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학자 이강숙

별을 쏘아올리기까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세계 무대에 또 하나의 젊은 별이 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자란 별이다. 음악과 무용을 비롯하여 각 예술계의 앙팡 테리블이 자신을 단련시키고, 꿈과 예술을 제련하는 곳. 그들을 품은 화약고이자 병기고인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오늘도 세계 예술계를 바꾸고 있다. 이 학교를 짓고 제 틀을 갖도록 한 이가 음악학자 이강숙이다.

서울 서초동에 자리한 이강숙의 자택. 새벽 2시가 되면 노학자의 방에는 불이 켜진다. 저녁 6~7시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는 읽고 쓴다. 음악책과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이 하루를 채우는 즐거움이자 의무라면,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학생들과 만나는 매주 두 번의 강의는 한 주의 즐거움이다. 올해 새내기가 된 학생과 이강숙 사이에는 60년의 시간차가 흐른다.

“교수님께서 보시기에 요새 학생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나요?”

“실용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게 없으면 안 되거든요. 영어 공부하는 것도 다 그렇죠. 그런데 음악을 한다는 것은 실용적 가치를 위한 게 아니잖아요. 비실용적 가치죠. 하지만 그런 고민을 통해서 음악적 가치가 실용적 가치가 되게끔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이강숙의 사유와 언어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반대 항을 만들고, 그 ‘사이’를 통해 생각해보게 하고 균형을 잡게 한다. ‘비실용적 가치’라는 것도 ‘실용적 가치’의 무게와 존재를 생각해보기 위한 사유의 장치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문을 연 1993년부터 2002년까지 초대·2대·3대 총장으로 재직한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frame of reference)’를 위한 것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인간이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식은 자기가 표준으로 생각하는 근거에 있습니다.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 준거(準據)라고 번역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 근거(준거)가 다르면 소통이 안 됩니다. ‘예술교육’이라고 할 때도 각자의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가 다 달라요. 그래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들 때 각 방면을 묶는 철학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이념을 전 세계 예술학교가 모방하게끔 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었습니다. 지금, 이 학교는 그렇게 가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단순히 유학 없이 해외 콩쿠르 입상자를 최다 배출한 학교로만 인식하면 곤란한 이유도 여기 있다. 이 학교는 이강숙만의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를 품은 곳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 예술교육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바꾼 곳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만들던 이강숙의 가슴에는 ‘감동’ 두 글자가 늘 깊이 새겨 있었다.

“강의 때 만나는 어린 제자들이 ‘선생님, 원하는 만큼 삶이 잘 안 바뀌어요’라고 물어요. 정보를 받고, 그것에 가치부여를 하고, 마음을 개조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길고 힘듭니다. 여기에 ‘감동’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감동에도 ‘그냥 감동’과 ‘그려진 감동’이 있습니다. 저는 남을 감동시키기 위해 만든 ‘그려진 감동’보다는 자신을 먼저 감동시키는 ‘그냥 감동’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소년. 문학의 청년


▲ 젊은 시절의 이강숙은 문학에 대한 열정에 온 삶을 저당잡힌 문학청년이었다

이강숙은 1936년 9월 25일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2남 2녀 중 막내였던 그의 어릴적 소원은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하던 그의 집에는 피아노가 있을 리 없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책가방은 내팽개치고 시내의 어느 학교 강당이나 교회 안에 있을 낯선 피아노를 찾아다니는 소년이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은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55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입학하여 피아노과로 옮겼다. 졸업 후에는 여러 차례 독주회를 갖기도 했다. 1964년 국립극장에서 임원식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과 함께 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전 악장 연주는 한국 초연이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계명대 음대 피아노과 조교수를 역임했고, 1968년 미국 휴스턴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큰 전환점을 맞았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속에 홀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사회·정치적 관계 속에서 변화해가는 존재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음악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 관계에 주목하며 음악에 대한 생각하기의 힘을 길렀고, 그 생각과 내용을 문자화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글쓰기’와 ‘책’이란 문학만의 것이 아니라 ‘음악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됐다.

