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주연선

겸손, 그 내려놓음의 고백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꿈으로 향하는 길목,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으로 내디딘 새 발걸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첼리스트의 ‘구약성서’라 불린다. 오롯이 첼로 한 대의 음색으로만 풀어내는 방대한 규모와 작품에서 뿜어 나오는 원초적인 숭고함은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음반을 녹음하며 오랫동안 이 곡을 신성시해왔다고 밝혔다. 파블로 카살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일용할 양식’ 삼아 매일 연습한 것 역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첼리스트에게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음악을 향한 기도이자 신앙의 고백인 셈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무대와 3월 말 동곡의 음반(Sony) 발매를 앞둔 첼리스트 주연선 역시 이번 연주가 자신을 겸손히 내려놓는 ‘고백’이라 말한다. 부제는 ‘솔리 데오 글로리아(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오직 신에게만 영광을 돌리던 바흐의 경건한 정신을 담았다.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하고 라이스 음대에서 린 해럴을 사사한 주연선은 2008년 서울시향에 첼로 수석으로 입단한 후 8년째 파트를 이끄는 리더이자 콰르텟 K·첼리스타 첼로앙상블·주트리오의 멤버로서, 또 솔리스트로서 바쁘게 무대를 오가고 있다. 봄기운이 느껴지는 따뜻한 바람이 불던 저녁, 연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주연선을 만났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 발매와 독주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첼리스트들에게 이 작품은 특별하죠.

바흐는 클래식 음악의 척추라고 생각해요. 모든 작곡가가 바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특히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여섯 곡이나 되기 때문에 첼리스트라면 누구나 평생을 두고 ‘공부’하는 곡이에요. 그렇지만 음반을 내고 전곡 연주를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죠. 이 작품이 첼리스트에게 주는 의미가 커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전곡 음반을 발매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음반 제안이 들어왔어요. 첫 솔로 음반인데, ‘바흐’로 제안 받았죠. 처음에는 저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루고 싶은 개인적인 꿈도 있고, 누가 시키면 곧잘 해내는 편이라(웃음) 결국 발매도 하고, 독주회까지 갖게 되었네요.

3시간에 달하는 전곡 연주를 ‘장대한 여정’에 비유했어요.

이전까지는 각 모음곡을 개개의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준비할수록 큰 퍼즐을 맞춰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조성마다 종교적인 의미가 존재했어요. C장조는 ‘구원’, C단조는 ‘죄’ 이런 식으로요. 바흐는 신앙심이 굉장히 깊었어요. 그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섯 곡의 조성 순서(G장조·D단조·C장조·E♭장조·C단조·D장조)가 성서의 흐름과 같다는 걸 발견했어요. 자연에서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을 받고 신과 인간이 하나 되고, 죄와 천국을 경험하는… 결국 여섯 곡이지만 하나의 큰 흐름이 있다는 것을 느꼈죠.

프로그램 순서에도 이 의미를 부여한 건가요?

아니요. 1번부터 순서대로 연주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후반부가 상대적으로 길어지더라고요. 연주회가 길다 보니 어떤 순서가 청중에게 좋을까 많은 고민을 했어요. 청중이 화성적으로 듣기 편안하도록 ‘관계조’를 염두에 두어 구성했죠(1·2·6·4·5·3번). 1번 G장조는 시작으로 적합한 조성이고, 2번과 6번은 각각 D단조, D장조로 같은 으뜸음을 사용해 자연스럽게 연결돼죠. 6번은 엔딩 느낌이 있어 1부의 마지막 순서로도 좋고요. 2부의 4번과 5번은 E♭장조, C단조로 나란한조(조표를 같이하는 장조와 단조)이고, 3번 C장조는 5번과 같은으뜸음조이면서도 기본 조성이라는 점에서 전곡을 마무리하기 좋아요.

이번 연주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바흐’라는 원재료만 가지고 연주하는 거요.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은 감정이라는 양념을 쳐야 해요. 설탕을 칠까 소금을 칠까, 양은 얼마나 넣을까 하고 맛을 최대한 살리려 고민하죠. 그런데 바흐의 음악은 조미료를 쓰면 쓸수록 어색해져요. 오히려 덜어내야지 완성되죠. 재료의 맛만으로 요리하는 게 제일 어렵듯, 저의 감정을 내려놓고 바흐가 명시한 재료들만 사용하는 작업이 힘들었어요.

오롯이 음악에 몸을 맡기면 오히려 자신의 색깔이 극명하게 드러날 것 같기도 해요.

최대한 감정은 내려놓되, 음악이 허락하는 한 저다운 연주를 하려고 노력했죠. 무(無) 맛으로 요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밸런스를 잡는 게 중요해요.

‘주연선’다운 연주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진지함, 묵직함. 화려하게 드러나는 것보다 깊이 있는 모습으로 청중과 교감하고 싶어요.

바흐의 음악과 어울리네요.

네, 그래서 바흐의 음악을 좋아해요. 굉장히 어렵지만, 정직하거든요. 바흐는 돌려 말하지 않고 순수하고 직선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에요. 저도 그렇거든요. 단순해 보일진 몰라도 결코 가볍지 않아요.

영향을 받은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이 있다면?

쾰른 음대 교수였던 보리스 페르가멘시코프의 음반을 가장 아껴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바흐의 색깔을 유지하는 ‘중용’의 연주예요. 제가 추구하는 바와 같죠.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꿈은 무엇인가요?

50대에 전성기를 맞는 게 꿈이에요. 10년째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솔리스트 활동을 병행하고 있어요. 이 경험들이 다 전성기의 밑거름이 될 거라 믿어요. 서울시향 입단 전부터 ‘음악적 밸런스를 잘 맞춰야겠다’ 다짐을 했어요. 오케스트라를 오래하니 듣는 귀가 열리고 눈치가 빨라졌어요. 실내악 역시 남의 소리를 듣는 데 집중해야 하죠. 그런데 이 부분만 극대화되면 제 개성이 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솔리스트로서 비중을 늘리려던 참이었는데, 이번 음반이 그 기점이 될 것 같아요. 물론 음악적으로도 큰 도전이고요.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중이군요.

이제 15년 정도 남았네요. 조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다 때가 다르니까요.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놓는’ 연주를 한 번이라도 하는 것이 꿈이에요. 단순하게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 아닌, 인생이 묻어나오는 연주요.

사진 심규태(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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