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테크니션 제프리 크릴 ‘실험과 경험으로 일구는 소리’

조진주의 THE ART OF PRACTIC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3월 1일 12:00 오전

0.1cm만 옮겨도 소리가 달라지는 유난스러운 악기들을 다루고, 악기와 연주자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테크니션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을 연마하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

주위를 살펴보면 불타는 의지와 투지로 수련을 이어가는 신기한 뮤지션들이 있는 반면, 나는 연습을 30분 하다가도 이내 지루해져 텔레비전 켜고는 음정을 맞추는, 게으른 바이올리니스트다.

내게 ‘의지’란 스스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어떠한 환경으로 밀어 넣었을 때 비로소 발현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 같은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환경’일 수밖에 없다. 멋진 연주자들에게 둘러싸이거나, 잘하지 않으면 무척 창피할 연주가 있을 때 ‘괴력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나 자신을 보면, 사람의 심리 상태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감을 주는 중요한 예술적 환경의 요소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연주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궁합이 맞는 악기 아닐까. 나의 경우, 악기의 상태나 종류에 있어 그리 예민한 편이 아니지만, 활의 상태에 대해서는 과하게 집착할 때가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악기와 활이 온도나 습도에 반응해 내 마음대로 소리가 나지 않을 때만큼 신경질이 나는 순간도 없다. 마치 잘 들지 않는 칼로 요리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연주를 그럭저럭 해냈더라도, 악기 상태나 활 상태가 좋지 않으면 뒷맛이 찝찝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

많은 사람이 연주자는 악기에 관해 전문가처럼 잘 알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악기에 직접 손을 대면서(!) 이것저것 만져보는 연주자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악기를 수리하고 소리를 고르게 하는 것은 한국에서 흔히 ‘조율사’라 불리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있는 ‘아저씨,’ 혹은 ‘선생님’에게 맡겨진다.

0.1cm만 옮겨도 소리가 달라지는 유난스러운 악기들을 다루고, 그 유난스러움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연주자들에게는 좋은 테크니션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필수다. 악기와 연주자 사이에서 감정적·기술적 노동으로 고군분투하는 테크니션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을 연마하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

피아노 테크니션 제프리 크릴은 보면 볼수록 내면이 단단하다는 느낌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미소 지을 줄 알고, 항상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한다. 반면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높은 기준을 가지고 타협하지 않는 최고 테크니션이기도 하다. 여름 페스티벌을 새롭게 만들며 사람들에게 치이는 것이 일상인 요즘, 부지런하고 너그러운 태도로 늘 주위를 차분하게 진정시키는 그를 만나 ‘조율’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고 싶었다.

수련의 진화 _모든 감각을 세워 인내로 다가가기

제프리 크릴의 손은 굵고 투박하다. 그는 오하이오의 농장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피아노를 치는 것보다 농장의 여러 가지 일을 돕는 것이 성장 환경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했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씨앗을 뿌리기 위해 정확히 일자로 땅을 파놓아야 해요. 집중력이 조금만 흐트러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죠. 지금 생각해보면 반복적인 농장 일을 하면서 정신적 차원의 참을성과 육체적 차원의 정밀한 노동을 같이 배운 것 같아요. 피아노 테크닉이라는 것은 예술과 과학의 합동체이기에 무엇보다 실험 정신과 근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천천히, 모든 감각을 세우고 접근하는 인내가 필수 요건이죠.”

‘천천히’와 ‘빨리’ 모두를 경험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상당히 소중하다. 많은 것이 변하는 현시대에, 클릭 하나로 모든 것을 이뤄내는 것은 대단하고 편리한 일이다. 한편 레슨 시간에 학생들을 만나면 천천히, 집중해서 하는 연습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몰라 정신적 트레이닝 방법까지 가르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타고난 성격도 물론 무시할 수 없지만, 제프리 크릴처럼 농장 일이나 운동 등을 경험하며 육체적인 참을성을 배운 아이들의 경우, 연주에 대해 논리적으로 천천히 접근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어찌 보면 음악도 육체적 노동이니, 이러한 결과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피아노 연주자로 그리 빛을 발하지 못하던 크릴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당시 클리블랜드에 머무르던 오스트리아의 테크니션 매티아스 바트와 함께 도제식으로 전문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매티아스 바트는 스타인웨이 공장에서 수리뿐 아니라 모든 부품을 만드는 방법, 그리고 조립까지 배웠을 만큼 피아노의 모든 요소를 꿰뚫고 있는 완벽주의자였고, 줄을 묶는 방법이나 망치를 다루는 방식 등에서 자세와 기술을 중요시하는 엄격한 스승이었다.

