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공부벌레’가 음악을 택하고, 팔 부상의 아픔을 이겨내 다시 무대에 오르기까지
‘하버드 공부벌레’가 음악을 택하고, 팔 부상의 아픔을 이겨내 다시 무대에 오르기까지
입을 꾹 다문 청년이 한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힘찬 걸음으로 오케스트라를 가르며 무대 중앙에 섰다. 옷차림은 맨 위 단추만 푼 검은색 셔츠. 늘 입던 그대로다. 이곳은 카네기홀 스턴 오디토리움. 28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앞에서 치르는 데뷔 무대인만큼 더욱 긴장되는 순간이다. 포디엄에는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무대 중앙에는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자리했다.
이날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으로 호연을 펼친 이는 스테판 피 재키브(Stefan Pi Jackiw). 한국에서는 아이돌 스타만큼 인기를 누리는 유명인이다. 그는 미국의 대학수능시험인 SAT에서 만점을 받아 하버드 대학에 진학해 심리학을 전공했다. 아버지 로만 재키브와 어머니 피서영이 각각 MIT와 보스턴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이니 그야말로 ‘엄친아’의 표본이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이라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는 재키브를 떠올리면 진땀나는 추억이 있다. 그는 필자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의 상주 연주자로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주 보름 전, 그에게서 이메일이 날아왔다. 팔을 다쳐 연주 일정을 다시 잡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부랴부랴 곡목을 바꿔 대체 연주자를 섭외했다. 그리고 그와의 연주는 5개월 후로 다시 잡았는데,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에게 또다시 이메일을 받았다. 똑같은 이유로 연주를 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무척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자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그를 초청했을 다른 연주 단체들 역시 낭패했을 것이다.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미국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그를 만나 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다친 팔에 대해서는 이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2012년에 벌어진 일이다. 센트럴파크에서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는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3개월 동안 계획된 연주를 소화했다. 그런데 팔에 통증이 느껴졌고, 그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6개월 동안 바이올린을 잡지 않았다. 잘못하면 앞으로 평생 바이올린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연주를 쉬던 기간 동안 무척 어려운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악기를 잡지 못한 6개월 동안 전혀 쉴 수가 없었다. 치료 후 다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쉬면서 평소 호기심을 느끼던 분야를 탐구하거나 새로운 걸 배워보면 어떻겠느냐는 주변의 제안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의지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예정된 연주를 취소하며 음악계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것에 대한 염려도 있었을 것 같다.
여러 사람과 단체가 엮여 있었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20여 건의 연주를 취소해야 하는 끔찍하고 난감한 일처리는 모두 매니저가 해주었다. 사실 연주를 잡고 취소하는 일은 늘 있는 일이니,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가족처럼 일하고 있는 매니지먼트 오퍼스3은 모든 일을 순조롭게 처리해주었고, 나의 입장도 이해해주었다. 내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회복 과정은 어땠나?
6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바이올린을 잡기 시작했다. 첫 주에는 하루에 2분, 그 다음 주는 4분… 아주 조금씩 연습 시간을 늘려갔다. 지금은 완전히 정상이지만, 무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연주만 선별해 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연주회에 쏟을 물리적 시간이 늘어났다. 정신적인 여유도 생기다 보니 작품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예전에 비해 만족스러운 연주를 하고 있다.
정말 다행이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던 때를 이야기해준다면.
나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고, 프로 음악 세계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다. 오늘날의 보스턴은 훌륭한 교수진들과 재능 있는 학생이 많지만, 내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던 시기만 해도 모든 게 뉴욕에 집중되어 있었다. 최고의 학생들은 모두 줄리아드 음악원의 연습실에 있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당시 나는 보스턴에서 촉망받는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였다. 당시 로베르토 아바도/보스턴 심포니와 협연하기로 했던 알프레트 브렌델이 연주를 취소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고 협연자 오디션에 지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집 전화기에 보스턴 심포니로부터 함께 연주하자는 음성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아바도는 같은 해 시카고 심포니의 협연자로 나를 초대했다. 이후 보스턴에서 독주회를 가졌는데 지금의 매니지먼트사에서 이를 보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대답은 ‘예스’였다. 이 모든 일이 열여섯에 일어난 일이다.
스스로 음악성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나?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과학자다. 예술적 영감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문학자였지만 ‘표현 방식’을 늘 고민하셨던 분이다. 그림도 무척 좋아하셨다. 태어나서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거의 매년 여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전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음악을 듣던 기억은 생생하다.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 이름이 있나?
여름방학마다 한국에 놀러 가면 할아버지가 ‘조연이’라고 부르셨다. 피조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 한국 연주자들의 콩쿠르 입상 소식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콩쿠르 시스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단점이 있겠지만, 나는 좋은 면을 더 보는 편이다. 입상자가 얻는 명성도 중요하고 부상으로 따라오는 연주 기회들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에는 좋은 악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거나 유수의 매니지먼트와의 계약이 성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연주자에게 목표를 가지고 음악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장점이다.
정작 본인은 콩쿠르 경험이 전혀 없는데.
콩쿠르를 ‘기회 찾기’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도전 없이도 연주 기회를 얻었으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와 함께 찰스 아이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제레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고, 아이브스의 소나타는 지금껏 한 번도 연주해본 적이 없어 이 도전이 무척 기대된다.
아이브스의 작품은 처음 연주하는 레퍼토리지만, 반대로 똑같은 곡을 반복해서 연주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무대에 오르기 전 익숙한 곡에 대한 긴장감은 어떻게 유지하는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작품은 셀 수 없이 많이 연주했다. 앞으로도 연주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연주 경험이 많은 곡일수록 시간을 들여 꼼꼼히 연습하는 편이다. 연주자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연주에 대한 계획을 정확히 세운 후 실제 연주에서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매 연주마다 내가 설정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만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만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그 기준이란 절대적인 것인가?
비행기 안에서 크리스티안 테츨라프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는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까지 다섯 번을 다시 돌려 보았다.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이었다. 내가 해석한 멘델스존의 작품과는 대척점에 놓인 듯 날것의 야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주를 통해 쌓은 경험, 그리고 나와 다른 연주를 보며 느끼는 감상의 축적을 통해 나의 예술 세계가 점점 더 성숙해질 것이라 믿는다.
5월에 한국에서 서울시향과 연주회를 갖는다. 지휘봉을 잡을 마리오 펜차고와는 오랜 인연이라고 들었다.
마리오 펜차고와는 2004년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와 크라이슬러의 작품을 연주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로부터 6년 후 2010년에 내슈빌 심포니와의 연주에서 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 감사하게도 다섯 번이나 자신의 연주에 독주자로 초청해줬다. 지금은 거의 매년 그와 연주회를 갖고 있다. 서울시향과는 스무 살에 첫 연주를 하고, 10여 년 만의 연주라 기대가 크다.
필자는 재키브가 ‘엄친아’ 또는 마케팅으로 인한 반짝 스타로만 평가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종종 느낀다.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는 순간 그는 바이올린‘도’ 잘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누군가에게는 그의 바이올린이 ‘덤’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 바이올린은 ‘전부’다.
푸릇푸릇한 시기를 떠나보내는 연주자에게 경험과 생각이 여무는 것만큼 이상적인 과정은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재키브의 말을 들으니 그가 소중한 ‘여유’를 얻은 것 같아 기쁘다.
사진 크레디아·Carnegie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