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부르는, 정선 아리랑’

꽃별의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봄이 오는 소리

봄이 비추어 드는 호수에서는 정말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헐거워진 얼음 호수 아래에서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울리기 때문이다. ‘꾸릉꾸릉’ ‘뚱뚱’ 소리는 호수 저 밑바닥을 치고 세상으로 솟아난다. 그 소리를 처음 들으면 어디서 들리는 소린지 어리둥절하다. 저 먼 방향에서 들리는 듯해서 그쪽으로 다가가 봐도 쉽게 소리의 근원에 가까워질 수 없다. 한참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야 대지가 깨어나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된다. 언 물이 풀어지고, 아직 차가운 세상은 봄을 품는다.

전자음악처럼 들리는 불규칙한 공명을 듣고 있으니 꽁꽁 언 세상과 빛나는 햇살 사이에서 선명한 시간의 흐름이 보였다. 아! 영하 5~6도쯤 되는 2월의 어느 날, 문득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본격적인 봄이 오기 전에 겨울을 만나고 와야겠다.

정선의 겨울

강원도에는 눈이 많다. 겨울에 강원도에 갔는데 눈 쌓인 산을 보지 못한다면 섭섭해진다. 유난히 눈이 없던 올해, 봄은 빠르게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강원도에서 가장 좋은 것은 굽이친 길이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지만 느리게 마음을 먹으면 산은 물러나고, 길은 넓어진다. 고개를 오르고 또 내리면서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도 싫지 않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산에는 굴참나무나 물푸레나무, 잣나무 등이 살았다. 딱딱한 잎자루와 가지 사이, 나무 겨드랑의 껍질 속에서 겨울눈이 부풀어 있을 터였다. 때때로 나타나는 자작나무는 무뚝뚝한 겨울 산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감초 같았다.

고갯마루에 오르면 아주 먼 산까지 보였다. 먼 산은 흐리고, 가까운 산은 진했다. 그 농담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몇 번이나 불에 타버린 산을 보았다. 그런 산에도 꼭대기나 등성이에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아직 작지만 그렇게 자라난 나무는 강하다고 들었다. 어느 책에서 봤는데, 일단 불이 난 산은 인간이 그것을 재생시키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빠른 회복의 방법이란다. 너무나 놀랍다.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숲을 되살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니! 생명은 스스로 살아난다.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오고,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뿌리에서 다시 가지를 뻗어낸다. 그 강력한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는 민둥산을 보면서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속으로 외쳤다.

묵직한 산들을 지나 정선에 도착했다. 마침 장날이었다. 안동에 살던 어린 날, 5일장이 서는 걸 늘 봤다. 강아지나 병아리 앞에서 한참 앉아 있으면, 엄마가 장을 다 보고 나를 데리러 왔다. 앉아서 강아지를 구경하는 동안 시장 아주머니들이 밤도 까주고, 설탕 바른 꽈배기를 주기도 했다. 정선시장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인심은 여전히 넉넉했다. 부침개랑 수수부꾸미를 샀더니 하나씩 더 얹어 주고, 버섯을 한 봉지 사니 두 주먹을 더 넣어 주었다. 얻어먹은 수수부꾸미는 더욱 고소하고 달달했고,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 버섯 향이 가득했다. 시장 앞 동강은 땡땡 얼어 있었는데 아직 얼음이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북실리 산 쪽으로 올라가면,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놓아 발아래가 다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나는 U자로 생긴 짧은 길을 한 발자국도 걷지 못했다. 하지만 입구에서 손잡이를 꼭 붙들고 바라보는 밤섬과 섬 둘레로 흐르는 동강, 저 멀리까지 보이는 산세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칼바람이 코끝을 얼리는 와중에 햇볕은 머리 위에서 봄을 피웠다.

아리랑, 그리고 정선 아리랑

아리랑은 우리의 대표적인 민요다. 대한민국을 비롯해 한반도 전체, 나아가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 사회에서 널리 애창되는 대표적인 노래로 외국에서 노래 부를 일이 있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할 때 가장 많이 불린다. 우리의 정서를 보여줄 단 한 곡을 꼽는다면, 아마도 그건 아리랑이 될 것이다. 결국, 아리랑은 우리를 하나의 덩어리로 묶는 강력한 힘을 지닌 끈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리랑’ 하면 떠올리는 그 노래는 사실 아주 오래된, 그러니까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노래는 아니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지역색이 담긴 아리랑이 불리고 있고, 새로 만들어진 아리랑도 많다. 가사가 정해져 있지 않고 주제 또한 개방되어 있어 누구든지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다. 아리랑이 민족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도 아마 그런 생명력과 다양함 때문이리라.

