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서혜경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 사이에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0월 1일 12:00 오전

스크랴빈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스크랴빈과 쌍벽을 이루는 라흐마니노프 음악과의 대조를 통해 조명하는 무대가 펼쳐진다

스크랴빈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스크랴빈과 쌍벽을 이루는 라흐마니노프 음악과의 대조를 통해 조명하는 무대가 펼쳐진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198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다. 그의 열정적인 피아니즘에 매료된 많은 청중이 그녀를 선망하며 객석을 찾았다. 활발할 연주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근육마비와 유방암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그 열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 대표적인 러시아 레퍼토리인 스크랴빈 에튀드와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와 에튀드, 피아노 소나타로 전국투어 리사이틀을 앞두고 현재 뉴욕에서 준비에 여념이 없는 서혜경과 이메일 인터뷰를 나눴다.

2014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온전히 다시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것과 이제 가족과 같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그동안 마음속으로 도전하고 싶었던 레퍼토리가 많았는데 요즘 집중해서 그 작품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작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참고로 나는 ‘연습’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곡을 분석하고 계속 연주하다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이고 이해가 깊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지속되고 진화하는 과정이어서 고정된 것을 익힌다는 뉘앙스가 있는 ‘연습’이라는 단어가 아닌 ‘연구’라는 표현을 쓴다) 무엇보다 뉴욕에서 좋은 공연들을 볼 수 있어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뉴욕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어떤가.

뉴욕 사람들은 누구든 자기 일에 몰입해 내게 좋은 자극이 된다. 컨설턴트인 우리 딸부터 새벽에 나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긴장감이 가득한 생활의 연속이라 얼굴 보기도 힘들고, 같이 이야기 나눌 시간도 별로 없어서 서운할 때가 많다.(웃음) 요즘은 학교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시간을 내 자신에게 투자할 수가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보람 있고 스스로 배우는 것도 많지만 시간과 신경이 분산되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피아니스트 생활에는 그리 적합하진 않은 것 같다.

이번 무대에서 러시아 정통 레퍼토리 중 특히 스크랴빈 연주가 주목을 끈다.

학생시절부터 러시아 음악에 굉장히 친밀감을 느껴서 많이 연주했다. 특히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은 모두 녹음해 음반으로 냈다. 물론 스크랴빈도 종종 연주했지만 청중이 그리 반기는 작곡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스크랴빈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언어로 섬세한 작품을 남긴 천재 작곡가임에도 음악 애호가들은 쇼팽의 영향이 강한 초기 작품들 이외에는 그의 작품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침 올해가 스크랴빈 서거 100주년이어서 한국 청중들에게 이 천재 작곡가의 음악과 더 친숙해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그와 쌍벽을 이루는 라흐마니노프 음악 대조를 택했다.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 모두 니콜라이 즈베레프에게서 배웠다.

둘은 비록 같은 스승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고 모스크바 음악원을 같이 졸업한 동기였지만 성격도 대조적이고 음악 세계가 많이 달라 재미있는 스토리가 될 것이다. 스크랴빈 음악의 진화를 보면 꾸준히 새로운 것을 찾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코즈모폴리턴이라는 인상이 드는 반면, 후기낭만주의의 대가였던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선이 굵고 긴 멜로디에는 러시아적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이는 이 두 피아니스트 작곡가들의 음악은 색채가 아주 풍부하고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화음 사용이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다른 작곡가들과 다르다. 이런 공통점과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스크랴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싶다.

이번 작품 선곡 배경과 이 작곡가들만의 언어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스크랴빈은 아주 창의적이고 실험 정신이 투철한 작곡가여서인지 그의 음악은 빠르게 진화했고 초기와 후기 작품들을 같이 들어보면 마치 다른 사람의 곡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르다. 스크랴빈 음악의 특징은 어느 작곡가보다 색채가 다양한 것과 더불어 변화무쌍한 화음으로 대변되는 음악 언어다. 특히 그는 4도 화음을 즐겨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의 초기 작품에도 보이고 스크랴빈 이외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후기 작품에는 6개의 음(C, F#, B♭, E A, D)으로 구성된 ‘신비화음’(Mystic Chord)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연주자 입장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스크랴빈 음악의 매력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청중이 이해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이 점이 스크랴빈의 음악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자주 연주하던 스크랴빈 소나타 5번과 9번은 이번 연주에서 제외되었는데.

