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피어난 노래하는 꽃 한 송이. 그 향기는 이제 유럽의 유명 극장을 채우고 있고, 한국에서 키운 그 꽃대의 뿌리는 한양대학교에 든든히 내렸다. 꽃대가 움틀거리는 입춘(立春)의 2월. 오페라의 인물들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녀’들의 삶을 살아내며 노래하는 김지현, 아니 캐슬린 김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피어난 노래하는 꽃 한 송이. 그 향기는 이제 유럽의 유명 극장을 채우고 있고, 한국에서 키운 그 꽃대의 뿌리는 한양대학교에 든든히 내렸다. 꽃대가 움틀거리는 입춘(立春)의 2월. 오페라의 인물들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녀’들의 삶을 살아내며 노래하는 김지현, 아니 캐슬린 김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200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 오페라)에 오른 ‘피가로의 결혼’. 소프라노 홍혜경이 알마비바 백작부인 역을 맡아 노래하고 있을 때, 옆에는 신예 소프라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조용히 쏘아 올려졌다. 극 중 바르바리나 역을 맡은 캐슬린 김이다. 당시 그녀가 부른 노래는 2분 남짓이었고, 악보로는 두 페이지 분량이었다. 캐슬린 김은 최선을 다했다.
캐슬린 김은 홍혜경(1984)·조수미(1989)·신영옥(1990)에 이어 메트 오페라에 네 번째로 오른 한국 성악가다. 메트 오페라는 입성도 어렵지만, ‘메트 간판스타’로 불려도 안정적인 전속 가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다음 시즌까지 출연을 보장받기란 쉽지 않다. 그런 곳에서 캐슬린 김은 ‘호프만의 이야기’의 자동인형 역인 올림피아로,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의 희극배우 체르비네타로, ‘가면무도회’에선 궁정의 어릿광대인 시동 오스카 역으로 활약했다. 제임스 러바인·키릴 페트렌코·잔안드레아 노세다·파비오 루이지가 지휘를 맡은 공연들이었다. 존 애덤스가 작곡한 ‘닉슨 인 차이나’에선 마오의 부인 장칭 역을 맡았고, 이 역은 캐슬린 김의 전매특허로 자리 잡았다.
신호탄은 뉴욕이었지만, 그녀의 노래는 유럽 곳곳으로 퍼졌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선 밤의 여왕(‘마술피리’)으로, 글라인드 본 페스티벌에 오른 라벨의 ‘어린이와 마법’에선 배역 3개를 동시에 맡았다. 바르셀로나 리세우 오페라에 오른 ‘호프만의 이야기’에선 나탈리 드세와 함께했다. 캐슬린 김은 드세의 주배역인 올림피아 역을 맡았다. 힘껏 부르고 내려온 무대. 당시 안토니아 역을 맡은 드세가 말했다.
“이제 네게 올림피아를 넘겨도 되겠구나.”
하지만 2010년 정명훈/서울시향 공연을 계기로 한국을 다시 찾은 그녀의 활동은 간략하게만 보도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국립오페라단의 캐스팅에 기웃거려보기도 할 때, 가끔 정명훈과 말러 교향곡 2번(2014)과 8번(2011) 그리고 베토벤 ‘합창’(2013)에서, 호세 카레라스의 내한 공연(2014)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5년 11월, 금색의 노래를 수놓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금호아트홀에서 가곡을 부르며 눈물을 보여 그 속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고, 한양대에 부임했다는 소식으로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너무 먼, 너무 멀었던 당신… 이제 우리 곁에 다가왔군요.’
한양대 음악대학 내 교수 연구실. ‘캐슬린 김’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안의 절반을 차지한 그랜드피아노와 한강을 한눈에 담은 풍경이 인상적이다. 캐슬린 김은 목소리를 아꼈다. 입은 조금씩 열었다. 성악가와 마주하는 것은 연주자와 마주하는 것과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값진 악기와도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고 들었다.
“웬만하면 말을 잘 안 하려고 한다. 공연이 있는 날에도 말을 잘 안 하고 노래도 많이 안 한다. 그래서 공연 날의 리허설이 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럼 평소에도 지금처럼 목소리를 작고 낮게 하는가?
“때에 따라 다르다. 성대도 근육이다. 노래하는 근육이 더 발달해 말보다는 노래가 편하다. 그래서 인터뷰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한양대에선 레슨할 때 계속 말해야 한다. 조금씩 훈련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유가 생기면 즐기는 취미가 있나?
