게 검토하면 그 위대함을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는 부소니의 말처럼, 다른 작곡가에 매달려 있을 적에도 라흐마니노프의 여러 ‘파편’과의 마주침 속에서 그를 이해해갔다. 그중 하나가 6년 전 코스타리카에서 가진 라흐마니노프 손녀와의 만남이다.

“초청받아 간 그 집에는 라흐마니노프가 묵었던 스위스 별장에서 손녀들과 함께 노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영상 필름이 있었어요. 라흐마니노프가 나온 독사진을 보면 차갑고 무표정이잖아요. 자신감을 갖고 작곡한 교향곡 1번의 실패와 피아노 협주곡 4번에 대한 냉정한 반응… 그런데 손녀들과 함께한 사진 속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인간미가 보였어요. 그를 아는 이들은 라흐마니노프가 그렇게 따뜻하고 유머가 있었다고들 해요. 그로 인해 사람들이 땅바닥에 구르면서 웃었다고.”

그런 라흐마니노프는 백건우에게 인간의 음악으로 다가왔다. 우주의 음악 같은 스크랴빈과는 좀 다르게.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백건우의 애정만큼 그의 연주 또한 정평이 나 있다. 게르기예프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모스크바 부활절 축제에서 소나타 1번을 선보였던 백건우는 “작품에 대한 철저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완벽하게 연주”(주간 ‘쿨트라’), “마치 작곡자들과 동일한 영혼인 듯 연주”(‘이즈베스티야’지), “다양하면서도 엷은 비극으로 그려졌다”(‘브레먀 노보스테이’지) 등의 평을 받았다.

여름의 서울 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스크랴빈이 멈추고, 내 방안의 스피커는 그제야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1번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밤 풍경을 담은 창문은 내 모습을 비추거나 아니면 밤 풍경을 드러내듯, 스크랴빈은 ‘백건우의 우주’를 비추는 거울이고, 라흐마니노프는 ‘인간 백건우’를 비추는 유리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남’의 기억을 들춘 다섯 손가락

“기억을 되새길 수 있도록 많은 시간을 달라”고 한 그는 며칠 뒤에 그 순간들을 천천히 끄집어냈다

전화는 아직 끊기지 않았다. 나는 ‘세상이 기록한 백건우’ 말고, ‘백건우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떠올려달라고 했다. 내년에 칠순을 맞이하는 노장 피아니스트의 기억에는 어떤 시간들이 흐르고 있을까.

“‘순간’을 꼽아달라고 했지만, 사람과 음악과의 ‘만남’을 떠올리고 싶어. 내게 가장 중요했던 ‘만남’들을.”

노장은 손을 펼쳐 다섯 손가락으로 그 만남을 세어봤다.

# “그를 잘 돌봐주시오”

▲ 1960년 서울, 기독교방송국

드미트리 미트로폴리스 콩쿠르 현장에서 연습 중인 15세의 백건우. 스치듯 그를 지켜본 한 남자가 콩쿠르 주최측에 부탁한다. “백건우를 돌봐주시오.” 그가 내비친 관심 덕분에 백건우의 운명은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장학금이 주어졌고 줄리아드 음악원 교수 로지나 레빈의 제자가 되었다.

“난 내성적이었어요. 그래서 자극을 줄 수 있는 강한 선생이 필요했지. 그래서 레빈보다는 영국에서 온 일로나 카보스가 내겐 적합한 스승이었어요.”

어린 백건우를 자식처럼 대했던 레빈은 실망했다. 하지만 백건우는 두 스승의 가르침과 사랑을 한꺼번에 받는 제자가 된다. “가르쳐줄 게 많이 남았다”는 레빈, 레빈에게 슬픔을 안겨 미안했던 카보스가 백건우를 동시에 가르친 것.

“레빈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면 ‘건우가 오늘 이렇게 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카보스 선생님께 늘 전화하셨어요. 제자에게 음악을 훌륭히 넘겨주는 것이 중요했지, 제자 욕심과 명예가 아니었어요.”

아무튼 그 남자의 ‘말 한마디’로 백건우는 뉴욕에서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 뒤로 25년이 흘렀다. 당시 콩쿠르 주최자였던 한나 색슨 여사와 플로리다에서 조우하여 식사를 함께 했다. 한나가 말했다.

“네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습할 때 그 옆을 지나간 남자가 누구였는지 알고 있니?”