“바트 선생님에게 처음 배울 때는 매일매일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어느 하나 놓치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피아노는 몸집이 커서 투박할 것 같지만 모든 부품이 아주 예민해요. 피아노의 줄을 두드리는 (모직으로 만든) 헤머 부분을 어떤 약품으로 처리하는지, 어떻게 깎아내는지에 따라 음색이 바뀌는지, 줄을 묶고 연결하는 방법에 따라 조율의 정도와 정확성이 달라져요. 또 일기예보에 따라 피아노를 미리 조율해놓을 수 있어야 해요. 줄의 정확한 위치에 미세한 구멍을 내어 음색을 맑게 만들고, 줄을 건드리는 헤머의 높낮이를 조정해 터치를 더 편안하게 만들기도 하죠. 이 모든 것이 습도와 온도에 따라 수시로 변해요. 연주자들이 피아노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조정한다는 건 수많은 변수가 있는,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프로세스예요.”

연주자로서, 내가 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다. 같은 클래식 음악 분야임에도 피아노 테크니션은 과학에 발을 디딘 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내다보아야 한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조율의 정확성을 높이는 기계가 날로 발전하고, 새로운 화학성분과 약품이 발명되는 만큼,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다양하게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사람은 어쩌면 악기 테크니션 아닐까.

행동과 관념의 수련 _몸으로 쌓는 경험, 새로움을 위한 실험

정갈하고 깊은 크릴의 눈빛에선 단시간 내에 그를 신뢰하게 만드는 정직함이 묻어난다. 피아노에 대한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가 어린 나이에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 진정성과 근성 때문이었다. 손가락 끝이 잘려나가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면서 결국엔 해내고야 마는 그를 본 스승은, 당시 클리블랜드 음대 학장에게 크릴을 당장 고용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날 이후 크릴은 클리블랜드 음대 교수직에 임명됐을 뿐 아니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부터 클리블랜드 피아노 콩쿠르에 이르기까지, 도시에서 피아노와 관련된 모든 큰 행사의 전속 테크니션으로 고용됐다.

“음대의 피아노 테크닉 교수라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요.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재밌고, 그 과정에서 저도 항상 배우고 있죠. 클리블랜드 음대 안에 193개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어요. 이건 비밀이지만 연습실 피아노는 새로운 실험 도구로 많이 사용해요(웃음). 배우는 친구들의 실습용으로도 훌륭하고요. 피아노 테크니션에겐 실험과 경험이 전부이고, 가장 중요해요. 워크숍에서 배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죠. 연주자들과 소통할 줄 알아야 하고 그들의 요구에 바로바로 적응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크릴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피아노 테크니션에게도 몸을 어떻게 쓰는지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도구와 약품, 그리고 지식이 전부인 줄 알았건만, 피아노 테크닉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사람의 몸에 의지하고 있었다.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청각의 훈련은 물론, 도구를 사용해 줄을 돌리고 악기를 조립하는 것은 아주 세분화되어 있고, 각각 최상의 자세와 방법이 존재했다. ‘팔을 이렇게 쓰고’ ‘등 근육에 더욱 힘을 싣고’ 하는 식의 대화는 아주 일반적이었다.

“조율하는 자세를 바트 선생님과 고쳐나갈 때, 피아노를 전공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피아노 테크닉에만 익숙한 다른 테크니션보다 좀 더 쉽게 자세를 고칠 수 있었죠. 연주자에게 자세를 고치는 것은 아주 흔한 경험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발전하는 거예요. 지금까지도 항상 배우면서 새로운 방법을 실험하고 있죠.”