“공연 때문에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제대로 구경한 나라가 없다. 해외에서는 음식도 조심해서 재료를 사서 직접 해먹는다. 감기 걸리는 게 제일 걱정되어 집에서 인터넷과 책, 게임과 영화를 즐기는 편이다. 집순이다. 하하!”
김지현. 노래꽃과 마주한 소녀
본명은 김지현. ‘야! 일요일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던 어린 지현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MBC어린이합창단에 입단한다. 당시 어린이합창단은 어린 ‘끼’를 품고 기르던 곳이었다. 조수미와 신영옥은 리틀엔젤스, 홍혜경은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출신이다. 텔레비전을 보며 춤추고 노래하던 어린 지현은 이내 곧 텔레비전 안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상명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이후 예원학교에 들어갔다. 부모님이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나?
“전혀. 나는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무대 체질이었고, 튀는 아이였다. 그래서 안무 선생님이 예뻐했다. MBC어린이합창단 단원들이 당시 주로 예원학교에 진학했다. 부모님께 성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 반대는 안 하셨다. 합창단에서 배운 것도 도움이 되었다. 어린 나이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 운이 좋았던 거지. 다른 것을 생각할… 아니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예원학교의 교복을 입은 김지현은 조태희를 사사한다. 그녀는 서울대 재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소프라노로 1968년부터 한양대 교수로 재직했다. 김지현이 예원학교에 다닐 때는 지금과 달리 교수들의 교외 레슨이 허용되었다. 전문교육의 장으로 들어온 가장 어린싹과 큰 스승은 직결되었다. 김지현은 서울예고에 진학하여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까지 조태희에게서 배웠다. 현재 경기필하모닉의 성시연 예술단장은 그녀의 서울예고 동기다.
비교적 어릴 때부터 노래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셈이다. 성악은 변성기를 잘못 보내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은데.
“여자는 남자와 달리 확 바뀌고 하진 않는다. 노래가 쉽고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힘든 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감이 너무나 넘칠 때였다. ‘파바로티? 별거 없어!’라며. 뭘 모를 때였지. 그래서 미국에 갈 때, 잘되기 전까지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맨해튼 음대에 진학했다. 외국에서의 학창 시절은 어떠했나?
“부모님께선 묵묵히 도와주셨고, 나는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고, 안 하곤 못 배기는 스타일이었다. 한 길만 바라봤다. 그런데 뉴욕에 도착하니 못한 것도, 잘하는 것도 아니더라. 잘하는 학생들의 클래스에는 못 들어갔다.”
‘파바로티? 별거 없어!’ 하던 김지현은 어디 갔나?
“그렇게 되는 게 힘들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그렇다고 열심히 안 한 건 아니다. 언젠가는 되겠지… 라며 마음을 다독였다. 메트 오페라 공연에서 성악가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홍혜경 선생과 조수미 선생의 무대도 보았다. 그때 주가를 올리던 성악가가 나탈리 드세였다.”
‘나’를 노래해라. 그래야 한다
캐슬린 김은 2005년 시카고 리릭 오페라의 ‘영 아티스트’에 선발됐고, 요한 슈트라우스 ‘박쥐’에서 아델레 역으로 출연했다가 메트 오페라의 캐스팅 감독 눈에 띄었다. 그리고 오디션을 거쳐 2007년에 데뷔했다.
드디어 관문에 도달했다.
“메트 오페라는 콧대가 센 바닥이었다. 그 속의 나는 스타도 아니었고 아무도 날 몰랐다. 그저 조심할 수밖에. 지휘자나 연출가들도 나처럼 처음으로 데뷔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와 역량을 보여주는 사람들 아닌가. 메트 오페라는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스타들이 모인 곳이다. 그래서 스타들에게는 함부로 지시할 수 없어서 만만한 내가 늘 타깃이 되었다. 별의별 트집을 다 잡혔다.”
미국의 학창 시절부터 희로애락을 함께한 피아노를 한국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다고 들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구입한 것이다. 뉴욕, 시카고 그리고 결국 한국에까지 가져오게 됐다. 주위에서 가져가지 말라고 했는데, 마음이 아프더라. 지금까지 함께해왔는데.”