“누구였죠?” “번스타인.”

“그때 색슨 여사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영영 모르지 않았을까?”

▲ 첫 번째 독주회를 마친 아홉 살의 백건우

# 파리의 연인

“꿈꾸는 줄 알았어.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줄은 몰랐지.”

“그때… 머릿속에 어떤 곡이 흘렀나요?”라는 질문에 노 피아니스트는 “정신이 없어서 아무 곡도 흐르지도 않았어”라고 웃으며 말한다.

1967년, 백건우는 나움버그 콩쿠르 우승을 거머쥐었고 주최측은 세계 각국의 무대와 그를 연결해주었다. 그렇게 떨어진 파리에서 그는 은막(銀幕) 속 여배우 윤정희와 조우한다.

“우리 둘이 만날 가능성은 없었어. 상상해봐요. 나는 뉴욕에, 진희 엄마는 서울에서 숨 쉴 틈 없이 영화 촬영하고 있을 때였는데…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잖아요.”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 초연된 1972년의 뮌헨. 영화 ‘효녀 심청’을 촬영한 신상옥 감독과 윤정희가 그곳에 들렀고, 공연 뒤 윤이상과 백건우까지 네 사람이 식사를 함께 했다. 그 자리가 파한 후, 유학생과 젊은이들만 따로 모인 자리에서 백건우 옆으로 꽃장수가 지나간다.

“난 사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인데… 그 꽃을 사서 사람들 앞에서 꽃을 주었어. 마음의 표현이 됐는지 몰라.”

그 뒤로 1974년 윤정희가 파리로 유학을 왔고, 두 사람은 ‘파리의 연인’이 된다.

“서로 바빠서 연락이 잘 안 되다가 파리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쳤죠. 그 넓은 도시의 그곳에 나는 식사를 하러 들어가고, 그녀는 다 끝나고 나가는 상황이었는데. 몇 초만 늦었다면….”

백건우는 윤정희와 결혼하던 1976년에 파리에 완전히 정착했다. 1977년에는 딸 진희를 낳았다.

# 파리와의 입맞춤

▲ 1977년 파리오페라극장에서(윤정희 촬영)

21세의 청년 백건우. 밤공기에 취해 살짝 빠져든 짧은 잠에서 깬 그곳은, 메시앙이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던 파리 트리니테 성당 앞이었다.

“이탈리아 스폴레토 페스티벌로 가던 길에 파리에 잠깐 들렀어. 밤에 도착했는데, 워낙 그리워하던 나라여서 이탈리아행 아침 기차를 타야 했지만 밤새도록 걸어 다녔지. 책과 영화에서 본 장소들이 환상처럼 차례대로 펼쳐지더라고.”

라벨 스페셜리스트이자 드뷔시·플랑·사티 등을 애호한 피아니스트에게 ‘불란서’는 그의 삶 속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예술가로서 성장에 필요한 시간과 나 스스로 내 자신을 흉내 내면 안 된다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미국에서 연주 횟수가 많아지면서 이 마음이 늘 간절했지. 새로운 세계와 느낌과 그리고 창조. 이탈리아를 처음 갔을 땐 너무 좋았어. 자연과 사람들이 인생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였고. 그런데 오히려 그곳에선 내 세계를 못 갖겠더라고.”

백건우는 천천히, 프랑스로 몸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역사를 연구하는 벗은 자기 집 한편을 내주었고, 백건우는 프랑스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과 악보를 눈에 익혔다.

“외국에 오래 살았다 해도 내게 외국은 외국이야.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은 외로워. 그래서 진심으로 내 음악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고맙고 귀한 일이지.”

“결혼과 함께 파리에 정착했다”는 백건우에게 결혼 40년은 즉 프랑스 파리 생활 40년이다. 1994년부터는 디나르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그런 그에게 파리는 아직도 낯설고 설렘을 주는 곳이다. 전화 인터뷰 전날의 산책 중 우연히 발견한 에라르 피아노 공장 터, 얼마 전까지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묵었던 집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 나온다. ‘건반 위의 구도자’는 파리에서 늘 이방인이다.

# 대하소설 집필 중. 제목은 ‘베토벤’

▲ 2000년대 초반, 모스크바 음악원 볼쇼이홀

베토벤과의 만남.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넘어야 할 산”이자 “최대의 경험”의 안겨준 존재다. 2005년 백건우는 베토벤 소나타 전곡(32곡)을 녹음하기 시작해 첫 번째 음반(소나타 16~26번)을 2005년에 8월에 출시했고, 2007년에 나머지를 완성했다.

