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의 ‘오를란도 핀토 파초’로 한국무대 데뷔하는 연출가 파비오 체레사. 그가 그려낼 비발디의 아름다움
국립오페라단의 ‘오를란도 핀토 파초’로 한국무대 데뷔하는 연출가 파비오 체레사. 그가 그려낼 비발디의 아름다움
“청중이 되었다고 상상해봐. 표를 사고 넥타이를 맸어. 극장에 도착해 좌석에 앉지. 불이 꺼지고 막이 열려. 무엇을 보고 싶어?”
파비오 체레사(Fabio Ceresa)는 스스로 늘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의 대답으로부터 상상력 가득한 무대가 완성된다.
이탈리아 출신의 파비오 체레사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극장에서 9년간 조연출로 재직하며 탄탄한 경험을 쌓은 연출가 겸 대본가다. 2010년 연출 데뷔 이후 활발히 뉴 프로덕션을 선보여온 그는 거대하게 흩날리는 천, 어두우면서도 오묘한 색감, 풍성한 의상 등 주로 판타지적 요소를 무대에 구현해왔다. 지난 한 해 동안 그는 벨리니 ‘청교도’, 푸치니 ‘나비부인’, 마스카니 ‘굴리엘모 라트클리프’를 연달아 선보였고, 지난 4월에는 인터내셔널 오페라 어워즈에서 최우수 신인연출가상을 수상하며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5월 18~21일, 국립오페라단의 ‘오를란도 핀토 파초’로 한국의 청중과 첫 만남을 가진다. 국내 초연되는 이 작품은 중세의 영웅 오를란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사랑의 작대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얽히고설킨 등장인물의 관계가 흥미를 자아낸다. 또한 마법과 환영 같은 판타지적 요소가 연출가의 무궁한 상상력에 힘입어 관객의 상상력을 120% 끌어올린다.
‘오를란도 핀토 파초’의 초연을 앞둔 체레사를 이메일로 미리 만났다. 창의적인 발상으로 가득한 그의 이야기는 다가올 무대의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오페라 연출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항상 마음속에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내가 법조인이 되기를 바랐다. 뜻에 따라 법대를 졸업했지만, 결국 법전을 서랍에 넣어버리고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라 스칼라극장 조연출로 9년을 일하며 연출가로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됐다. 음악을 사랑하던 내게 연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앞으로도 다른 일은 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
대본가로도 활동한다. 극작 경험은 연출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대본가와 연출가는 ‘전혀’ 다른 직업이다. 각각의 작업은 서로 다른 특성을 요구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사실 전통적인 오페라 대본 분석은 생각처럼 연출에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연출가에게 있어 출발점은 대본이 아니라 음악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연출가적 관점이 대본을 쓸 때 적용되기도 하는지?
연출을 하면 할수록, 대본을 쓰며 그것을 무대에 옮긴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이는 시간과 공간, 경제적인 자원 사용에 있어 오차의 범위를 자연스레 줄여준다.
오페라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가?
역시 ‘구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아이디어는 사람이 아닌 아리아 속에 담겨 있다. 가능한 한 손을 위로 뻗어 이것을 낚아챈 후 땅 위로 옮겨와야 한다. 이 작업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첫 아이디어로 무대가 완성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완벽한 구상을 위해 계속 다시 시도해야 할 절망적인 상황이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일단 아이디어를 찾아내기만 하면, 힘겨운 경기는 끝난다. 그 후로는 마치 옷을 만들 듯이 잘라내고, 꿰매고, 다림질하며 이런 선물을 내려준 하늘에 감사하는 일만이 남는다.
평소 작업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얻나?
나 자신을 ‘예술 도둑’이라 생각한다. 연출가 루카 론코니의 환상, 파트리스 셰로의 시적 순수함, 리처드 존스의 쓰디쓴 광기 같은 빛나는 재능을 가능한 한 많이 ‘훔치고’ 싶다. 특히 데버러 워너의 연출은 내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늘 보석 도둑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이루어진 셈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체레사표 연출
국립오페라단과의 첫 작업이고, ‘오를란도 핀토 파초’ 역시 당신의 첫 작품이다. 이번 무대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오래전부터 바로크 오페라, 그중에서도 특히 비발디의 것은 모두 외우고 있을 만큼 열렬한 팬이었다. 국립오페라단으로부터 ‘오를란도 핀토 파초’를 의뢰받았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비발디의 오페라에는 헨델·하이든 등 자주 공연되는 다른 바로크 작곡가의 작품 못지않은 잠재성이 상당하다. 이번 무대가 비발디 오페라의 아름다움을 한국에 알리고 ‘비발디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오를란도 핀토 파초’는 중세를 배경으로 하며, 원작은 르네상스, 오페라는 바로크 시대에 완성됐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동시대의 청중과 무엇을 공유하고 싶은가?
유럽 문학의 그 어떤 영웅도 오를란도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중세 샤를마뉴 대제의 전설적인 수호기사인 그는 11세기 말엽의 ‘롤랑의 노래’에서부터 현대의 각색본에 이르기까지 9세기 가까이 시인들의 상상력을 지배했다. 많은 이의 상상 속에서 오를란도가 맡은 역할은 고대의 헤라클레스와 유사하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영웅이 필요하다.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늘 곧으며, 언제든지 정의를 위해 무기를 손에 쥐는… 그런 면에서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은 현대의 오를란도 아닐까?