해외 유수의 오페라단 오디션이나 콩쿠르는 모두 ‘별’이 되기 위해 도전해야 하는 것들이다. 이를 계기로 성악가의 위치는 물론 노래와 오페라의 역사가 다시 쓰이기도 한다. 홍혜경·신영옥·조수미·임선혜·임세경·서선영·홍혜란·황수미… 이들 모두 여성 성악가의 역사를 다시 쓰는 중이다.
이들 중 친분 있는 성악가가 있는가?
“홍혜경 선생님은 자주 뵙는다. (임)선혜 씨는 잘 알고, (홍)혜란 씨는 ‘가면무도회’에서 나의 커버였다.
‘별’이 되기 위해 오페라 오디션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게 나은가, 아니면 콩쿠르에 도전하는 게 나은가?
“나는 미국 내 콩쿠르에서 수상한 경험은 있지만 유럽은 없다. 미국에 거주하다 보니 교통과 비용에 있어 유럽 콩쿠르에 참여하는 게 어렵더라. 커리어를 늦은 나이에 쌓기 시작한 편이라 나이 제한에도 걸렸고. 2015년 ‘가면무도회’ 공연차 브뤼셀 라 모네에 갔다가 극장 관계자들이 한국 성악가들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많은 이가 입상하고 있으니 화제는 화제였다.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자신만의 소리가 없다’는 지적을 하더라.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한국에선 어떻게 훈련하나 물어보기도 했다.”
그럼 어떤 걸 택해야 하나?
“콩쿠르는 젊은 날에 지나가야 할 관문이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다. 하지만 콘서트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것과 오페라 무대에서 연기하며 노래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입상 후 더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성악가에겐 자기 것을 만들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커리어가 중요하다. 미국과 유럽이 동양의 성악가를 채용하는데 그들을 설득할 만한 당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많은 학생이 콩쿠르 딱 하나만 생각하고 바라본다.”
해외 오페라단과 극장의 오디션에는 수많은 콩쿠르를 거친 이들도 많이 오지 않는가?
“한국 성악가들의 콩쿠르 입상은 평범한 뉴스가 되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차별성이 없다. 가진 소리라고 할까. 한국인은 타고난 소리가 좋다. 소리가 예쁘면 일단 빠져들 수밖에 없다. 콩쿠르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 데에도 이 점이 크게 작용한다. 대신 연기와 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건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나의 생각이다.”
그녀 안의 ‘나’를 찾고, 내 안의 ‘그녀’를 살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의 시에 김동진이 음표를 그려 넣은 가곡 ‘진달래꽃’이다. 캐슬린 김은 지난해 11월 26일 금호아트홀 리사이틀에서 이 노래를 부르던 중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가사에서, 눈물을 머금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나?
“한국 가곡은 많이 불러보지 않았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루치아 역을 할 때도 눈물을 글썽거린 적은 있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가사가 너무 아름다웠다. 지나온 내 인생이 떠오르고 만감이 교차되더라.”
가사란 그 노래에 빠져들기 위한 주문과 같다. 가사를 통해 작품 속 배역들의 인생을 읽고, 자신의 노래를 위해 그 인생을 제 몸에 새긴다. 그녀가 부른 캐릭터의 작품들은 헨델부터 생존하는 존 애덤스까지 다양하다.
자동인형 올림피아(‘호프만의 이야기’), 희극배우 체르비네타(‘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궁정의 어릿광대 오스카(‘가면무도회’), 마오의 부인 장칭(‘닉슨 인 차이나’), 밤의 여왕(‘마술피리’), 여왕이자 마술사인 아르미다(‘리날도’), 마법을 사용하여 사랑을 얻고자 하는 멜리사(‘가울라의 아마디지’), 권력자들의 사랑을 이용하는 포페아(‘아그리피나’), 신데렐라의 사랑을 돕는 요정(‘상드리용’) 등은 캐슬린 김이 닮고자 한 존재들이며, 그 안에서 간혹 자신과 닮은 존재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오페라의 인물이란 단순히 ‘연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 진실되게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캐릭터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하는가?
“노래를 하기 전에 가사를 읽고 그 내용을 다 알아야 한다. 사실 특별한 오페라라고 하지만 그 가사와 내용은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흔한 감정과 비슷하다. 사랑과 미움. 오페라가 다 그렇지 않나. 가사에 대한 이해와 몸에 배었던 감정이 만나게 한다.”
잘 맞았던 캐릭터는 무엇인가?
