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해 남편과 시아버지를 죽인 주인공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 우리 시대 여성의 권리를 대변하다
드미트리 체르냐코프(Demitri Tcherniakov)가 연출한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가 1월 23일~2월 6일 리옹 오페라 무대에 올랐다. 2008년 뒤셀도르프 도이치 오퍼에서 처음 공연한 이후 ‘체르냐코프의 대작’으로 불리던 이 작품은 올해 공동 제작으로 다시 한 번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제작에는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와 바르셀로나 리세우극장 그리고 리옹 오페라가 참여했다.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는 러시아의 두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알렉산드르 프레이스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므첸스크 구역의 레이디 맥베스’(1865)를 공동 각색한 작품이다. 타이틀은 투르게네프의 작품 ‘시그롭스키 구역의 햄릿’을 풍자했다.
1934년 레닌그라드 말리 오페라 극장(현 미하일롭스키 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1936년까지 200회가 넘는 공연을 했음에도 불구, 소련 당국의 혹평과 함께 공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자신의 주관과 감수성을 음악으로 표출한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적 이상이 소비에트 체제가 추구하는 ‘단순성’과 ‘현실주의’에 부딪힌 것이다.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는 “이해 불가능한 캐릭터를 설정했고, 대사가 지닌 자연적인 음향을 부정했다”는 죄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샀다.
그의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오른 것은 1962년. 노골적인 부분을 삭제한 후 주인공의 이름인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Katerina Ismailova)’라는 타이틀로 개작했다. 작품은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현실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타국에서의 공연도 허용됐다. 잊힌 원작은 1980년에 이르러 점차적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번 리옹 오페라 공연 또한 원전 스코어를 기준으로 삼았다.
고립된 심리를 묘사한 연출
필자가 무대를 찾은 날은 1월 31일, 공연 나흘 째였다. 극장 안은 젊은 연출가 드미트리 체르냐코프와 일본을 대표하는 지휘자 오노 가즈시 두 거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성악진의 컨디션은 충분히 이완돼 있었고 오케스트라는 쇼스타코비치의 스코어를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있었다. 오노 가즈시의 지휘가 비정상적으로 컸던 건지, 리옹 오페라의 홀이 작았던 건지, 사운드의 볼륨이 대단했다. 더 놀라운 것은 체르냐코프의 연출이었다. 그의 연출은 항상 찬반양론이 팽팽히 대립하는데, 이는 일련의 도발적인 스캔들로만 주목받는 연출과는 격이 다르다. 언론이 호기심에 이끌려 그의 공연을 찾는 이유도 여기 있다. 막이 오르자 체르냐코프는 기대에 화답하듯 혁신적인 무대장식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주인공의 남편 지노비가 무역상인 점에 착안해 무대를 거대한 무역회사처럼 연출했다.
무대 중앙, 통유리로 된 사무실에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비서들이 보인다. 청중석 오른쪽으로는 붉은 양탄자가 걸린 사각형 방이 있고, 왼쪽으로는 사무실이 늘어선 복도가 있다. 그 가운데 안전 조끼를 입고 번잡하게 오가는 인부, 인부를 유혹하는 비서, 구불거리는 복도를 분주히 오가는 넥타이 차림의 행정 책임자 등 무대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밀착된 공간에서 각 캐릭터가 연출하는 미묘한 심리 상태를 돋보이려는 체르냐코프의 의도를 읽고 있을 즈음 한 여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여자는 카테리나 역의 리투아니아 출신 소프라노 아우슈리네 스툰디테(Aušrinė Stundytė). 머리를 틀어 올리고 민속풍의 튜닉을 입은 그녀는 “잠을 잘 수 없다”며 부자인 지노비와 결혼한 지금보다 가난하던 과거가 더 행복했음을 노래한다. 스툰디테는 강렬한 눈빛과 마스크로 눈길을 끌었고, 카테리나의 좌절과 욕망을 자신의 음색과 음폭에 환상적으로 투사했다.
시아버지 보리스(베이스 블라디미르 오뇨벤코)는 카테리나에게 집 떠나는 지노비를 향해 무릎 꿇을 것을 강요한다. 카테리나의 굴욕과 좌절은 그녀가 넋을 잃은 채 청중을 응시하는 장면에서 이미 예측 가능했다. 선택의 자유도 없이 감금된 카테리나에게 사각 방은 감옥의 메타포였다. 이중적이고 변태적이며 고약한 짓만 일삼는 인물 사이에서 그녀는 심리적으로도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세르게이의 등장
‘14세 이하 관람 불가’라는 평을 내린 ‘르몽드’지의 기사처럼, 이번 작품은 유난히 섹스와 관련된 에로틱한 요소가 많다. 이는 특히 지노비 상점의 인부들이 비서를 집단 희롱하는 장면이나 카테리나를 은근히 탐내는 보리스의 대사에서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카테리나와 세르게이의 첫 만남 또한 그렇다.