흔히 스크랴빈 음악의 진화는 소나타들을 통해 볼 수가 있다고 하는데, 스크랴빈 소나타 5번이나 유명한 9번 ‘검은 미사’는 훌륭한 곡이지만 스크랴빈과 익숙지 않은 청중과 소통하기 어려운 곡 같아서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제외시켰다. 대신 그의 초기 음악 중 Op.2-1과 작품 8의 몇몇 에튀드를 비롯해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경향이 모두 곁들여진 남쪽의 푸른 깊은 바다와 달을 소재로 한 컬러풀한 소나타 2번을 선택했다. 그리고 스크랴빈의 독창적인 ‘포엠’(Poeme 시곡)이라는 장르의 곡들인 Op.32, Op.69, ‘Op.72 불꽃을 향하여’, 그리고 에튀드 Op.42-5와 짧은 Op.45-1을 통해 그의 작곡가로서 진화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 중 다수는 2~3분 길이의 아주 함축적인 곡들인데, 관중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길 수가 있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러시아 냄새가 물씬 나는 선이 굵고 긴 멜로디인데, 그 속에는 변화무쌍하면서도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화음이 숨어 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측면이 강한 스크랴빈의 음악보다는 라흐마니노프는 스케일이 크고 웅장하면서도 애수가 넘친다.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진수인 소나타 2번이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프렐류드와 회화적인 에튀드는 애수가 넘치면서 당당한 기풍이 살아 있는 러시아적 음악을 대표하는 곡들이다.

작곡가의 언어만큼 연주자의 언어도 중요하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언어 특징은 무엇인가.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차별되는 연주자로서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피아노를 로맨틱 스타일로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 로맨틱 스타일은 쉽게 얘기하면, 건반 악기인 피아노를 레가토 악기라 생각하고 음들을 끊어 치지 않고 성악가들이 노래하듯 부드럽게 음을 이어가면서 라인을 길게 가져가는 연주 방식이다. 이 스타일의 특징은 소리가 아주 감각적이면서 컬러가 풍부하고 화려하며 강한 타건 없이도 큰 소리 내거나 멀리까지 들리게 하는 골든 톤 테크닉이고 적절한 루바토 사용을 통한 자연스러운 화음 변화 같은 고난도 노하우를 요구한다. 20세기 후반에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z)나 슈라 체르카스키(Shura Cherkassky) 같은 연주자들을 마지막으로 거의 단절된 전통인데, 나는 줄리아드 시절 사샤 고드니츠키(Sasha Gorodnitzki) 선생님에게 전수를 받았고 그 가르침이 피아니스트 서혜경 스타일의 기반이다.

20대 나의 연주는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흐르는 정열과 용암처럼 힘이 넘치는 연주로 유명했다. 그때는 아르헤리치처럼 빠르고 호로비츠처럼 피아니시모와 포르테가 극명한 비르투오소 연주 기법도 따라서 흉내 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자신만의 연주 색깔과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고 곡들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져 가면서 악보 중간에 필요할 때 숨을 쉬어가는 여유를 터득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성악가처럼 노래하게 하고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들리게 하면서 오페라처럼 작품들을 어떻게 극적으로 해석할까 고민하고 있다.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최대한 홀의 음향을 활용하여 작곡가의 언어를 통해 음악과 관중, 홀을 혼연일체로 만들어 다 같이 감동받는 경험을 선사를 하는 것.

삶의 가치나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음악은 내 존재의 이유다. 20대에는 남들보다 레퍼토리를 빨리 넓히고 세계 최고가 되는 게 목표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작품 하나하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진지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내 자신의 색깔과 목소리를 끝없이 찾아가는 데 주력하면서 그에 맞는 테크닉을 연마하려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올해가 피아노를 시작한 지 50년 되는 해인데, 그동안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겪었고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음악을 해석하는 데 묻어 나오는 것 같고 청중에게 심도 있는 연주를 들려줄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음악을 통해 청중과 인생에 대해 같이 논하고 싶다.

젊은 스타 연주자들이 많은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김선욱, 손열음, 임동혁 같은 젊은 친구들이 해외 콩쿠르에 나가서 입상을 하고 세계무대도 누비고 국내에서 젊은 관객들에게 사랑받고 클래식 음악의 저변을 넓히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선배로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클래식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길은 멀리 내다보고 끝까지 가야 하는 지구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인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보다 더 높은 곳, 더 고귀한 예술가로 비상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테크닉 연마와 심도 있는 곡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데, 그것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희생이 동반된다. 결국 예술가의 길은 자기와의 외로운 투쟁이다. 난관에 봉착하고 때론 좌절할 때가 오더라도 그 꿈을 포기하지 말고 높은 곳을 향해 뛰어가면서 초심을 잃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다.

모차르트 프로젝트도 계속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새로운 음악 비전을 들려달라.

‘서혜경’ 하면 러시아 레퍼토리 전문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중부 유럽 주류 작곡가들의 작품도 즐겨 연주한다. 내년에 네빌 매리너 경(Sir Neville Marriner)과 협연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음반으로 출시하는데, 규모가 큰 러시안 협주곡 연주만을 듣던 영국 현지 관계자들이 녹음 세션을 끝내고 모차르트 해석자로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칭찬했다. 새로운 비전이라기보다는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의 로맨틱 연주 스타일 전통을 계승해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고,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 리스트, 슈만, 브람스 등 다양한 작곡가의 음악을 나만의 것으로 해석해 세계무대에서 지속적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어느새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진정한 전성기가 앞으로 20년간 내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나를 설레게 한다.

사진 스테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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