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진보·프레스코발디의 토카타
지난해 자신이 이끄는 콘체르토 이탈리아노와 내한하여 시대악기 연주의 진수를 펼쳤던 유럽 고음악계의 거장 리날도 알레산드리니가 건반악기 비르투오소로서의 면모를 엿보이는 음반을 출시했다.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의 쳄발로와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 작품집 1권은 이 작품의 레퍼런스 음반으로 꼽히는 알레산드리니의 1992년 녹음을 아르카나 레이블에서 새 패키징으로 재발매했는데, 작품이 로마에서 처음 출판된 지 4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해 기획한 것이다. 알레산드리니의 연주는 각각 헤이그시립미술관과 브레시아의 성당에 보존된 이탈리아 고악기를 사용해 작곡가가 염두에 둔 색채를 극적으로 되살렸다. 견고한 학구적 열정을 시대악기 연주의 빛나는 유산으로 승화한 모범 사례다.
프레스코발디는 1615년 작품집의 첫 출간 이후 22년간 총 4개의 판본을 통해 작품을 확장했고, 1637년 최종 판본을 통해 작곡가의 창조적 완성품을 선보였다. 그는 작품의 서문에서 ‘독자에게’라는 제목의 연주 노트를 담아 자신의 연주 양식, 나아가 17세기 이탈리아 연주 양식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음반 내지에 알레산드리니가 직접 해당 내용에 대한 상세한 주해를 달았다. 연주라는 것이 작곡가를 해석하고 재현하는 작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알레산드리니야말로 프레스코발디의 건반 음악에 있어 누구보다 합당한 연주자일 것이다. 건반 비르투오소로서 역량 외에 알레산드리니가 프레스코발디의 작품 해석에 최적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당대 마드리갈에 대한 전문성이다. 프레스코발디의 화두였던 아페티 칸타빌리(Affetti Cantabili, 마드리갈처럼 노래하는 감정으로)에서 느낄 수 있듯, 건반으로 시대를 풍미한 작곡가는 르네상스 다성음악에 기초한 전통 양식뿐 아니라 마드리갈 같은 진보 양식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집은 작곡가가 아페티 칸타빌리 양식의 연주를 듣고 감동받은 후 이러한 작곡 스타일에 대한 관심을 직접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아페티’로 표현된 이 혁신적 작품집의 기본 요소는 이탈리아 음악 표현에 있어 근본이 되는 주정성이며, 여기에는 레토릭이 주요 역할을 한다.
음반을 듣고 있노라면 프레스코발디라는 인물의 17세기 이탈리아의 건반 비르투오소적 면모와 그가 당대 건반악기 연주 양식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새삼 절감하게 된다.
당시 건반악기를 공부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토카타, 푸가, 그리고 리체르카레 등 프레스코발디가 창안한 양식과 기교를 필수로 익혀야 했다. 음반에서 연주자는 수백 년 전 선조의 천재성을 충실하게 계승한다. 특히 이 작품집은 당대 음악적 문법상 대치될 수 있었던 쳄발로와 오르간이라는 두 악기를 사용한다. 2장의 음반에 담긴 작품집 전체의 구조가 마치 두 건반악기의 기교와 역량을 견주기라도 하듯 2인무 형식을 연상시키며 토카타의 본래 의미인 ‘연주하기’의 묘미를 십분 느끼게 해준다.
첫 발매 당시 황금 디아파종상, 텔레라마 만점, 누벨 아카데미 뒤 디스크 그랑프리 수상 등 평단의 극찬을 이끌어낸 기록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있을까. 이 음반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프레스코발디안(Frescobaldian) 알레산드리니의, 프레스코발디를 위한 연주다.
새로운 조합의 바흐 ‘프렐류드와 푸가’
올해 파리에서 녹음한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는 풍부한 고음악 컬렉션을 보유한 나이브 레이블에서 출시됐다. 바흐의 방대한 쳄발로 레퍼토리는 고악기와 현대 악기를 불문하고 연주회뿐 아니라 건반주자의 학습을 위해 널리 사랑받는 곡으로 자리매김했다. 바흐 자신이 작곡가로서 연주회용과 교육용이라는 차별화된 개념을 제안했다고 볼 수 있다. 바흐는 제자들을 위해 짤막한 곡을 작곡해 건반과 작곡 레슨에 교재로 활용했다. 곡들은 아름다움으로 인해 무대에서도 종종 연주됐다. 이번 음반은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각기 다른 양식·시기에 작곡한 개별적인 프렐류드와 푸가를 새로이 조합해 15쌍의 연습용 컬렉션으로 선보인 데 의미가 있다. 개별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지만 음반에서와 같이 체계적으로 배열한 프렐류드와 푸가는 바흐 음악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콘체르토 이탈리아노의 수장이 아닌 솔로 쳄발로 연주자 알레산드리니의 독주 녹음은 5년 전 샤콘 앨범 이후 오랜만이다. 알레산드리니는 두 앨범 모두 작곡가에 충실하게 빙의한다. 프레스코발디의 작품에서는 작곡가를 직역하는 방식의 소통을 선보인다면, 바흐 작품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면모를 보인다. 즉, 프레스코발디 음반에서 발견한 알레산드리니가 치밀하게 고증하는 해석가라면, 바흐 음반에서는 재현하는 연주자의 상상력을 보태 작품을 재배열한다. 명인의 재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음반을 듣는 하나의 묘미다. 학구적인 모음집으로 기획했다기보다 하나의 프렐류드가 어떻게 하나의 푸가와 연계될지 당대의 관행을 적극적으로 상상함으로써 고안된, 다양한 음영과 특질을 지닌 음악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기분 전환을 위한 컬렉션이다.
바흐 음악이 흔히 그러하듯, 음반에서도 대위적 형식이 일련의 엄격한 규칙을 따른다기보다 긴장과 복잡성을 완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BWV870a·901·902 등 몇몇 프렐류드와 푸가는 최종 버전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대위법이라는 존재는 작곡가의 마음 속에 실타래처럼 존재했으며, 알레산드리니는 이를 가능한 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바흐의 양식 안에서 뽑아내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시종일관 빛나는 아티큘레이션은 쳄발로 음악이 지닌 매력을 극대화하고, 연주자의 음악적 논리와 상상력은 균질하게 빛을 발한다. 작곡가와의 열정적인 소통으로 얻은 자연스러운 영감의 결정체인 알레산드리니의 해석이 도달하는 일체의 경지에 놀란다. 건반악기 연주자들이 한 번쯤 경청해야 할 수연이다.
사진 신나라레코드·라온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