일찍이 한반도의 중앙부에 자리한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발생한 아리랑은 강원도 정선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우리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결국 끈질기게 살아낸 삶, 그 삶의 언저리에 늘 아리랑이 있었다. 강원도를 위시하여, 한반도의 남서쪽인 전라남도의 진도, 남동쪽인 경상남도의 밀양 등지에서 전승 보존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보존 단체가 이어가는 소리뿐 아니라 여러 예술가들이 새롭게 부르고, 연주하고, 극으로 해석함으로써 아리랑의 생명력은 무한히 이어지고 있다. 우리 음악이 단지 ‘보존’의 대상이 아닌 ‘재탄생’의 주제가 되는 것이 참 기쁘다.

여러 아리랑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리랑은 정선 아리랑이다. 모든 아리랑에는 삶이 녹아 있고, 삶이 녹아 있는 노래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른다. 아리랑이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는 등 입신양명을 했지만, 사실 살아 있는 노래는 가장 낮은 곳에서 흐르는 법이다. 우리 삶의 가장 깊고, 낮은 곳 말이다. 아리랑은 여느 예술작품과는 다르다.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존재’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며는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 삼월이 아니라며는 두견새는 왜 우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릿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

이것이 가장 많이 불리는 정선 아리랑의 가사다. ‘정선 아리랑 가사집’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가사가 많다. 그만큼 노래와 삶이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무대에서 불리는 노래가 되면서 가사는 내 이야기를 담은 것이 아닌, 저 옛날이야기를 담은 것이 되었다. 나에게도 모든 민요는 그렇게 ‘옛날 노래’였다. 그런데 언젠가 다큐멘터리에 정선에 사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허리가 굽어서 지팡이를 양손에 짚고도 몸의 각도가 90도를 이루지 못하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할머니가 부르는 정선 아리랑은 모두 처음 듣는 가사들이었다.

왜 다 늙었나, 왜 다 늙었나
내가야 왜 다 늙었나
아들 딸 먹여 살리다 내 모발이 시었네
갈 철인지 봄철인지 나는 몰랐더니
뒷동산 행화춘절이 봄 알고 와주네
호박줄 고지줄은 지 멋대로 가는데
나는야 누구에 걸려서 지 멋대로 못가나

가사를 들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더 마음이 아팠던 건 실제로 당신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였다. 할머니는 ‘내가야 왜 늙었나’를 부르기 전에 목이 메시는지 먼 산에 눈길을 주었다. 다 부르더니 ‘이제 고만 합시다’ 하면서 주름 가득한 얼굴로 웃는다. 웃으면서 눈물을 훔친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부른다. 불을 지피면서, 말린 옥수수 알을 떼면서, 채마밭을 가꾸면서… 부르고 또 부르는 노래에는 굽이굽이 눈물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아픈 가사를 절절히 부르면서 가슴이 시원하다고 한다. 가사에 담긴 삶에는 애환이 가득한데도 ‘세상이 이렇게 좋은데 왜 나는 늙어 가냐’면서 삶에 대한 애착을 노래한다.

짧은 영상을 보면서 삶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사람은 얼마나 위대하고, 또 초라한가. 삶이란 얼마나 찬란하고, 또 쓸쓸한가. 정선 아리랑에는, 할머니가 부르는 그 정선 아리랑에는 그렇게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우리 음악에는 한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 음악을 특징짓는 단어라고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삶이든 힘들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이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고, 지금껏 단일 민족으로 살아남은 데는 그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이 어디서 오는가를 궁금해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억울함이나 슬픔이 응어리진 마음을 뜻하는 ‘한’보다는, 그 모든 삶의 어려움과 안타까움을 극복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겨울은 춥다. 겨울이 깊어지고 추울수록 봄은 가까워진다. 추운 겨울을 겪지 않으면, 찬란한 봄을 맞을 수 없다. 작물이나 과일나무도 겨울에 춥지 않으면 가을에 잘 여물지 않는다고 한다. 끝끝내 겨울을 뚫고 봄을 맞이하는 나무의 생명력과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을 지탱해온 생명력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갯마루의 매운바람을 맞으면서 할머니의 정선 아리랑 가락을 떠올렸다. 힘들고 외로운 삶인데도 다시 삶을 선택하는 힘, 펴지지도 않는 허리로 다시 밭을 매고, 방에 불을 지피는 강인함, 그리고 순함과 끈기를 품은 할머니가 아리랑을 부른다. 아마도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자신을 순환시켰으리라. 받아들이고, 놓아주고, 아낌없이 주고, 온 힘을 다해 품었으리라. 할머니의 삶도 겨울 다음에는 봄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선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이제 우리의 정선 아리랑에는 어떤 가사를 담을 것인가. (다음 편에서는 경주에서 이야기를 전합니다.)

글·사진 꽃별
해금 연주자 꽃별은 경계를 허무는 평화로운 음악을 꿈꾼다. 해금으로 세상의 수많은 삶과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편, 국악방송 ‘꽃별의 맛있는 라디오’를 통해 우리 음악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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