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

성실하고 솔직하게, 아름다움을 향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4월 1일 12:00 오전

유럽 명가수들의 반주를 해온 헬무트 도이치. 그가 말하는 반주자로서의 긍지

전문 성악 반주자들을 보면 늘 궁금했다. 피아니스트로서 독창적 예술성을 발휘해 비르투오소적 면모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없을까. 성악가의 기질에 맞게 연주 스타일을 바꾸어야 하는 숙명에 회의를 느끼지는 않을까. 성악 반주자는 독창자와 조화를 잘 이루었는지, 성악가의 음색에 풍부한 뉘앙스를 더했는지, 음향적 디테일은 세심하게 표현했는지에 따라 연주력을 평가받으니 말이다. 섬세한 음악성을 추구하면서도, 정작 스포트라이트는 성악가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반주자들의 솔직한 심정도 궁금했다.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Helmut Deutsch)는 반주자로서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다. 물론 그의 명성은 한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통한다. 1945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1960년대에 가곡 전문 반주자로 활동을 시작해 1980년부터 12년 간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의 반주를 맡으며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그와 연주 활동을 해온 음악가들을 나열하면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 바리톤 미하엘 폴레 등 면면이 화려하다. 스물네 살 나이에 빈 국립 음대의 교수가 된 헬무트 도이치는 50여 년간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난 3월 2일 개최된 바리톤 토마스 햄슨의 내한 공연에 동행한 볼프람 리거도 헬무트 도이치의 제자이며, 한국의 피아니스트 김태형도 뮌헨 국립 음대에서 그에게 반주를 배웠다. 여섯 번째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는 헬무트 도이치와 이메일로 만났다. 그는 반주자로서의 사명, 훌륭한 반주자가 갖추어야 하는 조건에 대해 뚜렷한 주관을 드러내며 “평소 하고 싶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질문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선비같이 꼿꼿한 그의 답변을 읽으니 인간적인 면모가 궁금해졌다. 그와 여러 번 연주를 가진 바리톤 송시웅에게 살짝 물었더니 “도이치가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음악에서도, 일상에서도 날카로울 만큼 정확한 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이치는 음악적으로는 완벽함을 추구하면서도 “낯선 성악가와 연주를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할 만큼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연주자다. “작곡가를 존중하여 악보에 쓰인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려 노력한다”는 그의 말에 예술에 대한 경외심도 느껴졌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간 반주자의 전문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주란 피아노 전공자 중 독주자로서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며 석·박사 과정을 제외하고 음악대학교 내에서 반주자를 육성하는 학교는 극히 드물다. 반주자로서 당신의 철학이 궁금하다.

유럽에서도 가곡 전문 반주자라는 직업의 역사는 100년이 채 안 되었다. 과거에는 지휘자나 솔로 피아니스트가 이 일을 맡아 했고, 영국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를 시작으로 전문화되었다. 현재 유럽에서는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전문 교육이 점점 체계화되며 발전하고 있다. 독일어로 코레페티토르라는 용어가 있는데, 오페라의 독창자나 발레의 무용수의 연습을 돕는, 일종의 코치 역할을 하는 피아니스트를 말한다. 코레페티토르와 반주자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두 역할에는 큰 차이가 있다. 코레페티토르는 ‘연습’을 하지만 반주자는 성악가와 함께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두 직업에 대한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관심은 양쪽 모두 지대하며 교과목도 세분화되어 있다. 모두 인간의 목소리를 향한 애정과 서정시에 대한 감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점점 더 발전할 것이라고 본다. 반주자는 성악가에게 종속된 관계가 아닌, 곡을 해석하고 표현하며 완성하는 데 있어 파트너 역할을 한다는 점은 이미 많은 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난 50여 년 동안 많은 성악가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당신은 각 인물의 노래마다 반주법에 어떤 차이를 두는가? 예를 들어 요나스 카우프만과 이안 보스트리지가 같은 곡을 부른다면 당신의 피아노 연주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

이상적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성악가의 음역을 의식하고 신중하게 연주한다. 같은 음역대의 가수라도 높고 부드러운 음색을 지녔다면 베이스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드는 식이다. 성악가의 기질과 유연성은 템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경험이 많은 피아니스트는 상황마다 본능적으로 차이를 감지하며 매 순간 다르게 반응한다.