“루치아(‘람메르무어의 루치아’)나 체르비네타(‘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체르비네타는… 사랑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에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여배우지만 ‘내가 웃고는 있지만 나 혼자 있을 때는 외롭다’라는 식의 말도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랑에 관한 가사들을 담았는데, 다 맞는 말 같더라. 때로는 나의 마음이나 상황과 비슷하기도 했고. 노래는 물론 캐릭터 표현도 어렵다.
두 번 다시 하기 싫은 캐릭터도 있나?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기보다 이제는 그만했으면 하는 것. 올림피아(‘호프만의 이야기’)다. 연출가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론 아무런 감정 없이 인형처럼 해야 한다.”
팬들은 올림피아 역으로 캐슬린 김을 많이 기억하는데.
“그렇다. 사실 주어지는 역할 하나하나가 다 재밌지만 그만하고 싶기도 하다. 밤의 여왕(‘마술피리’) 역도.”
그녀의 작은 체구와 톡톡 튀는 스타일은 연출가들이 실험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캐슬린 김이 섰던 무대는 빙빙 돌거나, 미끄럽거나, 흔들렸다. 2013년 바르셀로나 리세우 극장에 오른 ‘호프만의 이야기’에선 곡예 같은 연출을 감당해야 했다. 360도 회전하는 기구에 타서 아무런 감정 없는 인형처럼 노래해야 했고, 2주간 배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노래해야 했다.
그녀가 한국으로 오는 다리에는 정명훈이 있었다. 2010년 서울시향과 함께한 공연은 캐슬린 김의 한국 데뷔와도 같았다. 이후 정명훈/서울시향과 말러 교향곡 8번(2011)과 2번 ‘부활’(2014), 베토벤 ‘합창’(2013)을 함께했다. 캐슬린 김은 정명훈에 대해 “편한 분은 아니었는데, 성악가들에게 잘 맞춰주려고 했던 분”이라고 했다.
해외 오페라 무대에서 많은 역할과 연출가들의 요구를 모두 소화했는데, 한국에서 오페라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아쉽다. 내 주특기는 오페라다. 콘서트는 그때 ‘반짝’할 뿐이다. 연기와 나의 매력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은데, 오페라 무대에선 그런 기회가 없었다. 몇 년 전 한국의 오페라단에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베르디 ‘팔스타프’의 나네타 역이었다. 하지만 내 자신을 보여주기에는 적당하지도 않았고 비중도 작았다. 심사숙고 끝에 못한다고 했다.”
국내 무대에 오른다면 어떤 역을 택하겠는가?
“당연히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어야지. 루치아(‘람메르무어의 루치아’)나 질다(‘리골레토’)다. 체르비네타(‘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도 좋고… 벨리니의 작품도 좋다.
출연했던 공연이나 녹음을 모니터하나?
“전혀. 부끄럽다. 하하. 신문이든 텔레비전이든 갓 나와 따끈할 땐 절대 안 본다. 주위 사람들이 ‘괜찮네!’라는 반응을 보여야 그제야 들춰본다.”
“인터뷰가 ‘객석’ 2월호에 실리니 2017년 2월에 보겠다”는 농담을 던지니, 캐슬린 김이 크게 웃는다.
미래. 제2의 캐슬린 김을 기다린다
캐슬린 김은 2015년 2학기가 시작되기 2주 전 한양대학교 발령을 받았다. 세 명의 학생이 첫 제자가 되었다. 연구실 한구석에서 은은한 향을 내뿜고 있는 작은 화분에는 ‘한양대 첫 제자 일동. 교수님 환영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올해는 대학원에서 오라토리오와 오페라를 강의하고, 나머지 시간은 개인 지도다. 노래를 부르며, 노래와 함께하는 것이지만 캐슬린 김은 강단에 서는 것에 대해 “다른 분야의 사회생활”이라고 표현할 만큼 그녀에게 이 안에서의 일들과 공간은 아직 낯설고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한양대에 부임했을 때 학생들이 ‘메트 오페라의 캐슬린 김’에 대해 잘 알고 있던가? 성악과의 짓궂은 남학생들이 ‘실물이 더 미인이시네요’라는 농담도 던졌을 법한데.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하하! 실물이 더 미인이라기보다 훨씬 낫다고.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나의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 동료 교수들은 나를 ‘캐샘’이라 부른다. 익숙해져 이제는 정겹다. ‘캐스’라는 말도 있다. ‘캐슬린 김의 마스터클래스’라는 뜻이다. 학생들이 주로 그렇게 부른다.”
어떤 계기로 한양대에 오게 되었나?
