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오페라를 향한 질문

송현민의 CULTURE COD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2월 1일 12:00 오전

창작 오페라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오페라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창작 오페라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오페라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창작 오페라 | 예술 작품을 독창적으로 지어내는 것을 일컫는 행위인 ‘창작’과 음악을 중심으로 한 종합무대예술인 ‘오페라’의 합성어

메타 오페라 | 메타 비평의 원리를 응용한 오페라. 메타 비평은 비평 행위 시 사용하는 용어, 논리, 원리, 구조 따위를 대상으로 삼은 비평으로 ‘비평에 대한 비평’으로 통용됨. 따라서 오페라에 사용되는 음악, 언어 등과 같은 구성 원리에 대해 오페라를 통해 묻는 ‘오페라에 대한 오페라’

19세기는 확실히 오페라의 세기였다. 오늘날의 공연 목록을 쭉 훑어보기만 해도 이러한 주장은 곧 확인된다. 지금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대다수 작품 중 베르디, 바그너는 19세기의 오페라 영웅이었으며, 18세기를 살았던 모차르트의 작품만이 유일하게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오페라의 정점에서 나온 분파들은 부분적으로는 20세기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그들의 뒤를 이어 R. 슈트라우스, 프란츠 슈레커, 에리히 코른골트, 한스 피츠너 등이 오페라를 작곡했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과 영향력은 19세기와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슈레커는 살아생전 인기와 명성을 누렸고 그의 작품은 자주 공연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잊혔다.

위에서 언급한 작곡가 중에서 R. 슈트라우스만이 유일하게 오늘날의 공연 목록에서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엄밀하게 보면 ‘장미의 기사’ 단 한 편만이 그러한 성공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살로메’ ‘엘렉트라’ ‘아라벨라’ 등은 제한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실정이다.

20세기 현대 오페라는 망했다?

오페라를 중심으로 20세기를 살펴보면 갖가지 다양성을 지닌 새로운 작품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조음악, 12음 기법, 음렬음악, 우연성 등을 거쳐 전자음악에 이르는 모든 경향은 물론, 의고주의까지 작품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 경향이 반영되었다. 브리튼은 일본의 전통공연예술의 일종인 노(能)의 요소를 끌어와 우화 성격의 ‘컬류 강’을, 텔레비전을 위한 오페라로 ‘오원 윈그레이브’를 작곡했다. ‘종합예술’인 오페라는 급속도로 발전한 영화나 뮤지컬과 이종교배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실험도 ‘종합’적이었다. 작곡가들의 ‘실험’은 작품을 넘어 성악가, 연주자, 무대 스태프 등의 인내력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20세기 오페라는 작곡가·연주가·관중의 스트레스 전성시대였다. 19세기 작품이 20세기에 살아남은 것도 이러한 이유 중 하나다.

1950년부터 1973년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을 지낸 루돌프 빙(Rudolf Bing)은 회고록 ‘오페라의 5000일 밤(5000 NIGHTS AT THE OPERA)’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젠가는 오페라의 새로운 천재가 등장할 것이고,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극장으로 몰려들 것이다. 만일 그가 나타난다면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즉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천재는 없었기 때문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동시대 작품을 공연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빙의 회고처럼 20세기의 오페라 창작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다시 회고록 일부를 보자.

‘함부르크에 있는 한 동료는 현대 오페라를 차례로 무대에 올렸고 언론은 앞을 다투어 그를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늘 텅텅 빈 극장에서 공연을 했고 국가가 그 비용을 지불했다.’