나의 경우, 연주 스케줄에 쫓기면 실험을 하기보다 이미 결정해둔 방식으로 곡을 완성하기에 급급할 때가 허다하다. 예전에는 자세에 대한 실험이나 활 쓰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부터 오히려 내 연주를 위한 연구는 줄어들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산다든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야 하는 예술가에게는 어쩌면 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마지막 수련 _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연구, 그리고 연습

크릴은 자신이 조율한 피아노를 음악가가 연주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힘겹다는 이야기를 했다.

“큰 연주가 있을 때 항상 ‘이 피아노를 클리블랜드 끝에서 끝까지 끌고 다녀도 조율이 일정할 수 있을 만큼 타이트하게 매만지자’고 생각하며 조율해요. 특히 우치다 미쓰코나 도흐나니같이 민감한 음악가들과 함께 일할 때는 더 그렇죠. 너무 긴장이 되어 연주를 잘 보지 않아요. 도저히 연주를 즐길 수 없거든요.”

연주라는 건, 이성과 본능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줄타기다. 최근 타계한 배우 앨런 릭먼이 말했듯, “육체를 본능으로 조정하고, 저 멀리서 나를 관찰하면서 이성을 실시간으로 감독해야” 한다.

이런 본능과 이성의 일체를 이루려면 연주 환경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과 연구가 먼저 이행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피아니스트들은 자신만의 악기를 쓸 수 없다는 점에서 테크니션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피아노의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크릴의 수련에는 연주자들이 각기 다르게 설명하는 이 상태를 빠르게 파악하고, 악기를 각각의 아티스트에게 가장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명연주자들은 충분한 공부를 해서, 자신이 정확히 어떻게 요구해야 할지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우치다 미쓰코는 피아노 건반 하나하나에 분필로 표시를 해서 지시하죠. 음악가들이 예민하게 소리를 듣고, 자신의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기술적, 예술적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제겐 큰 기쁨이에요. 귀가 예민한 음악가일수록, 좀 힘들지만 테크니션으로서 배울 것은 더 많아지죠.”

크릴과 이야기를 마치고 난 뒤,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은 이미지는 어린아이인 그가 농장에서 땅을 바르게 일렬로 일구는 모습이었다.

규칙을 지켜내야 한다는 면에서 음악가들에겐 ‘연습’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틀을 지켜야 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고, 정신적으로도 흔들림 없이 그것을 지켜내야 하니 말이다. 반면 악기 테크니션의 수련은 ‘연구’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땅을 가꾸는 것처럼 그들에겐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고, 선택의 여지도 훨씬 많다.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조금 더 느리고, 그렇기에 자신이 실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내게 크리에이티브, 창의적이라는 것은 어쩌면 반복적 ‘연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가 ‘연습’을 힘들어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지 말이다.

피아노 테크니션 제프리 크릴
클리블랜드 음대 피아노과 졸업 후, 매티아스 바트를 사사하며 피아노 테크니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클리블랜드 음대 헤드 피아노 테크니션을 비롯해 클리블랜드 피아노 콩쿠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전속 피아노 테크니션으로 활동 중이다.

글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는 한국에서 태어나 예원학교를 수석 입학, 재학 중 인생의 멘토 폴 켄터를 만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국 클리블랜드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커티스 음악원을 거쳐 다시 폴 켄터의 문하로 돌아가 클리블랜드 음악원 학사 학위를 마쳤다. 제이미 라레도 교수와 동 학교에서 석사, 전문사 과정을 마쳤으며 2014년 세계 3대 콩쿠르인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1위를 수상했다.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거리 공연 프로젝트 ‘클래시컬 레볼루션 코리아’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2016년 여름 음악 캠프인 앙코르 체임버 뮤직(www.encorechambermusic.org) 음악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동물을 사랑하고, 아이폰 중독자이며, 자연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TV 보는 것을 음악보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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