미니멀한 무대를 선보인 전작 ‘오르페오’에 비해 국립오페라단 ‘오를란도 핀토 파초’는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장치를 사용한다. 같은 바로크 작품을 전혀 다르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로시의 ‘오르페오’는 모든 것이 주인공 개인의 비극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극적 구조의 핵심이 되는 ‘감정’은 물리적이 아닌 추상적 공간을 필요로 한다. 반대로 ‘오를란도 핀토 파초’는 볼거리의 향연이다. 저승의 사제로 등장해 님프, 인어, 유령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합창단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마법’을 기반으로 한다. 날개달린 마녀부터 마법 검, 황금나무의 가지, 죽음의 독약, 주술을 통한 등장인물의 출현까지. 이 많은 요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 위로 올라타는 수밖에!
시계·톱니바퀴·오렌지와 같은 상징적인 모티브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20세기의 비평가들은 바로크 시대를 ‘거울과 시계의 시’로 정의했다. 거울의 반사적인 유희와 시계 속 톱니바퀴는 복잡하면서도 환상적인 작품의 사건과 잘 맞아떨어졌고, 이를 통해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연출을 선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거대한 시계의 내부를 에르실라의 궁전으로 설정했다. 그곳의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감에 따라 몽환적인 배경, 초현실적인 상황, 오렌지와 같은 환영의 공간이 드러난다. 이곳에서 이성은 상상력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작품의 콘셉트를 두고 파트너인 의상 디자이너 주세페 팔렐라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우리는 ‘리얼리티를 죽이는’ 잔혹한 범죄의 ‘공범자’다! 극장은 꿈과 상상력의 집합소다. 의상의 아름다움, 무대 이미지의 힘, 시적인 조명 등 모든 요소가 모여 ‘오페라’라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극장에서 이를 제거하는 것은 현대화가 아닌,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현장에서 보는 공연은 탄성을 속삭이게 만드는 유일한 예술이다.
당신이 느끼는 바로크 오페라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사실 현세대는 19세기 오페라의 자손이다. 이 시기 오페라의 목표는 ‘진실’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푸치니 ‘나비부인’의 초초상에게 큰 감동을 받는다. 이는 아리아 속에서 진정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크 오페라는 이와 거리가 있다. ‘진실’이라는 요소는 아직 태동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자유로운 ‘상상’이 날아다닌다. 막이 오르면 거대한 만화경에 눈을 가져다 댄 것처럼, 수천 가지 모습이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것을 보게 된다. 아리아는 폭풍우 치는 바다, 파도에 요동치는 배, 장미, 바람, 별의 이야기를 담는다. 하나하나가 짙은 향기를 발산하는 꽃이다. 19세기 오페라가 성숙기의 음악과 성장의 아픔을 보여준다면, 바로크 오페라는 우리의 일상이 꿈과 같았던 어린 시절의 금빛 세상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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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오 체레사가 말하는 ‘오를란도 핀토 파초’의 등장인물
“다른 어떤 오페라도 이 작품만큼 복잡할 수는 없다. 마치 긴 사슬처럼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사랑을 하고 엇갈린 사랑을 받는다. 오리질레는 그리포네를 사랑하고, 그리포네는 티그린다를, 티그린다는 아르질라노를, 아르질라노는 에르실라를, 에르실라는 오를란도를, 오를란도는 안젤리카를 사랑한다.”
에르실라 에르실라 왕국의 여왕
“아름답지만 사악한 마녀. 대본에서 힌트를 얻어 날개를 달았다. 이번 연출에서 그녀가 알에서 태어나 둥지에서 잠을 자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르질라노 에르실라의 수호 기사
“에르실라에게 빠진 전사로 심금을 울리는 인물. 순수한 면이 골렘(영혼이 없는 흙덩어리 인형)을 연상시켜 조각상이었다가 마법으로 생기를 얻도록 설정했다.”
티그린다 에르실라 왕국 신전의 여사제
“아르질라노를 두고 에르실라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낀다. 심지어 여왕을 독살하려고 시도한다.”
오를란도 에르실라를 처단하려는 기사이자 주인공
“아이러니하게도 노래를 제일 적게 부른다. 그래서 일종의 희극적인 인물로 연출했다. 그의 유쾌한 가벼움이 오페라의 매력을 더할 것이다.”
브란디마르테 오를란도의 친구이자 멘토
“오를란도와 쌍벽을 이루는 주인공으로 현명한 인물이다. 젊고 무모한 오를란도와 조심스럽고 이성적인 브란디마르테 둘 사이의 다툼으로 인해 재밌는 막간극이 펼쳐진다.”
그리포네와 오리질레 브란디마르테의 남녀 동료이자 위기에 처한 커플
“오리질레는 그리포네를 사랑하지만, 그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적 티그린다에게 호감을 가진다. 이것으로 부족한지 비발디는 둘의 성적 정체성까지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포네에게 거절당한 오리질레는 남자(오르다우로)로 변장한 후 그리포네의 곁을 맴돈다. 그러나 그리포네는 티그린다에게 접근하기 위해 여시종(레오딜라)으로 가장한다.”
안젤리카 오를란도가 사랑한 공주
“이 모든 연결고리는 안젤리카에 이르러 완성된다. 오를란도가 사랑하는 공주 안젤리카는, 오를란도를 시험하기 위해 에르실라가 불러낸 환영이며 말을 할 수 없기에 춤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녀가 무대에 등장하는 시간은 단 몇 분에 지나지 않지만, 공연 중 가장 짜릿한 순간을 선사한다.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