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홀 예술감독 클라이브 길린슨

125년간 지켜온 전통과 자부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월 1일 12:00 오전

개관 125주년 맞은 뉴욕 카네기홀. 그들이 말하는 역사와 유산, 미래와 사명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기부로 뉴욕 한복판에 세워진 카네기홀이 125주년을 맞았다. 1891년 당시 유럽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던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차이콥스키를 초청한 개관 음악회를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카네기홀을 거쳐 간 음악가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드보르자크·말러·버르토크 그리고 거슈윈 같은 클래식 음악가뿐 아니라 베니 굿맨이나 비틀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음악가가 이곳을 거쳐 갔다.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1950년대 링컨센터 건립 계획이 발표되자 당시 매년 100회가 넘는 연주를 해오던 카네기홀의 최대 고객 뉴욕 필하모닉이 이주를 결정했고, 카네기홀은 퇴물이 될 상황을 맞은 것이다. 폐쇄 직전까지 내몰리던 홀의 운명은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이 주도하는 구명 운동을 통해 되살아났다. 뉴욕 시는 부동산업자의 손에 전전하던 카네기홀을 매입했고, 곧이어 비영리단체로 탈바꿈하는 전기를 맞이한다.

1976년, 카네기홀 85주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갈라 콘서트는 당대 최고 아티스트들이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당시 카네기홀의 회장이던 아이작 스턴의 주도로 시작한 이 콘서트는 호로비츠·로스트로포비치·메뉴인·디스카우·번스타인 같은 드림팀이 출연하는 전통의 시발점이 되었고, 그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몇 차례 보수 공사를 통해 아름다움과 더불어 최고의 음향으로, 음악가들의 최종 종착지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한국에서 7000마일 떨어진 뉴욕 한 콘서트홀의 125년을 주목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카네기홀의 수장 클라이브 길린슨(Clive Gillinson)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맨해튼 집무실을 찾았다.

 

런던 심포니의 첼로 단원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직업을 바꾼 계기가 궁금합니다.

언젠가 예술 경영을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런던 심포니에 있을 때 오케스트라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고, 당시 매니저가 악단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새로운 매니저를 영입하려 했지만 파산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감수하고 악단을 살릴 적임자를 찾지 못했지요. 어쩔 수 없이 3개월간 제가 시한부 매니저가 되었고, 3개월이 지나자 오케스트라에서는 제게 매니저 자리를 정식으로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확신이 없어 요청을 고사했어요. 이후 첼리스트로 일하면서 악단의 살림을 도왔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런던 심포니는 제게 다시 한 번 매니저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고,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매니저로 정식 취임했습니다. 21년을 런던 심포니와 함께했고, 2005년에 카네기홀로 옮겼습니다.

카네기홀이 125주년을 맞았습니다. 125라는 숫자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념이 되는 특별한 순간을 맞는다는 것은 ‘기회’입니다.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들을 이루어왔는지 알 수 있고, 또 앞으로 갈 길을 조망해볼 수도 있으니까요. 지난 125년 동안 카네기홀은 놀라운 예술적 유산을 남기며 사회에 공헌해왔다고 자부합니다.

특별한 시즌인 만큼 흥미로운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125 위촉 프로젝트’라는 주제가 가장 눈에 띕니다.

2020년까지 다양한 세대의 작곡가들에게 총 125개 작품을 위촉하는 방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소 125개이며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이 프로젝트는 클래식 음악의 미래를 점치는 일종의 시도입니다. 중요한 축은 현대음악으로 명성 있는 크로노스 현악 4중주단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한 50’이라는 제목으로 매년 10개씩 5년간, 남성 작곡가 25명, 여성 작곡가 25명의 총 50개 작품을 저희와 크로노스 현악 4중주단이 공동 위촉하고, 이 작품들을 카네기홀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초연할 예정입니다. 이외에 작곡가 마그누스 린드베르그·존 애덤스·탄둔·브래드 멜다우·에런 커니스·캐럴라인 쇼를 포함한 다양한 작곡가가 선보이는 36곡의 새로운 작품도 소개됩니다.


▲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를 선보인 래틀/베를린 필

최근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초청해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를 선보인 것도 125주년을 기념하여 성사된 것이라 들었습니다.

