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최초로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문지영.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음악 인생 스토리
지난 9월 5일 이탈리아 볼차노에서 펼쳐진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 최종결선에서 문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이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동안 서혜경과 백건우가 입상한 적은 있지만 올해 60회째 맞은 이 콩쿠르에서 한국인이 우승을 한 건 처음이다.
“결선 때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는데, 베토벤은 협주곡뿐 아니라 다른 작품들도 체계적으로 배워왔고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편했지만, 쇼팽 협주곡은 무척 어려웠어요. 과하지 않게 소리에 집중해 연습했는데, 이렇게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무척 기쁘고 행복해요.”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는 참가자들이 한차례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고, 특히 올해는 피아노를 두 대 지정해 연주자들이 마음대로 골라서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콩쿠르 전에 개인 시간을 많이 주어서 모두들 연습하느라 서로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이번 콩쿠르는 심사위원 11명 중 10명이 역대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 1위 수상자여서 더욱 의미 있었고, 그래서 더 떨렸던 것 같아요. 말로만 듣던 유명한 연주자들이 바로 제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더 긴장되었고요.”
멜로디언으로 연습하던 어린 시절
문지영이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2년 에틀링겐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다. 당시 그녀는 ‘놀라운 재능과 집중력, 창의력을 갖춘 연주’라는 심사위원단의 호평 속에 한국 출신으로 에틀링겐 청소년 콩쿠르에서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6세 때 처음 피아노를 시작한 그녀는 가정환경이 어려웠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이 피아노를 떠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동네 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시작한 그녀. 진도도 빠르고 재능이 뛰어나 콩쿠르에 나가면 우승을 휩쓸었다. 하루 종일 학원에서 연습하고 집에 와서는 멜로디언으로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피아노를 공부했다. 실력이 늘면서 그녀는 여천에서 좀 더 넓은 도시인 여수로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콩쿠르에서 상을 타면 그 상금으로 학원비를 냈고, 새로운 곡들을 배워갔다.
기회는 우연히 왔다. 12세 때 선화 음악콩쿠르 대상을 받으며 2년간 선화음악 영재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었는데, 한국메세나협회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마련한 ‘아트 드림 콩쿠르’를 통해 김대진 교수를 만나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은 그녀의 음악 인생을 바꿔놓았다.
“교수님을 만나기 전 저는 연주할 때 자신감이 별로 없었어요.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연주도 많이 소심했죠. 교수님을 만나면서 근본적으로 테크닉과 음악성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교수님은 제가 자유롭게 음악적인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고, 소리에 대해 고민하고 계속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어요. 하지만 그동안 알고 있던 테크닉과 음악적 표현에 대한 생각들을 하나하나 고치는 과정은 혼돈 그 자체였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바꾼다는 건 차라리 처음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어요. 그렇게 힘든 시간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어느새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시간이 찾아왔죠. 워낙 좋아했지만 그러면서 피아노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스무 살 피아니스트의 꿈
2009년 폴란드 루빈스타인 청소년 콩쿠르에서 공동 1위와 2012년 에틀링겐 콩쿠르 우승 이후 그녀는 2014년 일본 타카마츠 콩쿠르 우승, 제네바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우승과 청중상, 특별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의 길을 걸어 왔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스무 살, 꿈 많은 대학교 2학년생이다.
“학교에 들어와 좋은 선배들을 만나고 후배들도 생겨서 즐거워요. 피아노 공부는 당연히 열심히 해야겠지만 저는 특별히 외국어 공부와 역사와 세계사 공부도 하고 싶어요. 책도 많이 읽고 싶고요. 여행도 가고 싶은데, 콩쿠르 때문에 이탈리아만 자주 가게 되네요.”
그녀는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를 떠나면서도 비행기에서 읽을 책을 잔뜩 가져갔다. 역사, 우주 과학, 소설까지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었다.
“무겁게 들고 갔다 그대로 가져온 게 문제죠.(웃음) 생각처럼 여유를 갖고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아요. 이번엔 꼭 다양한 책 읽기를 하고 싶었는데.”
음악적으로 그녀는 베토벤, 슈만 같은 고전 레퍼토리가 더 자신에게 맞는다고 한다. 하지만 낭만 레퍼토리를 비롯해 수많은 레퍼토리를 새로 배우며 익혀야 하는 건 음악도로서 당연한 과제다.
“어린 시절부터 독일 고전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 훨씬 편하고 좋았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요. 이제는 프랑스 음악이나 동유럽, 스페인 음악 등 새로운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 필요한 감성도 쌓아야 할 것 같아요. 영화와 미술, 전시, 책 등 다양한 문화도 접해보고 사고의 폭도 넓힐 수 있도록 여러 경험을 하고 싶어요.”
이번 콩쿠르 우승으로 그녀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에서 내년까지 다양한 연주를 갖게 된다. 10월 이탈리아에서 있을 독주회와 11월 플루트 듀오 연주회, 파리와 브뤼셀에서 있을 투어 연주 등 내년 5월까지 다양한 무대에 선다. 이번 콩쿠르에서 수상한 연주자들과 함께 아시아 투어도 이어갈 예정이다.
“어린 시절 제 꿈은 저를 가르쳐주시는 피아노 선생님처럼 되는 거였어요. 선생님이 바뀔 때 마다 언제나 그 선생님처럼 되고 싶었죠.(웃음)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꿈 꾼 적은 없지만 피아노를 치지 않는 제 모습을 상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무엇이 되고 싶다기 보다는 그저 피아노가 좋았고 옆에 있고 싶었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유명해지는 것보다는 음악과 계속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해요. 제 안의 저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음악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김대진 교수님, 그리고 선생님들, 가족, 친구들에게 모두 감사드립니다. 피아노로 이렇게 좋은 것들을 나눠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녀에게 피아노는 그 자신 안에 있던 무한한 잠재력을 깨우게 한 고마운 존재다. 힘든 순간을 견디게 했던 건 ‘음악’이었다.
“어린 시절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학원으로 피아노 연습을 하러 가는 길이 두렵지 않았던 건 오직 ‘피아노’와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어요. 저보다 저를 잘 아는 나의 친구 피아노. 그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김대진 교수가 말하는 제자 문지영
지영이는 한마디로 제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는 학생이에요. 저와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6년이 되어가네요. 이쯤 되면 서로 익숙해져 그냥 넘어가는 것들이 생길 법도 한데 지영이는 처음 레슨 받으러 왔을 때 모습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모습은 스승을 대하는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본인이 음악을 대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예종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처음 보는 일입니다. 특별한 친구죠.
지영이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았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으로만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음악으로, 피아노를 통해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뚜렷한 윤곽은 없었지만 그 스토리와 소리가 아주 특별하고 오리지널했습니다. 이 독창성이 바로 지영이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구축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영이에게 해줄 당부의 말은 제 스스로에게 항상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치열한 현실 세계로 들어가게 되어도 결코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것. 가장 외롭고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지영이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진 심규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