사실 그의 글쓰기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문학병의 미열에 사로잡혔던 청년 이강숙은 ‘사상계’를 비롯한 몇몇 문학지에 단편소설을 응모하기도 했다. 이런 문학은 마침내 아내와의 만남을 잇는 사랑의 가교가 되기도 했다. 그가 숙명여중에 음악교사로 있을 때 국어선생이던 문희자를 만난 것이다. 첫 데이트의 주제는 물론 문학. 그의 아내는 이후 남편의 글을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가 되었다. 이강숙은 아내가 시집 ‘동회 가는 길’(1989, 민음사)을 냈을 때, 시집 말미에 ‘아내의 시’라는 시론을 써 보답했다.

문학에서 이루지 못한 청년 이강숙의 꿈은 다시 음악에 대한 글쓰기로 번졌다. 어느 날 한국일보로부터 한동일 피아노 독주회 평을 써달라는 청탁이 왔고, 이것이 그의 첫 평론이 되었다. 1965년의 일이었다.

음악학과 음악적 모국어 찾기


▲ 대학 시절에 단편 ‘청묘’로 등단한 문희자는 시집 ‘동회 가는 길’을 냈고 수차례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1975년 미시간대학교 박사학위 수여식 때 가족들과 함께 한 사진이다


▲ 이강숙이 피아노에, 문희자가 화구가 그려진 쪽에 나란히 섰다. 문희자가 그린 ‘피아노가 있는 풍경’(2001)이다. 그녀가 화실로 사용하는 방은 작품들로 빽빽하다. 촬영 시 ‘모두 취미로 한 것’이라며 부끄러워 하는 문희자. 2011년 ‘숨결전’의 전시 서문을 쓴 시인 황지우는 “이런 재능을 어찌 그 동안 방치하셨습니까?”라며 이강숙에게 항의(?)했고, ‘그 답례로 나는 맥주에 소주를 타는 폭탄주를 몇 순배 더 마셔야 했다’고 한다

1970년에 미국 휴스턴 대학교에서 음악문헌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1975년에 미시간 대학교에서 음악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버지니아 코먼웰스 대학교에서 조교수를 지냈다. 1977년 서울대 음대 교수로 부임한 후에는 10여 년 동안 ‘한국음악과’와 ‘음악적 모국어 찾기’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문학에는 선택이고 무엇이고가 없다. 한국어로 시나 소설 혹은 평론을 쓰는 것이다. (···) 음악의 경우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한국 작곡가에게는 그들이 사용해야 할 음악적 모국어 같은 것이 없다. 그들에게는 외국어격의 음악언어만이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음악언어가 있게 되면 그 음악언어에 의해서 창조되는 작품의 내용이 단조롭게 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한국 문인이 공통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문학작품의 내용이 단조로와질 수는 절대로 없지 않는가.’ -‘음악의 이해’ 중 ‘상황적 이해: 한국음악의 진로’에서

음악의 창작과 연주와 이론이 고르게 발전해야 하나 국내에서의 학문적 연구는 너무나 홀대 받고 있었다. 절름발이식 음악 풍토를 시정하기 위해 그는 음악학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연구와 교육, 생각과 행동은 이 땅의 음악에 관한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실기 교육으로만 국한된 음악교육에 대한 개념 확장이 필요함을 일깨웠다.

“사실 실기와 이론은 음악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 뿐, 이론 때문에 음악이 존재하고 실기 때문에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고 끝에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얻으면 자신의 이론을 얻었다고 하는데요. 그것이 행위(연주)로 나타나기도 하고, 글(이론)로 나타나기도 하죠. 어떤 선생은 교육을 통해 말로 그 이론을 가르치기도 하고. 이론과 실기는 나타내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저서 ‘열린음악의 세계’(1980), ‘음악의 방법’(1982), ‘음악의 이해’(1985), ‘음악적 모국어를 위하여’(1985), ‘음악선생님을 위하여’(1990), ‘한국음악학’(1990)에 음악과 인간이 살아온 역사를, 살고 있는 현재를, 그리고 살아갈 미래를 담았다. 그리고 1988년부터 계간지 ‘낭만음악’을 창간하여 음악학의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다.

“음악의 실기와 이론이 따로 간다는 것은 사회적 통념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통념이라는 게 무서운 존재예요. 그래서 이것을 바꾸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고 봅니다. 창작자와 연주자와 학자들이 하늘을 같이 보는 날이 와야 한다고 늘 생각했죠.”