비록 많은 작곡가와 이론가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개별적인 오페라의 성공과 생명력은 최종적으로 관객이 결정한다. 관객이 없는 극장은 죽은 극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오페라의 실험이 강행되는 한편, 19세기의 오페라가 문학, 연극, 미술, 영화 등을 자양분 삼아 제 몸을 키운 것처럼 20세기의 팝과 뮤지컬은 오페라를 통해 진화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팝페라’다. 팝과 오페라의 합성어인 팝페라는 1980년대 유행한 크로스오버 붐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났고, 클래식의 엄격함을 벗어던지고 자유분방하게 노래한다는 점이 대중에게 크게 부각되면서 인기를 얻었다. 뮤지컬과 오페라를 혼합한 ‘뮤페라’도 마찬가지다. 두 장르의 이종교배로 태어난 사생아 같지만, 뮤페라는 2002년에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정식 용어로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제는 정식 장르로 안착했다. 팝페라와 뮤페라는 대중예술의 외투를 걸치고 있지만, 사실상 오페라 형식을 제 몸 깊숙이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록오페라’도 있다. 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의 작가이자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는 이인성은 아리아와 노래들이 묶여 유기적 작품을 일군 오페라의 형식을 차용한 록오페라에 대하여 ‘일종의 콘셉트로 묶인 노래들은 잘 짜여진 시집의 시들과 같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식물성의 저항’ 참조).

‘밀도 깊은 연작시들이 그 명확한 예일 텐데, 그것들은 뭔가 이야기로 얽힐 듯하면서도 이야기를 감추고-또는 버리고-어느 순간들을 피워 올리며, 그 순간과 순간의 사이를 꽉 찬 여백으로 잇는다.’

록오페라에 대한 탁월한 문학적 비유다. 하지만 록오페라는 상반된 장르인 록과 오페라를 이접해놓은 것 같아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21세기 서울의 오페라 창작기지, 세종카메라타


▲ 왼쪽부터 세종카메라타의 최우정·최명훈(작곡)과 고연옥·박춘근(극작)

서울시오페라단(예술감독 이건용)의 세종카메라타는 작곡가와 극작가를 인큐베이팅하여 창작 오페라를 내놓고 있다. 작곡가 최우정·신동일·임준희·황호준과 극작가 고재귀·고연옥·박춘근·배삼식이 2013년에 4편의 창작 오페라를 리딩 공연(2013년 11월 20~23일, 세종 체임버홀)으로 선보였고, 그중 선정된 최우정·고연옥의 ‘달이 물로 걸어오듯’(2014년 11월 20~23일, 세종 M씨어터)은 수정 및 확장 작업을 거쳐 같은 해 초연으로 선보이며 수작(秀作)으로 인정받았다(연출 사이토 리에코, 지휘 윤호근).

이듬해, 작곡가 최명훈·신동일·임준희와 극작가 박춘근·고재귀가 세종카메라타를 통하여 리딩 공연(2015년 4월 21~25일, 세종 체임버홀)을 가졌고, 이 가운데 최명훈·박춘근의 ‘열여섯 번의 안녕’이 선정되어 수정을 거쳐 초연을 앞두고 있다(2월 26~27일, 세종M씨어터. 연출 정선영, 지휘 홍주헌). 이와 함께 ‘달이 물로 걸어오듯’도 다시 오를 예정이다(2월 19~21일, 세종M씨어터). 세종카메라타는 국내 창작 오페라에서 고질적인 문제였던 음악과 언어의 이음새를 위한 연구는 물론 제작 → 리딩 공연 → 수정 → 초연 → 재연 과정을 통해 국내의 오페라 창작 방식을 새롭게 다지는 전초기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19세기의 오페라는 문학을 흡수하며 발전했다. 그래서 19세기의 오페라는 ‘문학 오페라’[Literaturoper(독), Literature Opera(영)]로도 통용된다. 문학 오페라는 오페라의 한 ‘장르’라고 보기는 어렵고 오페라의 한 ‘형식’이라고 보면 된다. 베르디는 문학작품을 토대로 오페라를 완성한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다. 셰익스피어와 실러의 드라마, 뒤마의 소설 등을 연료 삼아 강력한 화력을 내뿜었다. 이러한 전통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 베르크 ‘보체크’와 ‘룰루’, R. 슈트라우스 ‘살로메’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19세기 유럽의 문학 오페라처럼, 21세기 서울의 세종카메라타가 내놓은 창작 오페라들은 연극을 토대로 한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래서 ‘연극 오페라’라고 부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물론 정식 용어는 아니다). 문학 오페라도 연극 대본을 토대로 했기에 연극 오페라와 무엇이 다르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 문학 오페라는 소설을 연극(희곡)으로, 다시 연극을 리브레토(대본)로 만들어 작곡한 것이다. 하지만 세종카메라타의 창작 오페라는 애초부터 연극(희곡)을 토대로 태어난 작품들을 기초로 삼았다. 극작가 박춘근은 ‘열여섯 번의 안녕’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물리적인 양은 대폭 줄여가면서, 최명훈 작곡가와 함께 음악적 언어로 채워야 할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연극의 말들은 음가(音價)가 오페라보다 다소 얕을 뿐, 기본적으로 음악적 요소가 있다. 그런 요소는 넓히고 동시에 말은 줄여가는, ‘넓히면서 동시에 줄여야 하는 줄타기’라고 해야 할까? 대사로 이야기한 것들을 가사로 함축하면서, 전달해야 할 정보나 정서를 놓치지 않고, 그 무엇보다도 음악적 언어들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창작 오페라 ‘열여섯 번의 안녕’은 아내의 무덤을 찾은 남편의 이야기다. 그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아내에게 자신의 일상을 얘기하며 함께했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등장인물은 단 두 명. 남편과 아내뿐이다. 박춘근은 전작인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 작품의 리브레토를 썼다. 시(詩) 쓰기는 곧 ‘시적인 것’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던 황지우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박춘근은 말과 대사에서 ‘음악적인 것’ 혹은 ‘오페라적인 것’을 찾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열여섯 번의 안녕’을 내놓은 셈이다.

