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엽·양성식·양성원 일가

아버지의 음악 유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5월 1일 12:00 오전

올해 미수를 맞은 아버지 양해엽(바이올리니스트)에게 바치는 아들 양성식(바이올리니스트)과 양성원(첼리스트)의 아름다운 이중주

지난봄 의미 있는 음악회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있었다. 1960~1970년대 한국음악계를 대표하는 우리나라 바이올린 1세대인 양해엽 선생의 미수(米壽)를 기념하며 음악가인 두 아들과 제자·후배들이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담아 음악회를 연 것이다. 이날 무대에는 장남인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과 차남인 첼리스트 양성원을 비롯해 현재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제자와 후배 연주자들이 한자리에서 아름다운 앙상블을 선사했다.

청중을 놀라게 한 뜻밖의 선물도 있었다. 연주 순서에는 없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깜짝 등장이었다. 그녀는 영국에서의 바쁜 스케줄을 쪼개어 자신의 스승 양해엽 선생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바흐의 ‘샤콘’에 담았다. 가슴에서 끌어올린 맑은 바흐 선율은 오래 시간 쌓아온 양해엽 선생의 지난 세월과 닮아 있었다. 이날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과 첼리스트 양성원의 무대였다. 그들 형제가 들려준 할보센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파사칼리아는 고요함을 뚫고 자유의 공간 속으로 날아올랐다. 연주가 끝나자 어두운 객석 사이로 조명이 어느 한구석을 비췄다. 이날 무대의 주인공 양해엽 선생이었다. 그는 감동스런 마음을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게 음악은 한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안과 밖, 외면과 내면을 이어주고 있었다.

이제는 음악이라는 한길을 함께 걸어가는 세 부자.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가족을 조명하는 ‘ARTS IN FAMILY’의 첫 시작은 양해엽, 양성식, 양성원 세 부자와 함께 한다.

한국 바이올린 역사의 뿌리 | 바이올리니스트 양해엽

한 그루 나무가 땅속 깊이 뿌리를 뻗어내려 거목으로 자라기까지의 고난만큼이나 양해엽 선생이 지내온 음악가로서의 여정은 험난하고 고단했다. 그 여정을 함께했던 가족들. 특히 한국 음악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두 아들의 존재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 같은 것이다. 그는 엄격한 스승이고 아버지였지만 가슴에 꽃을 숨겨둔 로맨티시스트였다. 40여 년 전 흔치 않던 이민을 결단할 만큼 그는 자녀를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가장이었고, 우리 음악계와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 일선에서 열정을 다했던 예술가였다. 시간이 흘러 황혼을 맞은 그는 이제 어엿한 음악가 아들을 둘이나 둔 아버지가 되었다.

파리국립음악원 졸업 후 서울대 음대와 프랑스 말메종 음악원에서 교수를 역임한 양해엽은 정경화·김남윤·피호영·김다미 등 한국의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연주자들을 키워낸 교육자다. 한국 역사의 상처를 안아야 했던 그는 한국전쟁 직전 서울대 예술대학 음악학부를 졸업하고 전쟁 중 해·공군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근무할 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테크닉적으로는 요제프 요아힘 악파의 견고한 음악성을 바탕으로 카를 플레슈의 예술적 기법(The Art of Violin Playing)을 이어받게 되는데, 이런 교육 배경에는 음악 스승이던 안병소 선생과 카를 플레슈 문하의 손꼽히는 제자인 리카르도 오드노프스프의 영향이 컸다. 당시 양해엽은 19세기의 거장 요아힘과 20세기 뛰어난 바이올린 교육자 카를 플레슈의 정통 바이올린 학파의 교육을 이어받은 한국 바이올린계의 미래였다.

“오른손 주법이 완전하지 못하던 내가 프랑스 유학을 하며 그 부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크나큰 행운이었지요.”

모든 것이 궁핍하던 시절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힘들었던 한국 음악계는 그가 도입한 좋은 바이올린 교재를 통해 한걸음 도약할 수 있었다. 프랑스 말메종 음악원에서 8년간 교수로 지낸 그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초대 주불 한국문화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양국 문화예술 교류에도 크게 기여했다. 우리의 전통음악에도 관심이 높아 ‘한국불교음악’ 프랑스어판과 독일어판 책도 저술했다.

