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가장 인간적인 것의 아름다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착하고, 노래 잘하고, 아름답다. 최고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이야기

오페라 연기 분야에서 세계적인 지도자로 유명한 스코트 바네스는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난 후 오페라계에서 가장 위대한 성악가로 안나 네트렙코를 꼽았다. 음악적인 면에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마리아 칼라스 이후 안나 네트렙코만큼 영향력 있는 소프라노는 없다고 할 정도다.

현재 네트렙코가 출연하는 오페라와 리사이틀은 거의 매회 매진이다. 수잔나와 미미에서 데스데모나와 레이디 맥베스를 아우르는, 거의 한계가 없는 배역과 폭넓은 음역, 그리고 팔색조처럼 변화하는 음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네트렙코가 남편 유시프 에이바조프와 함께 3월 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다.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지난해 12월 오스트리아 빈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팔레 코부르크에서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테너 유시프 에이바조프와 결혼식을 올렸다. 일 년 이상 결혼을 준비한 네트렙코 커플은 당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식을 올리기로 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오는 하객들을 배려해 빈을 택했다. 이날 네트렙코는 18캐럿 백금반지와 다이아몬드 왕관으로 화려함을 뽐냈다. 2011년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에서 선보였던 바로 그것이다. ‘디바’의 결혼식은 세계 성악계의 주요 이슈였다. 플라시도 도밍고를 비롯 180여 명의 하객은 식이 끝나고 빈 외곽의 리히텐슈타인 궁전에서 밤늦게까지 불꽃놀이를 즐겼다.

올해 45세의 네트렙코는 이번이 첫 결혼이 아니다. 2008년 4월 우루과이 바리톤 어윈 슈로트와 결혼한 네트렙코는 그해 9월 아들 티아고를 낳았다. 네트렙코는 슈로트와 자신을, 브래드 피트와 앤절리나 졸리 부부에 비교하며 애정을 과시했지만 두 사람은 6년 만인 2013년 11월 파경을 맞았다. 이듬해 2월 네트렙코는 로마 오페라 ‘마농 레스코’ 리허설 현장에서 상대역인 데 그리외를 맡은 여섯 살 연하의 에이바조프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5개월 뒤 약혼했다.


▲ ©Ruven Afana

극히 현실적이고 완벽한 표현력의 소유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71년, 안나 네트렙코는 러시아 남쪽 흑해 연안의 크라스노다르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가 있었고 아버지 유리 네트렙코는 지질학자, 어머니는 전자통신 분야 엔지니어였다. 네트렙코는 “그곳에 나무를 심으면 5분 안에 자라요”라며 비옥한 고향땅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지금도 러시아 군 내의 합법적인 민병대로 크렘린 궁의 비호를 받는, 용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쿠반 카자크인의 피가 네트렙코의 집안에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와일드한 기질은 가장 최근에 발매된 네트렙코의 오페라 ‘맥베스’ 영상을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4막, 맥베스 부인의 ‘몽유병 장면’에서 네트렙코가 피를 토하듯 읊는 절절한 고백은 베르디가 말한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전형이다. 마리아 칼라스, 리오니 리자네크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소름 돋는 전율이 밀려오는 것이다.

고전음악을 즐겨 듣는 부모 아래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배우던 네트렙코는 7세에 크라스노다르의 합창단 쿠반 파이어니어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네트렙코가 러시아 음악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2년 동안 음악학교에서 타티아나 브리소브나에게 노래의 기초를 배운 그녀는 마침내 19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타마라 노비첸코 문하에서 성악의 모든 것을 습득한다. 노비첸코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자 1972년부터 음악원에서 숱한 제자를 길러낸 명교수다.

스몰렌스크에서 열린 전 러시아 연방 글린카 성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쥔 네트렙코는 1993년 마린스키 극장 오디션에 응시해 발레리 게르기예프 앞에 섰다. 게르기예프는 2년 전 그녀가 아르바이트로 마린스키 극장의 바닥을 청소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이듬해 네트렙코는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로 꿈에 그리던 마린스키 극장에서 데뷔 무대를 갖는다. 이후 러시아 오페라 또한 그녀의 전유물이 되었다. ‘루슬란과 류드밀라’ ‘수도원에서의 약혼’ ‘황제의 신부’ 등 데뷔 초기 마린스키 극장과 함께한 네트렙코의 러시아 오페라에선 서유럽 가수들이 접근 불가능한 다소 어둑한 분위기의 발성을 들을 수 있다.

1995년 23세의 네트렙코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데뷔를 이룬다.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류드밀라 역이었다. 또한 ‘리골레토’의 질다, ‘라 보엠’의 미미, ‘청교도’의 엘비라 등 벨칸토 오페라부터 담금질을 계속했다. 2002년 네트렙코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로 데뷔한다. 같은 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선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지휘하는 ‘돈 조반니’의 돈나 안나를 맡아 호평을 받았다. 2003년 뮌헨에선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를 맡아 리릭소프라노로서 첫 발을 디뎠다.

안나 네트렙코가 강렬한 인상으로 국내에 존재감을 알린 것도 비올레타 역을 통해서였다.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빌리 데커가 연출한 ‘라 트라비아타’는 지금까지도 최고 명반으로 손꼽힌다. 롤란도 비야손과 찰떡궁합을 이룬 이 영상물은 흑백으로 도배한 무대와 출연진 속에 홀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네트렙코의 활약이 눈부시다. 비야손과는 ‘사랑의 묘약’(2005), ‘마농’(2007), ‘라 보엠’(2008)에서도 완벽한 호흡을 보이며, 노래뿐 아니라 배우를 능가하는 연기로 혼연일체를 이뤘다.

