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리골레토’ ‘나부코’ & 푸치니 ‘라 보엠’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1월 1일 12:00 오전

로버트 카슨, 다니엘레 아바도, 다비데 리베르모레. 현존하는 세계 정상 오페라 연출가들의 이름이다. 지난 10월, 2015/2016 시즌을 대표하는 오페라로 세 명의 연출가가 각각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바르셀로나 리세우 극장, 발렌시아의 소피아 여왕 예술 궁전에서 빚어낸 무대는 현재 세계 오페라 연출의 흐름을 이해하는 첩경이었다. 두 개 이상의 극장이 힘을 합쳐 제작하는 프로덕션이 보편화된 유럽과 미국의 제작 시스템은 세 극장에서도 적용됐다. 아직도 한 극장에서 ‘나 홀로 제작’해 몇 회 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폐기하는 우리의 후진적 오페라 제작 환경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 공중그네에 앉아 아리아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질다 역의 니나 미나샨

볼쇼이 극장 뉴 스테이지 ‘리골레토’

모스크바의 자존심, 볼쇼이 극장은 1990년대부터 러시아 극장의 1위 자리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 내주었다. 극장은 ‘볼쇼이’라는 이름처럼 크기만 하지 어둡고 칙칙했다. 뉴 프로덕션을 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적자에 허덕였다. 2002년 1월, 림스키 코르사코프 ‘금계’를 공연하던 볼쇼이 극장은 객석의 반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모스크바 시민의 외면을 받았다. 스탈린 시대에 사용하던 아래층을 콘크리트로 메워버려 나빠진 음향도 볼쇼이 극장의 몰락에 한 몫을 담당했다. 그사이 마린스키 극장은 발레리 게르기예프라는 만능 지휘자를 내세워 러시아는 물론 세계로 도약했다.

이에 분발한 볼쇼이 극장 측은 우선, 1995년부터 극장 왼쪽에 ‘노바야 스체나’라 불리는 뉴 스테이지를 만들어 2002년 11월 29일 림스키 코르사코프 ‘눈 아가씨’로 오픈했다. 음향이 옛 볼쇼이 극장보다 월등했다. 오일 머니를 앞세운 러시아 경제 부흥으로 정부의 지원까지 이끌어냈다.

마침내 2005년부터 2011년까지 1조 2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대대적인 본 극장 복원 공사에 돌입해 과거 영광을 재현했다. 아트센터 열 개 이상 지을 수 있는 돈이 단 한 개 오페라하우스의 리모델링에 들어간 셈이다. 예술에 과감히 투자하는 러시아의 저력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10월 8일 저녁 볼쇼이 극장 뉴 스테이지. 이번 시즌 볼쇼이 극장에서 간판으로 내세우며 대대적인 홍보를 한 베르디 ‘리골레토’는 일찌감치 티켓이 매진됐다. 2011년 볼쇼이 극장 재개관 후 출시된 영상물은 주로 발레에 한정됐다. 더구나 2000년대 볼쇼이 극장에서 접하던 오페라들이 수준이 낮아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로버트 카슨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이 연출을 맡은 프로덕션에 대한 기대는 음악보다 더 관심거리였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스트라스부르 랭 오페라·모네 극장·제네바 대극장·볼쇼이 극장이 함께 제작한 ‘리골레토’. 카슨의 천재적 아이디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도입부 막이 오르기 전에 광대 복장을 한 리골레토가 커튼을 비집고 어기적거리며 등장했다. 이내 통곡하던 그가 자루에서 꺼내 든 것은 섬뜩할 만큼 벌거벗긴 소녀의 마네킹이었다. 순식간에 막이 올라가고 무대는 돌연 서커스 극장으로 변했다.

