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한상일

건반으로 써내려간 냉정과 열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6월 1일 12:00 오전

라흐마니노프 & 프로코피예프로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의 피아니즘

대학생 시절, 여름이면 늘 러시아에 가곤 했다. 몇 년간 한 계절씩 잠시 머무는 이방인의 눈에 비친 러시아 사람들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처음엔 쉽게 그 속을 보여주지 않아 긴장하게 만들다가도, 마침내 빗장이 조금 열리면 그 사이로 파도 같은 감정을 마구 쏟아내며 휩쓸어가는 힘이 그들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5월에 만난 피아니스트 한상일 역시 라흐마니노프·프로코피예프로 커플링된 첫 음반과 리사이틀을 준비하면서 극과 극, 서로 다른 색채를 지닌 두 작곡가에게 푹 빠져 있었다. 같은 대륙에서 태어나 비슷한 시대를 살았음에도 각자 진보와 낭만으로 나아가며 너무나 다른 음악의 팔레트를 펼친 예술혼을 피아노라는 악기로 기록하며, 30대의 시간을 힘껏 보낼 계획이라 했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를 함께 다루는 것은 학구적인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이기도 하고요. 앞으로 이들의 주요한 곡을 시리즈로 묶어 계속 도전하고 싶습니다.”

지난 5월 교향악축제에서 울산시향과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을 선보이며 “풍부한 감성과 빼어난 테크닉의 조화로 곡의 기계적인 타건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장일범 음악평론가)”는 평을 받은 피아니스트 한상일. 그는 한예종 재학 중이던 지난 2005년 에피날 피아노 콩쿠르 1위 없는 2위, 이듬해 미주리 서던 피아노 콩쿠르에서 3위에 오르며 당시 ‘순수 국내파 피아니스트의 도약’이라는 수식어로 주목받은 바 있다. 이후 2011년 부조니 피아노 콩쿠르에서 본선 진출 파이널리스트 12인에 이름을 올렸고, 당시 심사위원이던 백건우는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 있는 소리를 지녔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 음악의 치명적인 매력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한상일의 뇌리에 남은 첫 음악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취미로 피아노를 치던 어머니를 보면서 동네 학원을 다녔고, 중학생이 되면서 피아노를 전공으로 삼은 그에게 러시아 음악은 내면에 자연스레 자리한 듯 보였다. 그 길 위에서 만난 프로코피예프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당돌하고 거침없다가 어느 순간 서정적이고…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의 타악기적 면모를 음악적인 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했죠. 하나의 피아노를 통해 다채로운 성격이 나올 수 있게 작곡한 그의 음악을 배우면 배울수록 푹 빠져서,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갈수록 커졌어요.”

첫 도전은 프로코피예프 토카타 D단조 Op.11, 소나타 7번,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에튀드 Op.39이다. 극단적인 매력과 커다란 스케일 사이에서 자칫 길을 잃거나, 손가락이 풀려버릴 수도 있는 이 작품들을 그는 지난 2월, 베를린 예수그리스도 교회에서 녹음했다. 하루에 예닐곱 시간씩 3일간, 무수한 음표들 사이에서 체력전을 방불케 하는 첫 녹음의 결과물은 5월 말, 소니 레이블을 통해 발매됐다. 이와 함께 프로코피예프와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등으로 프로그래밍한 전국 리사이틀이 6월 중 이어진다.

“음반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1번은 교향곡적 느낌이 많이 나는 곡이에요.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교향곡 2번을 들으면서 작품 간 공통된 방향성을 근거로 작품을 해석하려고 했어요. 리사이틀에서 선보일 소나타 2번은 개정판이 아닌 오리지널 버전으로 연주합니다. 상대적으로 음표도 많고 규모도 크지만, 소나타에서 교향곡적 느낌을 내려고 했던 그의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새롭게 시작될 이야기

인터뷰 중 지난 20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한상일은 오래전부터 그를 따라다닌 ‘순수 국내파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에 짙은 호감을 내비쳤다.

“당시 국내 교육과정만 밟아온 제가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그런 수식어가 붙었죠. 그렇게 불리는 걸 지금도 좋아하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에요. 한예종 예술사를 졸업하고 뉘른베르크 음대에서 최고연주과정을 거쳤지만, 다시 귀국해 한예종 전문연주자과정을 밟은 것도 한국의 클래식 음악 인프라가 갈수록 좋아지고, 선생님과 선배님들이 보여주신 가능성을 우리 세대에서 꽃피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거든요.”

클래식 음악가를 해외에 내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아시아 또는 유럽의 외국인들이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는 꿈을 꾼다고 그는 말했다. 자신도 짧게나마 유학을 다녀왔지만 과거와 달리 지금 우리나라에 훌륭한 스승이 많거니와, 음악학도와 음악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앞으로 구축하는 데 부족하나마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김미경, 김대진, 볼프강 만츠를 사사하며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한상일은, 오래전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음악과 마주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알맹이를 채워나가는 중이다.

“열정의 끈을 놓지 않고, 망설이며 뒤돌아보기보다 꿈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 프로를 꿈꾸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 같다”는 그의 이야기는 과거의 강을 건너온 자신에게, 또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음반 속 라흐마니노프의 각기 다른 그림과 이야기 폭풍이 휩쓸고 간 마지막 자리, 귓가엔 프로코피예프 프렐류드 ‘하프’가 울려 퍼진다. 길고 긴 터널 끝에 만난 한줄기 빛처럼, 마치 새롭게 시작될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처럼. 앞으로 남은 30대의 조각을 라흐마니노프와 프로코피예프 사이에서 새롭게 완성해나갈 그를 주목해보자.

사진 봄아트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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