메타 오페라, 그리고 ‘오페라적인 것’이란?


▲ 2월 19~21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다시 선보이는 ‘달이 물로 걸어오듯’

‘오페라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21세기 창작 오페라의 생산 진영에서 중요한 화두다. 대개의 경우 오페라라고 하면 대극장, 잘빠진 아리아와 노래, 화려하고 커다란 무대를 곧잘 떠올린다. 오페라에 대한 선입견은 이처럼 획일화되어 있다. 세종카메라타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형식의 오페라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비평에 대한 비평을 의미하는 메타비평(metacriticism)처럼 ‘오페라에 대해 묻는 오페라’ 작업, 즉 메타오페라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장의 오페라 경영을 풍자하며 극장 자체를 극장화(무대화)하여 선보인 마우리치오 카겔이 1971년에 발표한 오페라 ‘국립극장(Staatshteater)’이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우정·고연옥의 ‘달이 물로 걸어오듯’의 대사와 음악은 ‘노래’라기보다는 ‘낭송’을 연상케 한다.

“오페라는 음악보다는 연극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달이 물로 걸어오듯’은 대사의 정확한 전달이 필수적인 작품이다. 오페라를 작곡할 때 가사에 음악을 붙이는 것보다는 작품 성격을 고려한 후, 반드시 붙여야 할 부분에만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최우정)

오페라 하면 주옥같은 아리아를 떠올리는 관객에게 ‘달이 물로 걸어오듯’은 노래다운 노래가 나오지 않는 오페라로 기억될 것이다. 이 작품은 마치 말하는 듯한 노래 스타일인 ‘슈프레히 슈티메(sprech stimme)’ 창법으로 불린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를 살짝 연상케 한다. 어쨌건 ‘달이 물로 걸어오듯’은 ‘오페라적인 것’에 대해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좋은 아리아와 노래가 나와야 오페라인가?

‘열여섯 번의 안녕’의 출연자는 단 두 명이다. 리딩 공연 때는 한 명의 성악가가 출연한 모노오페라라는 형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대본을 처음 접한 최명훈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대본을 처음 접하고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와 슈만의 ‘시인의 사랑’이 떠올랐다.”

수정을 거쳐 오르는 이번 초연에서는 두 명이 출연하는 ‘2인 오페라’ 형식이다. 오페라 하면 무대에 가득한 성악가들의 대열을 생각한다면, 이 형식은 낯설고 뭔가 헐거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달이 물로 걸어오듯’같이 이 작품 또한 ‘오페라적인 것’에 대해 묻는 것 같다. 많은 출연진과 연주자가 나와야 오페라인가?

한국 오페라 역사에서 20세기는 수용과 수입 그리고 이식의 시대였고, 창작 오페라에는 산고의 고통만 있었을 뿐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아이(작품)는 없다. 그래서 세종카메라타의 행보에 더욱더 눈길이 가는 것 같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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