1막에서 주요 볼거리인 리골레토의 집은 아담한 이동식 주택으로 설정됐다. 세 개의 벽을 접었다 폈다 하며 청중의 눈을 고정시켰다. 질다가 ‘그리운 이름’을 부를 때의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피날레에 질다를 보쌈해 가는 장면에서 집은 통째로 사라졌다. 텅 빈 무대에서 딸을 잃고 절규하는 리골레토는 비참함의 극을 달렸다. 서커스 극장답게 아크로배틱을 아찔하게 보여주는 곡예사들의 연기는 3막이 끝날 때까지 압권이었다. 리골레토를 부른 그리스 출신 바리톤 디미트리스 틸리아코스를 제외하고 온전히 볼쇼이 극장의 주역으로 구성된 가수진은 탁월했다. ‘러시아 성악은 테너가 약하다’라는 관념을 깨고 파벨 발루친은 요즘 최고의 만토바 공작으로 평가받는 프란체스코 데무로와 피오트르 베찰라에 필적하는 목소리로 갈채를 받았다. 발루친은 카슨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연기까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질다 역의 니나 미나샨은 리릭 소프라노까지 뻗치는 질감 있는 소리로 감동을 선사했다. 레오 누치가 쌓아올린 캐릭터에 익숙한 리골레토는 틸리아코스가 비교적 무난하게 불렀다. 스파라푸칠레 역의 올레크 치불코는 러시아 저음 가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고, 늘씬한 몸매의 알렉산드라 코발레비치는 마달레나의 농염함과 노래 모두 합격점을 받았다.

2막, 공작에게 겁탈당해 나온 딸과 피에로 아버지가 만나는 모습은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가신들, 이 천벌을 받을 놈들아’를 부를 때 베르디 오페라의 비밀 병기, ‘첼로’의 끈적거리는 활 긋기는 소름 돋게 하는 명연주였다. 리골레토 앞에서 가면을 쓰고 서커스 극장의 객석에서 바라보는 가신들은 뒤에서 권모술수를 일삼는 비열한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3막, ‘여자의 마음’ 뒤에 이어지는 4중창은 동상이몽을 실현하는 인물들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비췄다. 드디어 마지막, 죽은 딸을 부둥켜안고 탄식하는 리골레토 위에서 붉은 천에 매달린 여성 서커스 단원이 회오리치듯 내려왔다 올라갈 때 전율이 일었다. 그것은 볼쇼이 극장 재기의 몸부림이었다. 또한 사실주의로 가득 찬 ‘리골레토’에서 벗어나 카슨만의 표현주의로 새롭게 갈아탄 연출의 힘은 상당했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를 무대로 가져오면서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메트 오페라와 달리, 저예산으로 효과를 극대화한 면도 칭찬할 만한 대목이었다.

 

 


▲ 광란의 장면을 타오르는 불꽃으로 형상화한 2막의 카바티나

리세우 극장 ‘나부코’

스페인에서 베르디가 이렇게 인기가 있었던가. 베르디 탄생일이었던 10월 10일, 바르셀로나 리세우 극장 2000석이 넘는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청중으로 가득 찼다.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장남 다니엘레 아바도 연출의 ‘나부코’가 베로나 페스티벌 터줏대감 다니엘 오렌의 지휘로 막을 올렸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 오페라 극장의 ‘나부코’ 무대는 아바도 프로덕션을 최상급으로 여긴다. 토리노 왕립오페라극장에서 시작해 파르마 레조 극장에서 만개한 구 프로덕션을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무대는 영상물로도 출시됐고, 리세우 극장뿐 아니라 라 스칼라 극장·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도 함께 사용한다. 시종일관 흑백사진처럼 무채색으로 일관하는 아바도의 ‘나부코’는 중요 장면마다 후면에 특정 화면을 투사해 사실주의를 높여 갈등과 몰입을 심화시키는 수법으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지휘자 다니엘 오렌의 노련미는 서곡부터 다이내믹하게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파르마 레조 극장의 농익은 음향과 달리 드넓은 리세우 극장은 소리가 한곳으로 모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대체로 ‘나부코’의 무대는 히브리와 바빌론 쪽으로 양분되게 마련인데, 서곡에서부터 보여주는 무덤의 비석을 형상화한 기둥들은 바빌론 진영으로 넘어가도 그대로 서 있었다. 경계의 모호함은 후면투사 영상과 소품으로 극복됐다. 3막 2중창에서 금속으로 만들어진 석상은 4막에서 나부코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 해체된 것이 그 예다.

1막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기둥들이 쓰러지는 설정은 대단히 설득력 있었다. 아비가일레 역의 마르티나 세라핀의 한 맺힌 절규가 일품이던 2막의 카바티나와 카발레타는 ‘광란의 장면’을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구체화했다. 2막의 숨은 명장면은 ‘자카리아의 기도’였다. 첼로 독주 위에 얹히는 베이스 비탈리 코발료프의 음성은 비탄에 빠진 히브리인을 잘 대변했다.

