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페라 극장의 ‘욜란타/호두까기 인형’

오페라가 발레를 만났을 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5월 1일 12:00 오전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 ‘호두까기 인형’. 연출가 체르냐코프는 두 작품을 연속성을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 ‘호두까기 인형’. 연출가 체르냐코프는 두 작품을 연속성을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 차이콥스키 당시의 살롱 분위기를 연출한 무대. 가운데가 욜란타(소프라노 소냐 욘체바) ©Agathe Poupeney

러시아 연출가 드미트리 체르냐코프(Dmitri Tcherniakov)의 천재적 아이디어로 제작된 파리 오페라 극장 프로덕션의 ‘욜란타/호두까기 인형’이 3월 9일~4월 1일 가르니에 극장에 올랐다. 차이콥스키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오버랩한 이번 작품은 2015/2016 시즌 프로그램 중 가장 창의적인 기획으로 기억될 것이다. 프랑스 전역의 영화관에서 상연하기 위해 프랑스 국영 TV의 협력으로 실황 촬영된 3월 17일 공연을 찾았다.

서로 다른 두 작품을 연속성을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고안한 ‘욜란타/호두까기 인형’은 음악사에 남을 기념비적 작품임에 틀림없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1892년 12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같은 날 초연했다는 것뿐. 이후로는 한 번도 함께 공연된 적이 없었기에 실로 124년 만의 역사적인 순간인 셈이다.

차이콥스키가 ‘욜란타’와 ‘호두까기 인형’을 함께 초연한 이유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작품을, 때로는 세 작품까지 함께 공연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념적 근원이나 테마의 공통점을 떠나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발상에 따라 짜깁는 식이었다. 그러면 차이콥스키의 이 두 작품의 경우는 어떤 연관성이라도 있었을까? 체르냐코프에게는 분명 그랬다. 그는 인터뷰에서 두 작품을 ‘딥티크’(diptyque, 문학·연극 등의 2부 형식) 형태로 무대에 올리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체르냐코프에겐 모든 러시아 오페라 작품을 연출하겠다는 광적인 목표가 있었다. 유럽인에게 알려진 작품이든 아니든, 이 프로젝트는 그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처음에 그는 ‘욜란타’와 함께 무대에 올릴 작품을 찾았다. 초연 당시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공연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난 124년간 이 작품이 한 번도 함께 공연되지 않았던 것을 염두에 두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에서 쇤베르크까지 여러 작곡가의 작품을 뒤졌으나, 여러 시도 끝에 ‘호두까기 인형’ 외에는 ‘욜란타’와 함께 공연될 작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독특한 부분은 두 작품이 음악적으로 같은 본질을 지녔다는 점이다. 체르냐코프는 차이콥스키의 음악 수첩과 박물관의 고문서 등을 뒤지며 ‘욜란타’와 ‘호두까기 인형’의 음악적 영감이 같은 페이지에 쓰여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두 작품은 차이콥스키가 죽기 전에 작곡한 교향곡 6번 ‘비창’과 유사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즉, ‘욜란타’와 ‘호두까기 인형’은 비록 장르와 줄거리는 다르지만 음악상으로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또 다른 ‘비창’이라는 것이다.

사실 오페라와 발레는 여러 세기 동안 같은 극장의 지붕 아래 서로 별 흥미를 보이지 못한 채 공존하고 있다. 이점에서 둘을 하나의 테마로 엮는 것은 환상적인 아이디어였다. 장르를 떠나 두 작품을 결합시키고자 한 체르냐코프의 염원은 결실을 맺었다.

체르냐코프는 공연을 두 파트로 나누며 ‘욜란타’와 ‘호두까기 인형’을 고립시키지 않으려 힘썼다. 참고로 ‘욜란타’는 단막 오페라로 공연에 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며, 2막으로 구성된 ‘호두까기 인형’ 역시 비슷하다. 1892년 초연 시 각 작품들은 1·2부로 나뉘어 차례로 공연됐다. 반면 체르냐코프의 연출에서는 하나의 스펙터클로 연결돼 발레가 오페라의 플롯을 발전시키며 거울처럼 되받는다.