반주자는 항상 다른 연주자와 동행해야 하는 직업이다. 성악가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음악적으로 소통하는 당신만의 방법이 있는지?

가곡 반주자가 지닌 과제는 실내악 연주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성공적인 현악 4중주에 꼭 필요한 조건으로, 서로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들 수 있다. 부드럽고 친밀한 분위기 또한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관계가 전혀 없는 낯선 성악가와 연주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가까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음악 작업을 통해 서로의 음악을 자극하고, 풍부함을 더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리허설에서 놀라울 정도로 대화도 설명도 전혀 필요 없는, 그저 음악을 통해 서로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인연을 나는 종종 맺어왔다.

 


▲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 중 헬무트 도이치의 모습 ©Hans-Jörg Rindsberg

한 해에 100회 이상 무대에 오르면서 동시에 대학에서 많은 학생을 만나고 있다. 음악적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 젊은 성악가들과 언어로, 음악으로 소통하고 있는데 어려움은 없는가?

수백 번 연주한 ‘시인의 사랑’ ‘겨울 나그네’가 지겹지 않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질문의 답은 물론 ‘아니요’다. 이러한 대작에는 누구나,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예술적으로 높은 경지의 이상적 연주를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노력하는 일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또한 이미 인정을 받은 성악가든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학생이든 상관없이 나의 파트너가 자신만의 이상적인 그림에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는 전혀 상관없다. 나 역시 젊었을 때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노련한 성악가들과 일했고, 지금은 대부분 나보다 어린 성악가들을 만나고 있다. 가곡의 세계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정성과 상상력 그리고 열정이 필요할 뿐이다. 나이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과 수업이나 마스터클래스에서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내 수업의 핵심은 작곡가를 존중하여 악보에 쓰인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라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가사를 통해, 연주를 통해 새롭게 그려지는 그림이나 감정을 관객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입체적으로 상상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라고 조언한다. 이와 함께 각자 지닌 기교적인 면을 발전시키는 것이 이상적인 교육이라고 본다. 또한 음악가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도록 조언할 수 있을 만큼 막역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몇 번 고민을 한 적은 있지만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판단할 수 없어 아직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

그동안 함께 무대에 서기도 하고 콩쿠르를 심사하기도 하며 한국의 성악가들을 많이 만나왔다. 한국 성악가들만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지난 몇 년간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음악가들의 수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늘었다. 한국인 수상자가 없는 콩쿠르는 거의 없을 정도이며,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도 많은 한국인 성악가들을 만날 수 있다. 유럽에서는 한국인들을 ‘아시아의 시칠리아 사람’이라고 부른다. 다른 아시아인에 비해 감정 표현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것은 훌륭한 성악가로 성장하는 데 좋은 조건이다. 한국인들은 탁월한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패기가 넘친다. 한국인들과의 음악 작업은 언제나 즐겁다.

지난해 소프라노 황수미와의 공연에 이어 이번에는 소프라노 임선혜와 무대에 선다. 1부는 슈베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으로, 2부는 말러와 스페인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꾸민다. 프로그램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나?

잘 알려진 레퍼토리이면서도 소프라노 임선혜의 목소리에 잘 맞는 곡을 찾았다. 그녀는 슈베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을 부르기 원했다. 나는 콜로라투라를 완벽히 소화하는 그녀의 유연하고 섬세한 목소리에 스페인 작곡가들의 가곡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2부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덜 알려진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음악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 아름다운 가곡의 세계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이며 이 이상의 꿈은 없다. 

사진 W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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