“자식들을 뛰어난 음악가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예술을 좋아하게 하고 싶은 바람은 있었지요. 두 아들은 모두 음악을 하고 셋째 아들은 훌륭한 사업가로, 딸은 디자이너로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을 다하고 있으니 감사할 뿐이죠. 장남 성식이는 음악뿐 아니라 리더로서 자질과 능력이 뛰어나고 차남 성원이는 성실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에요. 모두 자기 성격이 분명하고 음악에 대해서도 열정이 대단하고요. 프랑스에서 아들들을 유학시키며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모두 잘 극복하고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음악가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감사하고 흐뭇합니다.”


▲ 네 남매가 함께

그를 위해 펼쳐진 사랑의 콘서트에는 두 아들과 함께 그가 키워온 제자들도 무대를 빛냈다. 자상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엄격한 교육자로 유명한 그였다. 약속과 예절, 정도를 중시하던 그는 재주가 있지만 요령을 피우는 학생, 잘못을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학생에게 가장 무서운 매를 들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것이 ‘성실’이지요. 성실한 사람을 당해낼 자가 없어요. 음악은 연습을 통해 테크닉을 익히고 연주력이 안정되어야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걸 자연스럽게 나타낼 수 있지요. 하루하루 매일 연습해야 하는 건 연주자의 사명 같은 것이에요. 나는 그것을 가장 중요시했습니다.”

하지만 호랑이 선생님의 마음도 이제는 많이 너그러워졌다. 연주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풀이 죽은 어린 친구들을 보면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싶다.

“모든 길이 그렇지만 음악의 길은 참 고되지요. 우리 아이들도 내가 무척 엄하게 가르쳤지만 뒤돌아서 안쓰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재주가 뛰어나고 예전 아이들보단 훨씬 테크닉도 우수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예술가의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몸 매무새를 가다듬고 간단한 운동을 하는 그는 요즘 산책을 자주 한다. 바쁘게 지내느라 뒷전이던 삶의 소소한 기쁨도 누릴 수 있으니 마음도 평화롭다. 그러면서 요즘 그가 꿈꾸는 것이 하나 있다. 부친이 물려준 진안 땅을 잘 가꿔 예술가들을 위한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과 함께 몸과 마음의 휴식과 평안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들이 머물다 가고 싶어 하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황혼의 그가 꾸는 꿈 속에는 여전히 그가 사랑했던 음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음악 캠프도 열고 다양한 클래식 음악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좋을 것 같아요. 해외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들들의 음악 인맥과 사업가인 아들이 뜻을 모아 의미 있는 이 일이 잘 추진된다면 장차 세계적인 명소로 이곳이 사랑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진안으로 내가 아끼는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싶어요. 음악과 자연이 아름다운 나의 고향으로 말이지요.”

함께하는 기쁨을 맛보다 | 장남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

대구 가톨릭대 교수로 지내던 그는 요즘 서울을 비롯해 해외 다양한 곳에서 연주자로서 더 가깝게 청중과 교감을 나누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하우스음악회와 카페 성수에서 색다른 분위기의 예술 무대를 선사하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할 일이 많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서울대의대 안규리 교수님이 이끄는 의료봉사단체인 라파엘클리닉에 가서 음악회를 했죠. 음악이 필요한 곳에서 연주를 들려주는 기쁨이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음악으로 나눔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죠.”

양성식이 프랑스로 유학을 간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타고난 음악성으로 그는 1988년 카를 플레슈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17세 때 파가니니 콩쿠르 3위를 비롯해 롱 티보 콩쿠르,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주목받았다. 더구나 13세에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최연소 입학한 지 3년 만에 정규과정을 마치고 음악원 석사과정에 수석 입학할 만큼 그는 뛰어난 재원이었다.

“어린 시절 유학간 거라 언어 적응이 가장 어려웠어요. 프랑스는 이론 위주의 철저한 교육이 완성된 후 실기 교육을 하기 때문에 가자마자 이론 공부에 매달려야 했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힘든 시간을 잘 극복한 경험이 논리가 바탕이 된 연주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 장남 양성식의 네 살 때 모습

▲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의 어린 시절

어린시절 유학 생활을 하며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있어 힘이 많이 되었다. 누구보다 아버지 양해엽 선생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가장 의지하고 싶은 음악 선배였다.

“아버지는 외국에 일찍 나간 저희 남매에게 예의범절과 규율을 굉장히 중시하셨어요. 밖에서는 늘 바쁘고 열정적이셨죠. 아버지의 엄격한 부분을 어머니가 늘 따뜻하게 감싸주셔서 아버지보단 어머니와 더 친밀했던 것 같아요. 안정적으로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서울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프랑스행을 택하신 건 정말 대단한 결단이었죠.”

