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극장이다. ‘세종 시즌제’라는 열쇠로 새로운 문을 열 그의 자신감
다시 극장이다
‘세종 시즌제’라는 열쇠로 새로운 문을 열 그의 자신감
취임 후 10개월가량이 지난 2015년 말, 세종문화회관에서 이승엽 사장을 만났다. 여러 스케줄과 업무 처리 때문에 전날 2시간밖에 못 잤다고 말하는 그의 눈은 피로의 무게가 가득해보였다.
2015년 2월, 세종문화회관 신임 사장으로 이승엽이 임명됐다는 소식은 공연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7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가르치던 안정적인 자리에 휴직이 아닌 사표를 던지고 현장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놀라움이자, 세종문화회관 개관 이래 처음으로 예술전문경영인이 사장직을 맡은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술의전당을 비롯한 현장 곳곳에서 대학으로 갔다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드문 경우에 속한다.
지난 10개월 간 외부에서 보기에 세종문화회관의 큰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더 잔잔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를 두고 그는 선택에 의한 것이라 했다.
“사실 ‘혁신’이라는 말이 제일 부담스러워요. ‘변화’가 가치중립적이라면, ‘혁신’은 피라미드를 만들어 세우는 것이죠. 멀리서 봤을 때 세종은 혁신이 필요한 조직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힘을 모아 발휘해야 하는 시기고,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봤어요. 극장에 들어오면서 비전과 가치 공유가 덜 되어 있다는걸 더 절실히 느꼈어요.”
그도 세종문화회관이 문화예술계의 중요 자산임에도, 그 역할을 충분히 못하고 있다는 공통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혁신을 감당 못 할 체질에 매스를 들이대는 건 불가능한 일. 가능한 한 이벤트를 하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하지 않기를 택하는 것. 일반적인 기대보다 변화의 속도가 느린 것은 그의 선택이고 설계에 의한 것이었다.
“세종문화회관을 두고 변수의 숫자를 따지면,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예술 경영을 할 겁니다. 9개 예술단이 있고,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아트 콤플렉스로 여러 기능을 수행해요. 휴식 및 컨벤션 공간도 있고 삼청각·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같은 위탁 사업장도 있죠. 공연 종류나 예술단만 봐도 축제, 자체 기획 공연, 자체 기획 전시, 자체 아카데미 프로그램까지… 생산 라인만 열 개가 넘어요. 이 중 일부는 충돌하거나 하나로 모아질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변수를 산수로 푼다면 이건 10차 방정식인데. 그걸 좀 더 가능한 방정식으로 바꾸고 해결 방안을 찾는 과정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어요.”
그와의 이야기는 시대에 따른 극장의 변화 양상으로 이어졌다. 세종문화회관은 1961년 11월 ‘시민회관’으로 개관해 당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건축물로, 1972년 12월 화재로 전소될 때까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지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불이 난 자리에 1978년 4월 재개관한 극장은 오늘날의 이름으로 명명되기 시작한다. 이후 20여 년 간 한국 공연예술을 세계에 알리고, 해외의 공연예술을 만날 수 있는 독보적 공간으로 그 명성을 이어왔다. 1999년 서울시 직영 체제에서 재단법인으로 바뀌고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별도 법인으로 둥지를 떠났지만, 현재 세종에는 여전히 9개의 예술단이 소속되어 있다.
“1990년대 중·후반 우리 공연 시장이 폭발했어요. 여기에 2000년대 초 LG아트센터가 생기면서 극장 간 경쟁에 가속도가 붙었죠. 세종문화회관이나 국립극장은 자체적으로 예술 역량을 지니고 있어 그것을 중심으로 프로그래밍 하는 프로듀싱 시어터입니다. 물론 전형적 모델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로열 오페라하우스와 비교하면 변형된 형태죠. 세종문화회관과 국립극장은 매우 한국적인 프로듀싱 시어터입니다. 이런 모델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특히 세종문화회관처럼 국악관현악단과 극단, 오페라단이 전속 단체이자 한 식구인 공연장은 찾아볼 수 없어요.”