그래서 1981년 서울대 음대에 처음으로 음악이론 전공을 개설했다. 이강숙은 자신이 협연했던 KBS교향악단의 초대 음악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일이다. 한국음악을 모체로 철학이 있는 교향악단을 만들겠다며, 학자로서 외치던 ‘음악의 모국어 찾기’를 직접 실행으로 옮겼다. 행동이 곁들여진 ‘음악학 하기’였다. 정기연주회마다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반드시 연주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권을 주지 않는 교향악단과의 마찰로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작곡계에 싫은 소리를 많이 했죠. 서양의 현대음악을 수입하려 하는 자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죠. 현대음악이 20세기에 나왔다고 했는데, 현대음악은 어느 시대에나 매번 생긴 것으로 새로운 음악을 낳는 ‘정신’을 수용해야 한다고 했어요. 작품만 모방하지 말고··· 그 정신을 우리식으로 수용하려면 서양 작곡가들이 갖고 있는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가 무엇인지를 알고, 우리의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글은 끊임없이 묻는다. ‘말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행사되는데 음악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은 왜 그렇지 못한가’ ‘우리네 음악교실의 사정은 어떠한가’ 등으로. 기존의 현상과 새로운 생각이 한판의 송사(訟事)를 벌인다. 당시 그의 이러한 평론 작업에 대해 박용구 선생은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이용한 새로운 평론법으로 한국음악평론의 폭을 넓혔다”고 평했다. 이러한 그의 사유에는 ‘음악-사회-인간’, 그리고 ‘인식-사유-행동’이 삼박자를 이룬다. 그것은 한국적 상황과 동떨어진 혁신(innovation)이라기보다는 현실을 고려하며 체질을 천천히 개선해나가기 위해 내놓은 리폼, 즉 레노베이션(renovation)이었다. 예를 들어 ‘레슨’이라는 단어가 ‘교육’보다는 ‘자본’을 위한 수단으로 물들어갈 때, 이를 향한 그의 생각도 남달랐다.

‘레슨을 사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교육으로 생각하는 선생은 자기 제자의 병만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인류의 병을 고칠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인류의 병을 고쳐줌으로써, 고쳐주는 사람, 고쳐 받는 사람, 모두에게 보상이 가는 그러한 보상이, 보상이 되는 세상을 창조하는데 기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레슨’ 사업가 보다 ‘레슨’ 교육가를 원하는 것이다.’ -‘음악적 모국어를 위하여’ 중 ‘레슨의 생리와 콩쿠르병’에서

‘나 만들기’에서 ‘학교 만들기’로


▲ 1975년 미국 버지니아 코먼웰스 대학교에 부임한 이강숙이 첫 월급으로 구입한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서

1980년대는 음악교육에 대한 체질 개선과 각성의 목소리가 나오던 시기였다. 1984년 9월호의 ‘객석’은 국내에 전문적인 음악기관에 대한 필요와 그 탄생에 대해 점검하는 차원에서 ‘음악원 탄생은 필요한가?’라는 대특집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끊임없는 고민을 낳았고, 문화부는 1990년에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의 하나로 국립예술학교 설립계획을 공포했다. 문학평론가 출신의 이어령이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1990~1991)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대통령령 제13528호)이 제정되었고, 뒤를 이은 이수정 장관(1991~1993)이 이 령(令)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이강숙은 이를 위한 자문위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청사진과 추천 교수진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던 이강숙은 이내 곧 이수정 장관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수정 장관은 이강숙에게 서울대 교수를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들어달라며 뜻을 비쳤다. 하지만 이강숙은 거절했다. 이후에도 거절, 또 거절. 하다못해 이수정 장관은 이강숙의 집을 직접 찾아갔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안 한다! 못한다! 다들 서울대 교수 못 되어서 오매불망인데!’ 참다못한 이수정 장관도 일침을 날렸다.

“이런 속물 같으니라고!”

“뭐라고요? 내가 왜 속물이요?”

“예술교육에 대해 중요하다며 이렇게 글만 써놓고, 내가 장관의 명예를 걸고 당신의 뜻대로 하게 해주겠다고 하는데도 행동을 안 하니 당신이야말로 속물 아니오!”

예술의 창조는 제도의 창조에서 나온다고 쓴 글들. 생각하기와 대안 찾기가 맞물려 있던 글들··· 그 글들과 이론은 순간 이강숙의 자존심을 태워버리는 땔감으로 전락했다. 그에 대한 뜻 모를 변명이었는지 이강숙은 외쳤다.