래틀은 이번 시즌과 다음 시즌 동안 카네기홀에 상주하며 음악회를 엽니다. 5일 동안 열린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회는 그야말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연주자와 관객이 혼연일체가 된 음악회에서 큰 에너지와 감격을 느꼈습니다. 래틀이 이야기했듯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마주하면 그 정상에서 낭만파 시대를 직시할 수 있습니다. 이후 150년간 음악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밑그림을 볼 수 있기에 정통성을 지닌 베를린 필과의 만남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관점: 예브게니 키신’의 기획 의도는 무엇인가요?

올해는 키신의 카네기홀 데뷔 25주년이기도 합니다. 1990년 당시 카네기홀 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키신의 리사이틀 실황이 음반으로 출반되어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 키신은 우리 시대의 존경받는 아티스트로 뉴욕의 청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키신은 뉴욕 필(앨런 길버트 지휘)과 메트 오케스트라(제임스 러바인 지휘)의 협연, 실내악 연주회(펄먼·마이스키)와 두 번의 독주회까지 총 6회의 기획 연주회를 갖습니다.


▲ 젊음과 패기를 보여주는 밝은 의상의 NYO-USA(위)
앙상블 ACJW의 교육 현장(아래)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카네기홀과 줄리아드 음악원이 주축인 앙상블 ACJW는 2007년부터 이어져오고 있죠. 한국에는 없는 독특한 형식의 단체인데요.

ACJW는 카네기홀(C), 줄리아드 음악원(J), 와일 음악 연구 기관(W), 그리고 뉴욕 시의 교육부와 파트너 관계로 운영되는 단체입니다. 음대를 졸업한 유망한 연주자들을 선발해 다양한 형태의 연주 기회를 제공하고, 뉴욕 인근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교육 기회를 2년간 제공하는 펠로우십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처음 카네기홀에 왔을 당시 매년 1만5000명의 음악 전공자가 배출되는 반면, 오케스트라에는 150개의 자리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을 위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앙상블 ACJW라는 새로운 모델을 통해 젊은 음악가들이 커뮤니티를 이루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죠. 한국인 연주자 중 플루티스트 손유빈은 앙상블 ACJW를 거쳐 현재 뉴욕 필의 단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특정 국가나 도시의 문화를 집중 조명하는 페스티벌 또한 매년 개최하는데요. 한국 문화나 음악가들을 소개할 계획은 없나요?

2007년 독일의 베를린을 조명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작곡가 번스타인의 음악을 중심으로 미국 음악의 역사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이후 중국(2009), 일본(2010/2011), 라틴아메리카(2012)를 거쳐 오스트리아의 빈(2013/2014)과 남아프리카(2014)의 문화를 소개했죠. 뉴욕은 다양한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니 이러한 페스티벌을 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최근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다시 한 번 느꼈지만, 한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국가의 크기나 인구수에 비해 뛰어난 예술적 재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최근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쇼팽 콩쿠르라는 최고 명성을 지닌 대회의 우승자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세한 내용을 곧 발표하겠지만, 한국 음악가들을 카네기홀에 초청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아티스트들은 세계 클래식 음악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 우리 시대의 커다란 자산입니다.

 

카네기홀 125주년을 맞이하며 안네 조피 무터는 카라얀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카네기홀과 똑같이 생긴 홀을 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공간이 살아낸 역사는 흉내 낼 수 없다. 카네기홀은 인류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선물해오고 있다. 이곳은 나에게도 매우 특별한 곳인데, 아티스트로서 나를 만들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최고 무대를 만들어야 하는, 최선의 내가 있도록 하는 신비스러운 공간이다.”

카네기홀이 걸어온 길은 우리가 곧 직면하게 될 미래의 단면이다. 앤드루 카네기와 아이작 스턴 같은 개척자들과 수많은 스태프의 땀방울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눈물을 선사했다. 최고의 무대를 지켜내려는 치열함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고, 그 공간은 청중의 갈채와 환호로 매 순간 다시 태어났다. 125번째 생일을 맞은 카네기홀에 박수를 보낸다.

사진 Carnegie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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