“녹음을 하면서 여러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몇 년 동안 베토벤 속에서 살다 보니깐 그림이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아, 이것은 ‘장편소설’이구나. 베토벤의 일생을 그릴 수 있는 기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

2007년 12월의 서울. 7일 동안 8회의 무대에 올랐다. 서울에 오기 전, 중국 광저우에서 이 시리즈를 미리 선보였다. 영혼과 손끝은 베토벤으로 달궈져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에 빠져볼 수 있는 최대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7일 동안의 시간 속에서 그의 음악을 느껴보고 싶었어. 아니, 그 안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지. 음악을 그렇게 가까이 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이것이 바로 음악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의 음악은 너무나 위대하니깐.”

소나타가 ‘장편소설’이었다면 소나타를 비롯하여 협주곡 등이 포함된 베토벤의 피아노의 세계는 그보다 더 긴 ‘대하소설’일 것이다. 그 장구한 ‘베토벤’을, 백건우는 올해도 열 손가락으로 음을 찍어 건반 위에 쓰고 있다. 지난 6월 잔덜링/드레스덴 필과 피아노 협주곡 3·4번을 선보였고, 올가을 게르기예프/뮌헨 필과 협주곡 5번을 연주한다(11월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라흐마니노프의 빛줄기와 만난 환한 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홀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다시 초청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주최측에서 물었을 때 백건우는 이처럼 답했다. 하지만 몇 주 동안 연락이 없었다.

‘괜한 욕심을 냈나 보다…’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수화기가 울렸다. 이틀 동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4곡)을 모두 연주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2005년 6월. 다시 선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의 객석은 가득 찼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과 ‘파가니니 랩소디’까지 연주했다.

“작곡가의 영혼이 있는 러시아에서 그곳의 청중을 모아놓고 음악을 한 마음으로 연주하고 나눌 수 있었어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마법의 도시였죠. 시계는 저녁을 알리는데 연주홀의 유리창으로 백야(白夜)의 빛이 피아노까지 다가왔어요.”

“햇빛이 제 연주를 바라보는 듯한 한 순간”이었다고 회상하는 백건우. 그 빛은 라흐마니노프가 그에게 건넨 손길이 아니었을까. 공연이 끝난 뒤,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이틀 동안 라흐마니노프의 전곡을 노래한 적은, 이곳 러시아에서도 드문 일이라 난리였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백건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우(知友)들과 모여 처음으로 보드카를 마시고, 네바강에서 배를 탔다. 너울거리는 네바강의 물결과 건반에 요동치던 라흐마니노프의 물결.

그가 좋아하는 사진처럼 ‘만남’의 풍경은 잠시 멈췄다가, 또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처럼 차르르 흘러갔다. 나의 귓가에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의 마지막 순간이, 여덟 손가락이 빚는 화음이 마지막 음을 찍었다.

“선생님의 음악 인생, 몇 년이라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어요. 내가 원해서 시작했는지, 우연히 시작하게 되었는지. 사실 우리는 나이가 없지.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것이죠. 자기에게 맞는 것을… 영리하게 잘 해야 하고. 베이스 알렉산드르 키프니스(1891~1978)의 마스터클래스에서 반주를 한 적이 있어요. 한 번의 만남이었는데 콜로라도 행길에서 나와 마주치곤 이전의 일을 기억하더라고. 스스로 자신이 없고 힘들 때였는데, 그는 내게 여러 말 않고 ‘너의 재능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니 꼭 성공시켜라’고 했죠.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한스 베르너 헨체도 뉴욕에서 편지를 보냈어요. ‘건우, 피아노에서 새로운 소리를 끄집어내라’고. 그런 힘들이 음악을 계속하게 한 것 같아요. 50년 이상을… 음악과 연주자가 하나 되고 이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몇 십 년이 걸리더라고. 요즘 와서야 음악을 놓고 내 자신이 편안하게 대화하는 것 같아.”