“내가 왜 속물이냐! 난 부분적으로만 속물이다!”

음악과 사회에 대해 언변을 토하던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했고, 글을 휘갈기던 손목에는 실천없는 이론의 공허함이 주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서울대 교수로서 ‘나 만들기’로 일관해온 이강숙은 서울대를 사직하고 ‘학교 만들기’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래! 움직이자. ‘음악학자’의 행동은 그가 정립하고 있던 ‘음악학’과 그 이론들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동음악학’이자 ‘행위비평’이었어요. 글로 하는 음악학과 행동으로 하는 음악학은 다른 법이죠. 많은 이가 음악의 본고장은 저기(유럽)라고 했어요. 그런데 나는 이제부터 본고장은 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전 세계 예술학교들의 모방 대상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됐죠. 처음에 줄리아드 음악원 같은 학교를 만들라고 했는데, 그때 모방을 하던 우리가 이제는 강충모 교수 같은 이들을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보내는 곳이 되지 않았습니까? ‘프레임 오프 레퍼런스’가 있는 학교가 되었으니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게 된 거죠.”

지금의 모습은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으로만 존재했다. 어쨌든 당시 이강숙의 뜻과 의지는 장대했다. 하지만 서울대 교수직을 내려놓은 남편을 바라보는 문희자 여사의 속은 타들어갔다. ‘여보, 돌았나···’라며.

‘이강숙’표 히든 커리큘럼

1992년, ‘전 서울대 교수’에서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이 된 이강숙의 집무실. 수많은 서적과 제자들의 논쟁이 오가던 연구실은 어제의 직장이 됐다. 이제 이곳에서 공문서와 복잡한 업무가 시작되었다. 행정의 ‘행’, 직제의 ‘직’자도 모르던 그였다.

‘말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행사되는데 음악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은 왜 그렇지 못한가. 행사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모방 대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원래에 있는 능력이고, 특정 언어 구사 능력은 원래에 있는 능력 덕분으로 얻어진 개발된 능력이라고 했는데 개발된 능력이라는 것은 모방에 의해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 (···) 모방 대상이 이렇게 일정치 않으니 소질 개발이 일정해질 이유가 없다’ -‘음악선생님을 위하여’ 중에서

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모여 모방을 통해 자신을 개발해야 하는 예술학교. 일단 학생들이 모방해야 할 최고의 교수진이 필요했다. 그들은 이강숙이 만든 ‘히든 커리큘럼(hidden curriculum)’이었다.

“음악행위에는 음악성 외에 지식 행위와 기술 행위 그리고 태도 행위가 필요합니다. 삶의 태도, 학교에 대한 태도, 직업에 대한 태도 등이요. 어떤 태도, 즉 ‘프레임 오브 레퍼런스’를 어떻게 갖느냐가 나를 바꾸는 것인데, 학교의 ‘히든 커리큘럼’이 그 역할을 합니다. 숨어 있는 교과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떤 문화권에 있느냐에 따라 ‘저절로’ 배우는 것과 ‘억지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저절로 배우는 것은 억지로 배우는 것보다 중요하고 그 효과도 크죠. 저절로 배우는 것에 있어서 그 학교의 ‘히든 커리큘럼’이 무엇이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예종의 히든 커리큘럼은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는 교수들’입니다. 학생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그 ‘분위기’입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유명한 작가에게 매일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교정에서 한 시간씩 책을 읽다가 가면 전임 교수에 준하는 월급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작가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매일 책을 읽고 갔죠. 그랬더니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던 학생들의 태도와 학내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교육은 티칭(teaching)이 아니라 러닝(learning)입니다. 가르치지 말고 배우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타지 않은 심지가 세 개 있습니다. 진·선·미. 그것에 불만 당겨주는 것이 교육입니다.”

이강숙은 삼고초려 끝에 서울대에 함께 재직하던 김남윤(바이올린)과 이건용(작곡·이론)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활동하던 정명화(첼로), 이영조(작곡), 김대진·강충모(피아노), 김영미(소프라노) 등을 모셨다. 스승은 제자를 쏘아 올리는 활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들은 그 어떤 화살도 높이 쏘아 올릴 수 있는 강한 활을 지닌 궁예부대였다.