비서와 세르게이가 상자를 들어 올리는 기계 위에서 에로틱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이를 제지하고자 카테리나가 등장한다. 세르게이는 카테리나를 성적으로 유혹하기 위해 힘 싸움을 제안하는데, 이것이 둘의 첫 만남이다. 카테리나는 상점 직원 중 자신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보여준 세르게이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세르게이 역의 영국 테너 존 대스잭(John Daszak)은 체격이 장대했다. 그의 품에 안긴 스툰디테는 틀어 올린 머리가 풀어질 정도로 세르게이에게 강렬히 저항하는 한편, 압도당하고 싶어 하는 야릇한 여성의 심리를 훌륭히 표현해냈다. 카테리나는 그 날 밤 자신을 찾아온 세르게이와 열정적인 정사를 벌인다. 서커스풍의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트롬본이 글리산도로 하강하는 유명한 패시지가 바로 이 장면에 등장한다.
사랑에 빠진 카테리나는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보리스와 남편 지노비를 살해하고 세르게이와의 결혼식을 준비한다. 3막에서 상점은 꽃과 비단 리본 장식, 케이크가 즐비한 결혼식장으로 변했고, 여성 직원들은 보라색과 코발트색 드레스를 입고 함께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
흰색 드레스와 하얀 정장 차림의 카테리나와 세르게이가 등장했다. 세르게이는 청중에게 등을 돌린 채 의자에 앉았다. 세르게이를 이 집의 주인으로 만들 것을 다짐한 카테리나는 저절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모든 직원들이 그에게 무릎 꿇을 것을 강요했다. 1막 초에서 보리스가 그녀에게 지노비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한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다. 이 연출의 디테일은 카테리나가 스스로 감옥, 즉 구속된 생활을 선택하고 있음을 은유하고 있다.
이때 마을 바보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들이 닥친다. “잔치에 먹을 것이 있을까?”라며 위협적인 시선을 보내는 경찰은 부패한 러시아 사회와 스탈린 시대 비밀경찰의 부조리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번 연출에서 정치적 메시지는 다소 빈약했다. 자신들의 죄가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두 사람과 대조적으로, 하객들은 기계적인 제스처로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살인자인 동시에 희생자인 카테리나
카테리나의 정체성을 환상적으로 승화시킨 것은 4막. 시간상으로는 짧았지만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 무대였다. 막이 오르자 사각형의 방이 더러운 벽과 오물이 가득 찬 변기가 보이는 감옥으로 변해있었다. 투명한 베일 뒤로 카테리나가 갇혀 있다. ‘사무실’이라는 호화로운 감옥에 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을씨년스런 분위기다. “행복과 영화를 맛본 후에 맞는 채찍은 고통스럽다”라는 카테리나의 아리아는 노스탤지어에 가득 차 있다. 청중은 이 시점에서 놀라운 사실 두 가지를 발견한다. 그녀가 한 번도 감옥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과 사실 세르게이는 카테리나의 사회적 신분을 이용했을 뿐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저속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감옥에 갇힌 세르게이는 카테리나를 힐책하며 여죄수 소네트카(메조소프라노 미하엘라 젤링거)와 격정적인 정사를 벌인다.
실제 대본상 4막은 하얀 설원의 러시아 평원을 배경으로 하지만, 체르냐코프는 이 공간을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작은 방으로 설정했다. 협소한 공간에서 포르노에 가까운 여죄수와 세르게이의 정사 장면을 직면해야 했던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괴로워하며 세면대에 머리를 담근 그녀 위로 세르게이와 사랑을 나눌 때 연주됐던 모티프가 흐른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극대화하는 순간이었다.
분노한 카테리나는 형광등을 깨고 소네트카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비명 소리를 들은 간수들이 어두운 감옥으로 뛰어 들어와 곤봉으로 카테리나를 매질한다. 카테리나는 죽은 듯 미동조차 없다. 값비싼 소지품을 훔치기 위해 카테리나의 가방을 뒤지던 간수들은 푸른 목걸이를 발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카테리나가 세르게이에게 준 결혼 선물. 비극이 절정에 이른 순간 클로즈업된 목걸이의 화려함이 비장미를 더했다.
프랑스의 ‘텔레라마’지는 카테리나에 대해 ‘시아버지에게 조롱당하고 남편에게 외면당한 채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페미니스트이자, 신의 운명을 손에 쥔 살인자인 동시에 희생자’라고 서술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카테리나가 러시아 여성을 뛰어넘어 우리 시대 여성의 권리를 대변한 아이콘이라는 사실이다. 막 내리는 무대를 바라보며 필자는 ‘강자만이 살아남는 혹독한 세상에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카테리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진정 참혹한 자살뿐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체르냐코프는 사실주의자일까, 아니면 허무론자일까.
사진 Jean Pierre Maur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