3막,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은 무대 중앙에 다닥다닥 붙어서 비치는 조명 아래 고도의 집중력으로 노래를 완성했다. 계속되는 박수에 결국 한 번 더 앙코르한 뒤 다음 장면이 이어졌다. 합창단의 저력은 4막의 무반주 합창 ‘위대한 여호와’에서 정점을 찍었다. 역시 리세우 극장 ‘나부코’의 진정한 주역은 아비가일레 역의 세라핀이었다. 마리아 굴레기나가 완벽한 악녀 아비가일레를 완성해 쉽게 도전하지 못할 터. 하지만 세라핀은 높은 수준의 연기와 노래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공연의 감동은 극장을 나오면서 직원들이 나눠주는 유인물로 인해 반감됐다. 100명 이상 직원이 해고되고 임금이 삭감된 상황을 직접 체험하니 유럽의 극장들도 불황의 여파를 상당히 받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연장들이 마케팅과 재정 자립도에 왜 사활을 걸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 무제타가 레일을 타고 등장하는 2막의 카페 무뮈스 장면

소피아 여왕 예술 궁전 ‘라 보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이어 스페인 제3의 도시 발렌시아는 2005년, 레알 마드리드 극장과 리세우 극장에 필적하는 현대적인 오페라하우스를 개관했다. 발렌시아 태생의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디자인한 소피아 여왕 예술 궁전은 높이 70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오페라극장이다. 얼핏 보면 투구처럼 생긴 독특한 외관은 안으로 들어가면 더 심화된다. 나무가 아닌 타일로 마감한 내벽은 고음이 다소 쏘기는 하지만 유니크하다. 지중해의 항구도시를 대변하는 듯 하얀 조개 빗살 모양의 천정은 상당히 이국적이다.

올해 초 비리 혐의로 체포된 헬가 쉬미트의 뒤를 이어 극장장으로 취임한 다비데 리베르모레는 지난해 국내에서도 영상으로 나와 호평을 받은 ‘라 보엠’의 연출가로도 유명하다. 두 번째로 소피아 여왕 예술 궁전에 올린 ‘라 보엠’은 10월 12일, 필자가 본 시즌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프로덕션의 인기를 반영하듯 역시 티켓은 매진이었다. 행정가의 잘못을 예술 본연의 힘으로 덮은 셈이다.

저녁 6시 객석에 불이 꺼지고 무대가 올라가는 순간 청중 사이에 작은 탄성이 터졌다. ‘아름답다’는 수식어 외에 어떠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환상적인 무대가 펼쳐졌다. 레일 위를 가로로 오가는 캔버스에 맺히는 영상이 무대를 양분한 거대한 LED 막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장면은 기막힌 발상이었다. ‘그대의 찬 손’과 ‘내 이름은 미미’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말 그대로 살아 움직였다. 리베르모레는 독일 오페라 무대처럼 추상적이고 관객을 괴롭히는 애매한 연출이 아닌, 그야말로 동화 속을 체험하는 듯 시각적인 면에 역량을 쏟아부었다. 조르다노 루카와 이리나 레비안 커플의 조합은 찰떡궁합이었다. 2중창 ‘사랑스러운 아가씨’에서 찬연히 빛났다.

2막의 카페 무뮈스의 화려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린이 합창도 좋았고, 레일을 타고 무제타가 등장하는 장면도 독특했다. 무엇보다 발렌시아 버전의 ‘라 보엠’은 3막 도입부가 압도적이었다. 눈 내리는 검문소와 마르첼로의 술집을 형상화한 조명과 무대 효과는 아스라한 추억을 곱씹게 했다. 4막에서 로돌포가 미미를 부르며 절규할 때 LED 막에 그려진 여인의 형상이 깨지며 막이 내려갔다.

21세기 오페라계는 연출가의 시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슈퍼스타 성악가는 없었지만, 모스크바·바르셀로나·발렌시아에서 만난 오페라는 상향평준화된 극장 소속 가수의 뛰어난 노래와 연출의 힘으로 매진 사례를 일구어내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유럽 극장의 상황도 어렵다. 우리도 최고의 프로덕션을 가지고 있는 극장과 손잡고 연출의 힘으로 침체된 오페라를 살려야 한다. 이제 우리 성악가만으로도 노래는 충분히 세계 수준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사진 유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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