예술교육의 산을 만들기 위해 넘은 산

1993년에 개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은 예술의전당 내의 빈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총장도 교수도 학생도 있었지만 교사(校舍)가 없었다. 연꽃은 진흙에서 핀다고 했지만, 이건 너무 진흙이었다. 내로라하는 학업의 과정을 거쳤고, 일류 선생의 일류 제자로 입학한 학생들은 연습실이 부족한 나머지 화장실에서 연습하기도 했다.

“인생을 걸고 하겠다”고 외친 이강숙은 개교한 지 일 년도 안 되었을 때, 국회 상임위원회에 불려나갔다. ‘착석하십시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교 잘돼갑니까?”라는 말이 나왔다. “네, 잘되어갑니다”라고 이강숙이 답하자 “그게 무슨 잘되어가는 겁니까? 당신이 외국 유학 가지 않고도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나오는 학교 만들겠다고 했는데”라는 말이 나왔다. 이강숙은 “존경하는 의원님···”이라며 입을 열었다. 의원님, 결혼한다고 아이가 바로 나올 수 있습니까? -거 무슨 소리요. -임신했다고 바로 아이가 나옵니까? -임신하고 바로 어떻게 낳소? -입덧을 거치고 10개월이 되어야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않습니까? -거 왜 그런 소리를 지금 하는 거요. -그럼 아이가 나오면 바로 걷습니까? 말은 바로 합니까? 3~4년은 기다려야 걸어 다니지 않습니까? -거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시오? -우리 학교는 아직 임신도 안 했습니다. 4년 즈음 흘러야 임신도 입덧도 출산도 말도 걷기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그 말 맞네, 그 말이 맞아!

서울대 교수라는 전직도, 장관 예우에 준하는 교장이라는 현직도 모두 내려놓아야 했던 시간들은 계속 이어졌다. 모든 게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설치령(設置令)’이 아니던가. 령(令). 이것은 명령이었다. “6개원을 완성하는 게 나의 임무였어. 안 그러면 난 직무유기였죠.”

오직 믿음뿐이었다. 최고가 모여야 최고가 나올 수 있다는 믿음. 물색과 탐색 끝에 연극원장 김우옥(1994), 영상원장 최민(1995), 무용원장 김혜식(1996), 미술원장 오경환(1997), 그리고 전통예술원장 백대웅(1998)을 원장으로 임명하며 6개원을 차례대로 개원했다. 하지만 이강숙 앞에는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 ‘넘어야 할 산’이 계속 이어졌다. 한 산을 넘으면 다음 산이. 그 산들 중 가장 높은 산은 ‘예산’이었다.

예산은 늘 부족했고 한정됐다. 삼고초려 끝에 모신 6개원의 원장들은 교육 공간과 예산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장관 예우를 받는 그였지만 학교를 위한 몇 푼의 예산이라도 쥐고 있는 경제기획원의 7급 공무원은 그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 앞에선 전직 서울대 교수라는 것도, 장관 예우를 받는 교장직이라는 것도 내려놓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갔다. 아침에는 정중한 목소리에 담긴 “안 됩니다”가, 점심에는 “안 된다 그랬잖아요!”로 변했고, 저녁에는 모두들 “저 영감 또 왔네”라며 욕으로 바뀌었다. 이강숙을 보좌하던 국장이 참다못해 그 현장에 끼어드니, 오히려 “가만 있어라. 이건 내 일이니까 가만 있거라. 장관 폼 잡고는 예산 한 푼도 못 딴다”라며 말린 이는 이강숙이었다. 그리고 밤 11시. 다시 찾아간 이강숙은 캔에 든 식혜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마나 출출하겠습니까? 사실 맥주 사오려고 했는데요. 한잔하시고 ‘아~ 기분 좋다’며 ‘예술학교 예산 줘버리자!’ 하시면··· 저도 나라 사랑하는 사람인데요. 예산 골고루 나눠주셔야 하는데 그러면 다른 곳하고 밸런스가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식혜 사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예산은 거짓말처럼 올라가 있었다. 다시, 산 넘어 산. 학습 공간과 교사(校舍)가 문제였다. 명색이 국립예술학교인데 6개원은 예술의전당과 국립극장과 안기부(옛 중앙정보부) 등의 한구석에서 포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강숙은 1996년에 석관동 안기부 건물로 연극원·무용원·영상원·미술원을 모았고(석관동 제2교사는 2006년에 준공됐다), 1999년에 지금의 서초동 교사를 완공시켜 음악원과 무용원을 옮겼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해외 콩쿠르 성과야말로 우리 학교를 위한 예산을 끌어올 수 있는 방편이었어요. 그때는 ‘이제 하려고 합니다’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 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일단 ‘나아가다 보면 된다’라고 생각했죠. 남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 학교는 큰 배다. 태평양을 건너는 큰 기선을 작은 상어가 건드린다고 해서 방향이 바뀌겠느냐’며 계속 갔어요.”

