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한 차멀미에 지칠 즈음 전주터미널에 도착했다. 공휴일인 한글날이었고, 시간을 보니 서울에서 출발한 지 여섯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전주는 많은 관광객으로 부산스러웠다. 서둘러 택시에 올랐다. 극심한 교통 체증 때문에 오전 공연은 죄다 놓쳐버린 상황이었다. 택시 기사는 전주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들을 쉴 새 없이 꼽아주더니,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다며 한가한 날에 다시 놀러오라고 했다. 거리는 번잡해도 창을 내려 바라본 전주의 하늘을 다정했다.
전라도는 예부터 기름진 들판에서 소리와 풍류를 즐겼으며, 판소리를 키워낸 곳이다. 열네 번째 해를 맞이한 전주세계소리축제(이하 소리축제)는 우리나라 전통 음악과 세계 민속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포괄적으로 수용한다. 10월 7일부터 11일까지 닷새간 열린 이번 축제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전주한옥마을로 크게 나뉘어 펼쳐졌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 도착하니 놀이마당에선 말레이시아 민속음악이 흘러나왔고, 모악당 광장에선 장터가 펼쳐져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전당을 활보했다. 프로그램 안내서를 펼쳐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다녀온 이들은 알겠지만,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한옥마을의 거리가 상당해서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다시 짜야 했다. 하루 머물 일정으로 내려왔으니 모든 공연을 다 수용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30분, 1시간 간격으로 배차된 셔틀버스를 타면 예정된 공연을 놓칠 판이었다. 한옥마을로 이동하려면 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부리나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로 향했다. 정가악회와 벵자밍 타우브킨 트리오가 협업한 ‘코-브라 프로젝트’가 열렸다. 공연장에 들어와 프로그램 북을 펼쳤는데, 연주자 프로필만 눈에 띄었다. 50페이지로 구성된 프로그램 북 어디에도 작품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공연 1부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며 결성된 정가악회 소그룹 악단 광칠의 무대였다. 최근 몇 년간 정가악회의 작업이 남도소리 중심이었다면, 이번 작업은 서도의 굿 음악과 민요를 바탕으로 북한 지역에서 불리던 민요를 재구성했다. 2부는 정가악회와 브라질의 음악 그룹 벵자밍 타우브킨 트리오가 협업했다. 피아노·바이올린·타악기가 연주하는 보사노바·삼바 리듬에 정가악회의 국악 리듬이 더해졌다. 두 나라의 전통 리듬이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리듬을 유지한 채 하나의 조화를 만든 공연이었다.
전주한옥마을로 이동해 ‘판소리 다섯 바탕’이 열린 향교 명륜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축제에서 국악의 정체성을 경험하는 역할은 판소리가 담당한다. 전주까지 간 이상 판소리 한 바탕을 제대로 듣고 와야 할 터. 선선한 가을 저녁, 명륜당에 앉아 김소영이 부르는 동초제 ‘심청가’를 경청했다. 무대 옆 화면에는 국문과 영문 자막이 동시에 제공됐다. 김소영은 까다로운 장단법이 특징인 동초제를 호소력 짙은 애절함으로 빚어냈다.
이날 공연의 최고 인기는 전주전통문화연수원 동헌에서 열린 ‘산조의 밤’. 강정숙이 ‘가야금산조’를, 이생강이 ‘대금산조’를 연주했다. 무대에 오른 강정숙은 관객과 이렇게 가까운 무대는 처음이라며, 수줍게 웃음을 보이곤 연주를 시작했다. 강정숙의 가야금은 섬세한 어택과 가녀린 지속음이 인상적이었는데, 관객 모두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생생한 산조를 들었다. 이어서 연주한 이생강의 대금은 정교한 울림을 품었다. 음의 포물선은 새가 우는 듯 여운을 남겼고, 동헌의 너른마당은 이내 울창한 숲 속으로 변모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전주는 ‘힐링’과 ‘먹방’ 도시로 젊은층의 관광명소가 됐다. 이러한 유명세에 힘입어 황금연휴에 열린 이번 소리축제도 관객이 자연스럽게 늘어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낮에 열린 브라질의 피아니스트 벵자밍 타우브킨 마스터클래스는 무료 프로그램임에도 관객이 부족하여 자원봉사자들이 서둘러 자리를 채우는 안타까운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았지만, 굵직한 아티스트들로 인해 공연의 질은 상당히 높았다. 관객이 축제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치밀한 기획력이 지속된다면,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진정 지역을 대표하는 푸근한 축제가 될 것이다.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