사진 박진호(studio Bob)·백건우 제공

영혼을 어루만진 거장의 손가락

건반에 손이 닿을 때, 그들의 심장도 뛸 준비를 마쳤다. 백건우를 묵묵히 보아온 이들의 이야기

1975년, 백건우가 고국에서 첫 연주회를 가진 지 올해로 40년이 됐다. 그간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구도자의 연주를 만나온 사람들. 진심으로 그 음악의 가치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백건우에 대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달라 청했다. 한국과 프랑스에서 찰나의 순간을 펜으로 기록해온 이들, 무대에서 함께 영감을 주고받은 피아니스트들, 그리고 객석에 앉아 피아니스트의 겸손과 온기를 느낀 이들까지… 그들이 기억하는 백건우는 어떤 빛깔일까.

그때 대한민국은 어디 있었던가

1974년 내가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파리에 도착한 그해에 백건우 선생도 파리에 정주하기 시작해 그를 처음 만났다. 1982년, 8년 만에 귀국할 때, 마지막 저녁에 작별 식사를 같이 한 것은 백건우·윤정희 선생 내외였다. 귀국 직전 파리 특파원으로 쓴 마지막 기사도 백건우 선생의 리스트 음악회다.

1982년 4월 14일부터 6주간에 걸쳐 매주 수요일에 프랑스 국영 방송 주최로 백 선생이 리스트의 곡만으로 매번 곡목을 바꿔 연속 연주를 했다. 일찍이 어느 피아니스트도 시도하지 않은 이 대담한 도전에 ‘르몽드’지 등 신문들은 격찬의 박수를 보냈다.

매주 연주회가 끝나면 백 선생 내외와 참석한 지인들이 연주회장에서 가까운 우리 집에 모여 밤늦은 위로연을 열었다. 어느 주에는 김창열 화백 댁에서 이우환, 정상화 등 화가들이 함께 축하해주기도 했다.

나는 안다. 파리에서는 물론 귀국 후에도 백 선생의 연주회에 한 번도 결석한 일이 없는 나는 안다.

파리의 초기 시대가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이 세계로 웅비하기 시작한 시기였고, 리스트 작품 연속 연주회는 그 팡파르였다. 동시에 그로서는 국력의 지원이 가장 절실한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곁에 누가 있었던가. 부인 윤정희 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누가 마에스트로 백건우 선생을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 거장이라고 함부로 자랑하는가. 그때 그를 낳은 대한민국은 어디 있었던가. 그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데 나라가 무슨 힘을 보탰는가. 그의 음악은 황야에서 혼자 컸다. 참으로 어려운 고난의 대성이었다. 백건우 선생은 자기 음악 외에는 아무 욕심이 없는 천진한 사람이다. 그 치열한 욕심 하나의 힘으로 혼자 우리의 마에스트로가 되었다.

– 서울에서, 김성우(한국일보 고문)

고귀함과 위상, 명상과 열정의 조화

백건우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당시 내가 받은 인상은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위상과 고귀함이다. 오래전 처음 보는 젊은 피아니스트와 녹음을 진행한 라디오 프랑스 스튜디오에서 그의 훌륭한 연주에 감탄했지만, 나에게 더 큰 인상은 남긴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입이었다. 그가 어떤 작곡가를 연상케 하든, 나는 이 느낌이 어느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 전해지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궁금했다. 이것은 개인의 기대와 상상을 뛰어넘어 마치 작곡가가 직접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서로 깊은 우정을 쌓은 지 4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고, 그 수수께끼 또한 풀리지 않았다. 의문의 조각이 맞춰지는 것은 항상 음악을 통해서였다.

1982년, 백건우는 리스트에 대한 몇 가지 프로그램을 같이할 것을 제안했다. 그때 나는 연주자 혼자서 변덕스러운 천재의 다양한 면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구상하기 위해 백건우와 함께하면서 그가 이토록 다양하고 풍부한 작품에서 단 한 장의 악보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시선이 이 음악적 풍경의 광대함을 전부 포착했음을 깨달았다. 각각의 프로그램에 붙였던 제목을 열거하는 것이 이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절대성을 찾아서’ ‘기도’ ‘과거와 미래’ ‘순례의 해’ ‘치간과 악마’ ‘추억과 죽음’. 총 6회의 독주회로 구성해 실황으로 녹음했다. 이 놀라운 경험은 명연주자의 스케일을 확인시켜줬을 뿐 아니라, 전례 없는 연주를 통해 그가 작곡가의 생각을 오랫동안 고뇌한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해줬다. 그렇게 그는 25세부터 라벨과 무소륵스키 전곡 독주회를 가졌고, 이후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다섯 곡, 쇼팽의 모든 협주곡 형식의 작품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의 녹음을 진행했다.