“한국에 들어오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한국에 공연이 잡히며 오고 가니 한국이 좋아지더라. 사실 몇 년 전에도 교수 제의가 들어왔다. 그땐 정중히 거절했다. 가르치고 말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2014년에 미국에서 한양대 교수를 우연히 만났고, 신임 교수를 물색한다며 내게 제안해왔다. 그의 동료 교수들도 나의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니 마음이 조금 생겼다. 우스갯소리로 교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라고 하지 않나.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고, 예원학교 시절에 나를 가르치시던 조태희 선생님이 한양대에 계셨다는 생각이 들어 ‘아… 이곳에서 또 이렇게 인연이 닿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을 맺는 건 하늘이 하는 일 아닌가. 오래전 퇴임하셨으니 나의 임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메트 오페라의 첫 데뷔와 강단에 처음 섰을 때의 기분을 비교한다면?
“비교가 안 된다. 하하!”
한 학기 동안 수업해보니 어떤 생각이 들었나? 메트 오페라에서 활동하며 연세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홍혜경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 학생들은 열 명에 일곱 명은 목이 쉬어 있다. 레슨을 받으러 오는 아이들은 푸치니, 베르디처럼 무거운 작품만 들고 온다. 우리는 이탈리아인처럼 심장이 너무 뜨겁다. 바로크나 고전파 음악부터 차근차근 접근해야 하는데 너무 앞서나간다’라고.
“정말 맞는 말씀이다. 학생들이 나이에 맞지 않는 곡들을 가져온다. 가사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잘 모른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모차르트의 쉬운 아리아부터 시작했다. 이곳에서 만난 학생들은 내가 고른 학생들이 아니라 교수들이 추천해준 학생들이다. 기성 성악가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니, 너무 목을 잡고 부르더라. 그런데 한 학기를 지나고 나니 많이 늘었다.”
만약 재능 있는 학생이 그만두겠다고 한다고 하자. 교수로서 어떤 격려의 말을 건넬 것인가.
“재능만 갖고는 안 되는 게 노래다. 끈기… 노력… (재력은?) 그것은 있으면 좋지만 그다지 크게… 암튼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단지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그만두지 말라는 말은 안 할 거다. 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이니 내가 책임을 졌다. 무엇을 하든 꽂히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해야 하는 성격이니.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봐라. 그래야 포기했을 때 후회도 없다’라고.”
좀 안 좋게 말하면 미련한 건데….
“맞다. 미련한 거다. 어쩌면 그 미련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미련… 그렇다고 이 기사의 제목을 ‘미련한 소프라노 캐슬린 김’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미련해서 손해를 많이 본다. ‘아니다’ 하고 마음을 접을 때, 또다시 ‘아니다’를 외친다. 해볼 수 있었는데… 라며. 이러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미련을 못 버린다. 미련했기 때문이다.”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해보고 싶은 게 있는가?
“유럽으로 이사를 가겠지. 주어진 시간은 금과 같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고 싶다. 뭐든 많이 접하고 해보는 이유는 다 내 노래를 위해서다. 경험이 쌓이면 표현으로 넘어온다. 유럽에서 공부를 더 했으면 그들의 언어를 하나라도 더 배웠을 것이다. 오페라는 그 나라의 문화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화를 경험하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던 것들이 이제는 많이 편해졌다. 목소리는 100년 가는 게 아니기에 지금까지 못한 것을 찾아야 하고,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이끄는 게 중요하다.”
캐슬린 김은 올해 메트 오페라에서 블론데(‘후궁탈출’) 역으로, 팜비치 오페라에서 체르비네타(‘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역으로, 그리고 글라인드 본 페스티벌에서 티타니아(‘한 여름밤의 꿈’)가 되어 노래한다. 긴 인터뷰 동안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미련’하게도 ‘미련’을 못 버렸던 소프라노. ‘아니다’라며 하던 것을 접으려고 할 때, 다시 ‘아니다’라며 접던 판을 열고 그 안에서 노래로 제 자신을 완성시킨 캐슬린 김.
입춘(立春)의 2월이다. 그간 닫아둔 꿈을 향하여 다시 ‘미련’을 가져보고, ‘아니다’라며 접으려면 꿈을 다시 열어보자. 세상을 울리는 캐슬린의 노래는 결국 그렇게 피어났더라.
진행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사진 박용빈
헤어·메이크업 손유정·서영화(CARA′di)
장소협찬 마젠타(www.imagent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