한 지붕 아홉 가족을 모으는 시즌제
각기 다른 장르의 9개 소속 예술단(국악관현악단·무용단·합창단·뮤지컬단·극단·오페라단·유스오케스트라단·소년소녀합창단·청소년국악단)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2016년부터 시작되는 시즌제로 이어졌다. 지난봄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이승엽 사장은 ‘세종 시즌제’ 도입을 밝혔다. 1년 단위로 전체 프로그램을 미리 확정해 공개하는 이 시즌제를 두고 또 다른 프로듀싱 시어터인 국립극장이 2012년부터 안호상 극장장의 지휘로 시작해 호평 속에 순항하고 있기에, 후발 주자인 세종문화회관의 차별성에 이목이 집중되는 터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즌제는 내용뿐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TF를 조직해 단체별 대표와 기획, 홍보와 마케팅, 전시, 고객 관리 등을 맡은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예술단마다 이중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종문화회관 소속, 다른 하나는 분야와 장르에 대한 개성. 서로 대화하지 않으면 후자의 정체성이 강해집니다. 사장으로서 각 예술단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만, 옆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선 모든 단체가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눠야 하죠. 정보를 교류하고 밸런스를 맞춰주는 것이 시즌제의 형식적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종문화회관의 시즌제는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가 한 텀이다. 기존에 이어지던 소속 예술단의 창작 작품 외에도 계절과 콘셉트에 따른 공연들이 소개된다. 야외 공연이나 전시도 이러한 기획에 포함되어, 극장의 정체성이 좀 더 유기적으로 드러날 전망이다.
공공 극장의 숙제 중 하나인 재정 자립도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승엽 사장은 세종문화회관의 재정 구조가 상당히 완고한 편이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극장에 필요한 출연금은 심의를 거쳐서 받는 데다 임대사업이나 공연 티켓 판매로 얻는 수입은 전체의 35% 정도여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수익 구조의 변화는 어렵다는 것.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자연스레 기업 스폰서십이 대두됐다. 더구나 새로운 시즌제 정착을 위해선 기업을 통한 재원 조성은 필수고, 2017년 4월 개관을 목표로 하는 블랙박스 극장도 타이틀 스폰서 확보가 필요하다. 네이밍뿐 아니라 극장 내 화장실 파우더룸 공간을 화장품 기업과 연계하거나, 귀빈실 중 일부를 기업에 내어준다거나… 실현 가능한 여러 방안이 그의 입에서 이어졌다. 이를 위해 지난 11월 초, 세종문화회관은 기업을 대상으로 스폰서십 설명회를 가졌다. 시즌 전체를 후원하는 것부터 공간 네이밍까지 다양한 방법론이 제시됐지만 시즌 전체를 후원한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까닭인지, 12월 중순까지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기업이 없다고 한다.
▲ 이승엽
1961년생.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석사 졸업, 프랑스 부르고뉴대학 문화정책과 예술행정 고급전문학위(DESS) 취득, 예술의전당 공연운영부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하이서울페스티벌 총기획,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 외
극장을 극장답게, 예술적인 명성의 회복
인터뷰를 앞둔 12월 초, 이승엽 사장의 온라인 SNS에는 세종문화회관의 관객 이벤트 내용이 올랐다. 2015년 최고의 공연을 꼽는 이벤트 1등 상품이 2016 시즌 패키지라는 정보와 함께 ‘이 정도면 극장 살림 형편에 무리한 것’이라며 참여와 독려를 바라는 유쾌함을 남겼다. 그런데 이 게시물에 달린 한 댓글이 내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세종문화회관이 서울시를 대표하는 공연장다운 위상을 확립하면 이런 경품 행사는 필요 없다고 봅니다. 극장이 제대로 극장답게 운영해서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게 최고 아닐까요? 아직은 이런 미끼가 필요한 것 같아 씁쓸하네요.’
그 댓글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개관 후 40년이 흐르는 동안 극장을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 달라졌다. 여전히 가진 것이 많은 세종문화회관이지만, 과거 대한민국 최고 공연장으로 빛나던 위상은 이제 빛바랜 추억 같은 아련한 느낌이다.
‘극장답게’. 공연을 생산하는 극장은 결국 예술성 높은 공연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하지만 극장의 경쟁 상대가 스마트폰이 되어버린 시대에 극장은 이런 ‘경품 행사’ 같은 것도 해야 한다. 아니, 할 수밖에 없다. 한번 침제를 겪은 그룹이 다시 도약하려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과 재원이 투여돼야 한다.
이승엽 사장은 2016년 세종문화회관의 미션으로 ‘예술적 명성의 회복’을 꼽았다. 공연예술 생태계에서 상위 포식자에 해당하는 극장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완성도 있는 예술’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공연을 통해 극장의 브랜드가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그렇기에 보수적일지라도 검증된, 안정적인 프로그래밍이 앞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조율해나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조직의 안정화가 지속될 수 있는 내부 시스템을 구축해나가는 것도 장기적 안목에서 필요한 일이다.
덧붙여 감동적인 공연은 무대조명 아래에서만 유효하지 않다. 공연을 고르고, 표를 예매하고 공연장에 입장하는 시간들, 관람 후 집으로 돌아가 그 극장을 다시 찾기까지 모든 과정을 세종문화회관이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바란다.
사진 필주(Purple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