시간이 흘러 이제 양성식도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자식을 위해 정말 큰 희생을 하셨구나 싶어요. 워낙 대식구가 함께 살았고 좁은 공간에서 동시에 연습을 하다 보니 소리에 예민한 사람들이라 항상 누군가의 연주를 듣는다는 것이 힘들기도 했죠. 하지만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좋은 연주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정경화 선생님은 아버님께 어린 시절부터 배웠는데, 저를 초등학교 때 보셔서 그런지 아직도 아이 대하듯 무척 귀여워해주세요.(웃음) 예전에 선생님이 연주하시면 제가 반바지에 재킷을 입고 꽃을 전해주곤 했거든요. 지난 공연에도 아버님을 위해 무대에 서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던지.”

인생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개성을 중시하는 프랑스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그야말로 문화예술의 천국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일괄적으로 짜여진 시간이 아닌, 저마다 다른 인생의 시간을 인정해주고 기다려주었다. 좋은 공연이 어디서든 늘 열리고 카페에 앉아 있으면 유명한 예술가들이 옆에서 차를 마시는 나라. 프랑스는 양성식에게 예술의 날개를 달아줬다.

“아이작 스턴, 그뤼미오 같은 20세기 대가의 마지막 연주를 직접 무대에서 들으면서 큰 영감을 받았죠. 연주를 정말 잘하고 싶었고, 욕심이 많이 났어요. 그래서 연습에 매달렸죠.”

그는 어린 시절 그렇게 열심히 했던 시간들이 훗날 음악을 성숙하게 하는 더 강한 디딤돌이 되었다는 걸 요즘 더 깨닫는다. 나이가 들면 테크닉도 그렇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것이 당연한데, 이상하게도 훨씬 덜 피로하고 요즘 오히려 열정이 더 커져간다고 하니 그 당시의 혹독했던 훈련의 시간들이 쌓인 결과인 듯하다.

“어릴 때는 최대한 깔끔하고 완성도 높은 연주를 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러기 위해 빠르고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했고요. 원하는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테크닉이 필요한 건 맞지만 지금은 음악 안에 담긴 메시지를 더 깊이 있게 표현하는 연주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이 가고 또 그런 연주를 추구하게 되네요.”

2011년 창단해 음악감독을 맡고있는 에라토 앙상블 활동은 양성식에게 실내악이 주는 새로운 기쁨을 느끼게 해준 경험이었다.

“솔로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실내악을 하니까 하나의 음악을 향해 한마음이 되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이 무척 즐거워요. 음악적인 색깔이 다른 단원들을 이끌고 조율해야 하는 책임감도 크지만 개인적으로 앙상블이 이루는 밸런스가 무척 좋고 만족스러워요. 함께여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 같고요.”
그는 교육자로서도 순수한 가르침을 준 자신의 스승들처럼 다음 세대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선생님이고 싶다고 말한다.

“요즘은 젊은 연주자들의 실력이 뛰어나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 소식도 많고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의 성장도 눈부시지만 이제 좀 더 섬세한 부분에 마음을 쓸 시기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시간이 있음을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죠. 한 사람이 성장하는 시기가 모두 다르고 저마다 특별한 시간들을 갖고 있는데 우린 너무 획일화된 시간 속에 자신을 규격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각자에게 필요한 시간을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한데 말이지요.”

그는 가족을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그러면서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운명적인 공동체라고 말한다. 장남으로서의 무거웠던 책임감은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올여름 7월 27일부터 8월 4일까지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에서 연주와 마스터 클래스가 끝나면, 스위스에서도 열흘 동안 슐로모 민츠 펠릭스 아요와 마스터 클래스를 펼친다. 이후 일본 나고야에서 한 달 동안 연주 투어를 갖는다.

“요즘은 연주할 때 들리는 제 소리가 좋아요. 예전엔 늘 비판적이었는데 제 음악에 심취할 수 있어서 그것이 좋아요. 소리를 내는 그 자체에서 희열이 느껴지고요. 그러다 보니 듣는 사람들도 연주가 마음에 많이 와 닿는다고 하더군요. 솔직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걸 많이 깨닫게 되었어요.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기에 저도 음악으로 그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전하고 싶어요.”

가족은 자연과 가장 가까워지는 것 | 차남 첼리스트 양성원

양성원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와 형은 산 같은 존재였다. 바이올린의 대부인 아버지와 바이올린 신동이었던 형이 쏟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그는 바로 옆에서 바라보며 자랐다.