또 다른 의문은 그의 관점이 이와 반대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포레나 브람스 혹은 슈베르트 작품의 경우 그는 여러 녹음 작업이나 음악회에서 결연하면서 심사숙고한 태도로 소곡집에서 영감을 얻는 방식을 선택했다. 즉, 영화 편집자 같은 직관으로, 연관되거나 대조된 ‘악흥의 순간’을 통해 작곡가의 이상적인 묘사처럼 모음집 작업을 했다.

나의 가장 큰 궁금증은 늘 색다르며 독특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릴 때부터 어떻게 유럽 음악의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아마 그 대답에 연주자의 고귀함과 그 위상의 결합, 명상과 열정이 조화를 이루는 동서양의 만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파리에서, 레미 스트리커(음악학자)

백건우와 베토벤

백건우와 베토벤의 음악 인생이 그러하다. 인간 탐구의 험난한 수행에 몸을 던진 구도자처럼 끊임없이 연구하고 몰두하며 고뇌하고 파고들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감히 짐작하건대, 이 대(大)음악가들은 음악을 위해 숱한 외로움과 고뇌의 날들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받아들이며 감내했을 것이다.

처절한 극한의 시간이 왜 없었을까.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친 시간이 왜 없었을까. 그것을 견디게 한 힘은 티끌만 한 부정도 없는 순백의 완전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 믿음으로 한 발 한 발 더 치열한 극한의 세계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진정한 예술가들이 만드는 음악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신의 노래며, 때로는 고뇌를, 때로는 격정적 사랑의 감동과 환희를, 세상의 낙원을, 숭고한 진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내면을 솔직하고 겸허하게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 전율로 몸서리쳐지는 감동을 느끼게 되고,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잡다한 세상의 유혹과 쓸데없는 이기심이 자리 잡지 못하게,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변함없이 불태웠던 열정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나와 이웃들을 사랑하는 삶의 진실이 비춰지게…. 이것이 백건우와 베토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2008년 1월 25일 자 중앙일보 발췌)

– 김대진(피아니스트·수원시향 상임지휘자)

앞서 걸어가신 예술가, 그 뒤에 서서

2009년 백건우 선생님 그리고 선욱이와 준희까지 4명의 피아니스트가 함께 했던 연주가 생각납니다. 그때 서울 외에도 다른 지역에서 투어 연주를 했어요. 피아노 세팅을 할 때 홀에 따라 미묘한 차이로 객석까지 도달하는 소리가 달라지는데, 무대 앞에서 뚝 끊기기도 하고, 멀리까지 뻗어나가기도 하죠. 피아니스트는 혼자 다니는 편이라 이런 것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고 혼자 터득하는 편인데, 저는 백건우 선생님과 투어를 다니면서 어떻게 조절하시는지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었어요.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 선생님을 뵙거나 통화를 할 때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선생님의 목소리만으로도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예술가의 길을 앞서서 걸어가신 선생님 등 뒤에서, 언제나 저는 열렬히 박수치는 팬입니다.

– 김태형(피아니스트)

객석의 관객이 기억하는, 피아니스트의 빛

백건우와 인연을 맺은 지 올해 20여 년이 된 일신방직 김영호 회장. 그는 ‘국내 유일의 현대음악 공연장’인 한남동 일신홀을 노장 피아니스트의 연습 공간으로 늘 열어두곤 한다. 그간 서울에서 열린 백건우의 공연에 거의 빠지지 않고 자리했던 김 회장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주는 무엇일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많은 곡을 일주일 동안 연주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 어느 때보다 ‘건반 위의 구도자’다운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인상 깊은 공연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8일부터 8월 5일까지 ‘객석’ 페이스북을 통해 가장 많은 독자가 꼽은 ‘백건우의 명연주, 잊지 못할 순간’ 역시 2007년 공연과 음반으로 만난 베토벤 전곡 연주였다. 연주회 후 로비에서 CD에 사인을 받은 ‘인증 샷’과 함께 무대 아래 피아니스트의 인간적인 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많았다. 독자들에겐 여름 바다에 울려 퍼진 피아노 선율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2011년 연평도·위도·욕지도, 2013년 울릉도·통영 사량도에서 가진 섬마을 콘서트, 2014년 7월 제주항에서 가진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음악회가 인상 깊게 남아있다는 이야기들이 눈에 띄었다.

정리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