1993년 개원 이래, 1995년 민유경(바이올린)의 예후디 메뉴인 콩쿠르 3위를 시작으로 2015년 문지영(피아노)의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 1등 수상까지, 국내 교육만으로 국제 콩쿠르의 별을 따오는 토종(土鐘)을 배출하는 곳이자 음악의 본국이 부러워하는 ‘우리만의 본종(本種)’을 기르는 곳으로 자리잡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제 전 세계 그 어디보다 강력한 예술학도들의 화약고가 된 이 학교의 명성은 오늘날 세계가 기억해주고 있다.

‘열린 이강숙’으로 살기


▲ 자택에 전시된 ‘물위에 쓰여짐’(2011) 앞에서. 부인 문희자의 작품이다

“남녀의 관계도 만나야 결혼도 임신도 출산도 할 거 아닙니까? 타고난 소질도 접촉을 해야 합니다. 교수, 학생, 음계, 책 등등 무엇이라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죠. 나는 그 후천성을 믿습니다.”

이강숙에게 ‘만남’이란 생각과 글에 불을 붙이는 무엇이다. 이강숙은 피아니스트 손열음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의 일대기를 글에 담아 소설 ‘피아니스트의 탄생’(2004)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주장하던 ‘열린음악’처럼 그는 늘 만남이 주는 들숨과 날숨에 제 자신을 열어놓는 ‘열린 이강숙’으로 살고 있다.

그의 ‘읽기’와 ‘쓰기’는 오늘도 이어진다. 요새는 역사학·미학·현상학·기호학·심리학·교육학을 통하여 음악이라는 존재를 총체적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통합음악학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부지런히 쓰고 있다. 문학에 대한 애착을 평생 버리지 못한 그는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1년에 ‘현대문학’에 단편 ‘빈병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고, 이후 장편 ‘피아니스트의 탄생’, 소설집 ‘빈 병 교향곡’(2006)과 ‘젊은 음악가의 초상’(2011)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에게 소설이란 음악학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화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용이하도록 하는, 또 다른 음악학의 도구이다. 그리고 아직 못다 이룬 꿈도 있다.

“많은 이가 나를 서양음악만 연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양악과 국악 양쪽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나의 이론’을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질문과 반응, 나의 수정과 고집을 통해 앞서 말한 대로 학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만들고 싶어요.”

그 커리큘럼이 만들어진다면, 그 안의 ‘히든 커리큘럼’이란 ‘이강숙’일 것이다. 이제는 그를 학문하는 주체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와 글들이 학문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를 읽기 위한 사유로서 ‘이강숙학(學)’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이강숙의 이야기가 끝나간다. 인터뷰를 위해 처음 뵈었던 날 선생이 건넨 명함에는 ‘이강숙 (전)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라고 적혀 있다. 이메일도, 학교 주소 그대로였다.

“교수님. 다시 태어나신다면 한예종 총장 다시 하시겠습니까?”

선생의 미소. 잠깐의 침묵. “이렇게··· 험난한 과정이었는데요···”라며 궁금한 눈으로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다시, 선생의 미소.

“난 지금도 ‘한예종’ ‘예술학교’라 부르지 않고 ‘우리 학교’라고 하고 다녀요. 이 인터뷰도 ‘나’에 대한 게 아니라 ‘우리 학교’에 관한 것이니 수락한 것이고요. 이상하게 우리 학교가 내게는 내 생명 같았어. 직장이 아니라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죠. 하늘이 내게 준 나만의 사명.”

한국예술종합학교를 품고 있는 우면산이 보이는 창가. 그 위로 저녁의 시간이 내리고 있었다.

진행 장혜선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