“음악가의 길이 험난하단 걸 늘 느꼈어요. 저희 삼형제 모두 활동적인 성격이어서 가만히 집에 앉아 연습하기는 어려운 성격이었죠. 운동도 좋아해서 모두 오토바이 타는 걸 즐겼어요.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연습해야만 하는 음악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웃음)

나중에서야 깨닫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라고 했던가. 양성원도 시간이 지날수록 낯선 외국땅에서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감당해야 했던 아버지의 결단력이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그 뒤에 따랐을 아버지로서 책임감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아버지는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한국을 본다는 걸 늘 강조하셨어요. 요즘 제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보니 자꾸 그때의 아버지를 돌아보게 되네요. 아버지의 존재감은 정서적으로 든든한 기둥이었죠. 아버지는 프랑스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많이 존경받고 계셨기 때문에 자라면서 뿌듯하던 기억이 있어요. 저희에게 뿐 아니라 아버지 자신이 질서와 기본을 중요시 하셨죠.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들 삶의 기틀이 되어주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먼저 유학을 하면서 세계적인 콩쿠르 수상을 휩쓴 형 양성식도 양성원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악기는 달랐지만 형과는 음악 안에서 통하는 것이 많았다.

“어린 시절, 형은 굉장히 연습을 많이 했어요. 형도 운동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래도 혼자 방에서 연습을 하곤 했어요. 전 아버지 근무처인 주불 한국문화원에 가서 이런저런 책도 보고 또 틈나면 박물관에도 가고 좋은 경험을 많이 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아버지와 형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훗날 제가 음악이라는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큰 디딤돌이 되어준 것 같아요.”


▲ 첼리스트 양성원의 연주 모습

왕성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양성원은 작년 세종체임버 시리즈를 통해 다양한 실내악의 매력을 전하며 애호가와 대중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를 선보였다. 올해 역시 총 4회에 걸쳐 4월 28일부터 11월 6일까지 세종체임버홀에서 실내악 연주를 갖는다. 피아니스트 임동혁·김정원·문익주,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김다미·크리스텔 리, 콰르텟 k, 트리오 오원 등 국내외 유수의 아티스트들도 참여해 매력적인 선율을 선사한다. 6월 9일부터 10일까지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감성을 담은 멘델스존과 도흐나니, 쇼송, 브람스 작품을 연주한다. 8월에는 25일부터 26일 양일에 걸쳐 프랑스 연주자들의 섬세하고 화려한 감성을 만날 수 있다. 11월에는 작년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을 함께 연주한 피아니스트 엔리코 파체와 리스트의 ‘잊혀진 로망스’를 비롯해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연주한다.

“쉬운 작품보다는 실내악의 세계를 더 친밀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의미 있고 다양한 작품을 중심으로 선곡했어요.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 시대와 나라의 색채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요. 악보라는 건 결국 마음의 언어를 가장 가깝게 표현한 것이죠. 음표를 통해 연주자는 그걸 표현하는 거고요. 음표 너머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려는 것, 그것이 창조이고 예술이지요. 그래서 예술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걸 깨닫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찾는 과정을 통해 훨씬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고,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순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누구보다 예술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아온 그이기에 예술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다.
“삶이란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의 연속이잖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수록 감동을 줄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겠죠. 예술은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죠. 그래서 예술 교육은 꼭 필요한 것이고요.”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와 가정을 이룬 그는 아버지 양해엽 선생의 엄격함 속에 숨어 있던 사랑을 지금 자녀들에게 전하고 있다.

“가족은 자연과 가장 가까운 것 아닐까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낳아 키우고 장성시켜 저희가 또 다른 가정을 이룬 건 정말 신비로운 일이죠. 가정이 생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우주의 법칙 같아요. 음악은 우리 가족을 더 단단하게 연결해주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5월이다. 힘든 인생의 길목에서 마지막 기댈 곳임을 알면서도 우리네 가족이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보다 무심한 마음 표현에 익숙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떠오른 것은 김남조의 시 ‘너를 위하여’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장성한 아들들을 아기 보듯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양해엽 선생의 눈빛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아버지의 음악 유산. 이들은 사랑하는 방법을 음악으로 배워온 사람들이다. 우주의 신비 속에 탄생한 가족이 빚어내는 음악의 3중주는 어떤 빛깔일까?

사진 심규태(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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