총 3막으로 러닝타임 4시간 5분인 이 공연에서 2막은 ‘욜란타’의 파이널과 ‘호두까기 인형’의 도입으로 구성돼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연결된다. 이를 위해 체르냐코프는 ‘호두까기 인형’의 대본을 다시 썼다. 주인공 클라라는 이 작품의 대본이 된 뒤마의 원작에 나오는 주인공 마리 역으로 등장한다. 작은 아버지 드로셀마이어는 원작과 동일하다. 반면 왕자 대신에 보데몽이 등장하는데, 이는 ‘욜란타’에 나오는 캐릭터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어머니, 의사 역으로 분한 무용수들도 성악가들이 ‘욜란타’에서 입었던 의상을 입고 다시 등장한다.

사랑을 통해 되찾은 광명, ‘욜란타’

파리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분주하게 활동 중인 프랑스 지휘자 알랭 알티놀뤼(Alain Altinoglu)의 지휘로 ‘욜란타’의 막이 오르자 무대 3분의 1 크기의 작은 세트가 보인다. 프랑스 소도시의 왕인 르네 왕의 별장이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샹들리에, 고급 가구 등 차이콥스키 당시의 살롱 분위기로 꾸민 이 세트는 공연 내내 바뀌지 않는다.

하얀 드레스 차림의 욜란타(소프라노 소냐 욘체바)는 부르고뉴 공작인 로베르(바리톤 안드레이 질리호브스키)와 결혼을 약속한 상태다. 그러나 르네 왕은 그녀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숲 속 별장에 수녀들과 유모 마르타(메조소프라노 옐레나 자렘바)와 함께 살도록 한다. 욜란타는 소파 뒤에 숨어 있는 노란 꽃무늬 원피스 차림의 소녀를 발견하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아!” 하며 놀라는 욜란타. 소녀는 그녀가 모르는 사람인 까닭이다. 소녀는 누구일까? 청중은 소냐 욘체바의 수려한 퍼포먼스와 함께 미스터리에 빠져든다.

육중한 검은 코트를 걸친 르네 왕(베이스 알렉산더 침발류크)은 아랍풍 모자를 쓴 의사 이븐 하키아(바리톤 비토 프리안테)와 별장에 도착하고, 의사는 욜란타를 진찰한다. 의사는 그녀가 회복될 것을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 시력을 되찾지 못할 것이라 진단한다.

한편, 숲 속에서 길을 잃은 로베르와 그의 친구 보데몽 백작은 창문을 열고 별장에 침입한다. 로베르는 약혼녀 욜란타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보데몽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무대 좌우에 놓인 화병에는 붉은 장미와 하얀 장미가 각각 꽂혀 있다. 홀로 남게 된 보데몽은 욜란타에게 사랑의 상징인 붉은 장미를 달라고 한다. 그녀는 하얀 장미를 뽑아 주고, 결국 보데몽은 그녀가 장님임을 알게 된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보데몽이 욜란타에게 “천지창조의 첫 기적…”이라며 광명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는 무한한 신과 진실의 광채 등 그녀가 볼 수 없는 우주를 설명한다. 그리고 서로의 품에 안긴 채 어린아이들처럼 구석에 앉아 신의 영광을 노래한다.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폴란드 출신의 테너 아르놀트 루트콥스키의 카리스마는 좀 부족했다. 소냐 욘체바 역시 공연 전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눈부신 광채와 온화한 연정이 가득한 이중창은 얼어붙은 가슴도 녹일 만큼 감동적이었다. 언론은 ‘욘체바가 최상의 컨디션이었으면 과연 어떠했을까?’라는 평을 남겼다. 1막 5장에서 체르냐코프는 대본에 없는 인터미션을 두었다. 2막은 원작의 1막 6장부터 시작해 쉬지 않고 호두까기 인형으로 넘어갔다.

2막 초반, 모르는 남자의 품에 안긴 욜란타를 발견한 유모와 르네 왕은 충격에 휩싸인다. 로베르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친구이자 기사인 백작 보데몽을 소개한다. 보데몽은 왕에게 “욜란타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사랑한다”고 선언한다. 왕은 보데몽이 딸의 눈을 치료하지 못하면 처형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욜란타는 보데몽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모르는 빛과 색감, 광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믿으며 의사의 손에 수술을 맡긴다. 그 후 시력을 되찾은 욜란타는 보데몽 과 함께 신에게 감사하며 감동적인 대단원을 맞는다.

성악진은 커튼콜에서 큰 갈채를 받았다. 그중 노란 원피스 소녀가 또 한 번 등장해 중앙에 자리 잡고 함께 커튼콜에 임했다. 이 소녀는 ‘호두까기 인형’의 주인공인 마리이며, 연출가가 ‘욜란타’를 마리의 생일을 위해 만든 연극처럼 설정했음이 명료하게 이해됐다.