2008년 9월 아들 티아고를 출산하고 체중도 늘어나면서 네트렙코의 목소리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예쁜 목소리와 리얼한 연기뿐 아니라 삶의 연륜이 실린 묵직한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팔방미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녀의 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우선 벨칸토와 모차르트 위주의 레퍼토리에서 벗어나 드라마틱한 배역을 소화하면서 선곡의 스펙트럼이 무궁무진해졌다. 그 첫 신호탄은 2009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였다. 당시 ‘뉴욕 타임스’지는 ‘광란의 장면’을 “극히 현실적이고 완벽한 표현력은 마리아 칼라스를 떠올리게 했다”며 극찬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네트렙코는 여성으로서도 더 한층 공고해지고 있었다.

네트렙코는 2010년을 넘어서면서 묵직한 인물에 한발 더 다가섰다. 2011년 빈 국립오페라에서 열연한 ‘안나 볼레나’는 2막에서 불꽃으로 타오른다.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안나와 엘리나 가랑차가 분한 조반나는 ‘여대여(女對女)’의 피를 토하는 이중창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신이시여’에서 이상적인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 메트 오페라 ‘맥베스’(2014)의 네트렙코 ©Marty Soh/Metropolitan Opera

“한 배역에만 집중할 때, 완벽한 결과로 이어진다”

2013년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막을 올린 ‘일 트로바토레’에서는 네트렙코가 열연한 레오노라에 관한 대호평이 이어졌다. 내한을 앞두고 이뤄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네트렙코는 레오노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최근 공연한 작품 가운데 제가 가장 아끼는 배역이 레오노라예요. 길고 어렵기 짝이 없지만 숨 막힐 만큼 놀랍죠.”

2014년 11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맥베스’에서 네트렙코의 이러한 광폭 행보는 정점을 찍었다. 200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청순가련의 수잔나를 불렀던 같은 가수라 믿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스케일감이 곳곳에서 번뜩였다.

“목소리는 출산 후 확실히 달라졌어요. 물론 예전에 불렀던 레퍼토리도 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고 더 현명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소녀와 공주보다는 심각하고 격정적인 역할이 제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이건 흥분되는 일이고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에요. 육체적·정신적으로 훨씬 더 많은 힘이 들지만 연기하는 건 늘 행복해요.”

사실 레지에로에서 리릭을 거쳐 드라마틱으로의 전환은 상당히 기교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두고 네트렙코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역시 기술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실제 노래하는 원리는 동일하죠. 물론 각각의 배역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은 바그너, 내일은 노르마를 부르기란 불가능합니다. 미리미리 특별한 보컬 트레이닝은 필수예요. 적어도 한두 달 전, 제가 부를 인물에 목소리를 적용시키고 연습합니다. 그 기간 동안 제 모든 환경을 작곡가와 작품에게 맞추고 몰입하죠. 하루에 한 레퍼토리에서 다른 레퍼토리로 옮겨 다닐 순 없어요. 그렇게 되면 목소리에 치명적인 이상이 오게 되죠. 반면 한 배역에 초점을 두면, 점점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갑니다. 그래야 완벽한 결과를 얻게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그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피나는 노력으로 미미에서 안나 볼레나, 맥베스 부인으로 한 계단씩 올라갈 수 있었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이혼과 재혼,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네트렙코는 서서히 강렬하고 비극적인 캐릭터에 근접해갔다. 여기엔 인간 네트렙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그 누구보다 가정에 충실하고 아이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따뜻한 인간미는 오페라 주인공의 가슴속에 파고 들어가 우리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안나 네트렙코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제 SOS-어린이 마을 지부와 러시아 어린이 복지재단에 매년 거액을 기부하고 있다. 러시아 언론에 의하면 현재 네트렙코의 재산은 한화 40억 원가량이고, 회당 연주료는 6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네트렙코는 현재의 위치에 자만하지 않고 겸손한 미덕으로 자신을 늘 다독이는 중이다.

그녀는 자신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공연 일정만을 짜는 것으로 유명하다. 3월 우리나라를 비롯해 홍콩·일본·대만에서 리사이틀이 끝나면 4월 한 달은 오로지 가족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이후 5월은 드레스덴 젬퍼오퍼의 ‘로엔그린’, 6월은 빈 슈타츠오퍼의 ‘마농 레스코’, 7월은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일 트로바토레’, 8월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마농 레스코’로 관객과 만난다.

“오늘 저녁 이 자장가의 기억이 떠올라. 외로운 들판 위에 울며 노래하며, 슬픈 소녀. 오, 버들! 버들! 버들이여! 노래를 불러요. 흐느끼는 버들은 내 화관이 될 거야….”

2004년에 발매된 네트렙코의 두 번째 앨범 ‘언제나 자유롭게’에서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 4막, 데스데모나가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버들의 노래’를 들어보라. 가슴 저미는 네트렙코의 저음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어지는 ‘아베 마리아’에서 우리는 어쩌면 눈물을 삼키게 될지도 모른다.

베르디와 푸치니는 물론 드보르자크와 칠레아에 이르는 이번 내한 공연 프로그램은 네트렙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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