▲ 검은 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펼쳐진 27인의 군무 ‘눈의 왈츠’(안무 라르비 세르카위) ©Agathe Poupeney

연극적 요소가 부각된 ‘호두까기 인형’

성악진이 퇴장한 후 똑같은 의상을 입은 발레단이 등장했다. 좌우의 검은 커튼이 올라가고 무대는 뒤로 확장돼 무용수들에게 춤출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호두까기 인형’의 시작이었다. 도입부를 맡은 아서 피타의 안무는 클래식 발레의 어법 대신 유희적 아이디어로 크리스마스를 앞둔 마리의 생일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제스처를 안무로 구상했다. 선물을 받는 반복적인 제스처, 의자를 들고 벌이는 게임 등 연극적 아이디어가 교묘하게 오페라와 발레 사이를 연결해 호평을 받았다.

반면, 다른 두 안무가 에두아르 로크와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는 혹평을 샀다. 체르냐코프가 다시 쓴 ‘호두까기 인형’의 대본은 8개의 주제로 이어지는데, 마리의 생일파티에 이어진 ‘밤’과 5번째 ‘숲’, 6번째 디베르티스망은 로크가, 나머지 ‘눈의 왈츠’와 ‘꽃의 왈츠’ 등 네 가지 테마는 세르카위가 안무했다. 한 언론은 이 두 안무가를 발탁한 사람이 뱅자맹 밀피에(전 파리 오페라 발레 예술감독)인지 체르냐코프인지를 따질 정도였다.

로크의 첫 안무 ‘밤’은 생일파티 후 저녁에 일어나는 이야기다. 로베르의 친구 보데몽(스테판 부이용)에게 끌린 마리(마리옹 바르보)는 늦은 밤 거실에서 그를 만난다. 그녀의 어머니(알리스 르네방)는 이상한 제스처로 오간다. 마치 고장 난 로봇이 위협적인 제스처를 반복하듯 뒤틀리는 안무가 계속된다.

갑자기 ‘펑’ 하는 괴성과 함께 마리의 집이 무너지고,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뒤 재가 날리는 것처럼 조명 아래 검은 눈이 쏟아진다. 살아남은 마리와 보데몽의 우아한 파드되 후 무용수 27인의 군무로 ‘눈의 왈츠’가 펼쳐진다.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의 의상은 남루하게 누빈 회색 의상으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생존자들처럼 감동을 자아냈다. 하지만 언론은 어둠 속에서 그로테스크한 윤곽만 보이는 이 안무에 호평을 보내지 않았다. 마치 루소의 그림처럼 검푸른 숲을 마리가 지나가는 ‘숲’ 또한 이와 비슷한 이유로 유감을 샀다. 디베르티스망(화려한 볼거리가 강조되는 몇 개의 춤)에는 거대한 인형들이 등장한다. 고양이, 소련을 뜻하는 ‘CCCP’를 단 우주인들, 러시아 전통 인형 등 동화적 이미지가 짙다. 마리는 여러 무용수에 의해 증식돼 여러 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꽃의 왈츠’는 클래식 발레의 전형적인 정감보다는 제스처적인 면이 강했다. 마리와 보데몽의 우아한 파드되와 베리에이션 후 마리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 거대한 인형이 등장하는 디베르티스망(안무 에두아르 로크) ©Agathe Poupeney

작품은 어른이 되기 위해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야 했던 욜란타와, 어둠과 공포가 엄습한 세계를 거쳐야 했던 마리의 정반대 상황을 클로즈업했다. 큰 키에 명료한 동선으로 어머니 역을 인상적인 카리스마로 연기한 에투알 알리스 르네방과 보데몽 역의 스테판 부이용, 기교적이면서도 유연한 동선을 매력적이고 신선하게 연출한 마리 역의 마리옹 바르보가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체르냐코프의 ‘호두까기 인형’은 발레라기보다는 연극이라는 표현이 더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두 작품에서 이처럼 긴밀한 연관성을 이끌어내어 하나의 이야기처럼 그려낸 것은 안무의 취향을 떠나 체르냐코프의 뛰어난 비전이 최상의 미학적 수준에 오른 레퍼런스임에 분명하다.

사진 Opéra national d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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