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

서두를 필요가 없잖아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7월 1일 12:00 오전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전곡 연주회를 마친 김수연. 그녀가 담담히 털어놓은 진심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전곡 연주회를 마친 김수연. 그녀가 담담히 털어놓은 진심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과 인터뷰를 미리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지난 5월 29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전곡 연주회를 지켜보며, 공연 전이 아닌 공연 후에 만나기로 약속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4시간에 가까운 대장정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녀와 나눌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수많은 무대에 서왔지만, 이런 공연은 처음이에요. 기자님도 보셨죠? 객석에 어떤 움직임도, 어떤 숨소리도 없었잖아요. 연주를 하는 내내 ‘이분들이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구나’ ‘같이 애를 쓰고 있구나’ ‘내가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생각해도 기적 같아요. 저 혼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순간이죠.”

이날 객석의 집중도는 최상이었다. 한 시간의 인터미션을 두고 총 6곡의 대곡을 연주하는 내내 모든 이가 김수연의 연주에 몰입했다. 그녀의 바이올린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할 때마다 객석에서도 함께 숨을 가다듬었다. 마지막 곡이 끝났을 때는 연주자와 관객, 관객과 관객 사이에 결속력마저 느껴졌다. 그녀를 믿어준 사람들, 그리고 그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한 그녀가 만들어낸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날 김수연의 연주는, 빛이 났다. 바이올린 소나타 1·2번과 파르티타 1번을 선보인 1부는, 마치 잔 근육이 많은 체조선수를 연상케 했다. 프레이즈마다 끝까지 힘을 고르게 분배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탄탄한 기본기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 시간의 쉬는 시간 이후 선보인 파르티타 3번에서는 다소 힘에 부치는 듯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소나타 3번에서 평정을 되찾았다. 중·저음부의 풍부하고 차분한 음색은 시간을 수백 년 전으로 되돌린 듯, 아주 오래된 느낌과 생생한 느낌을 동시에 자아냈다. 비로소 파르티타 2번에 다다른 그녀는 전과는 다른 거칠고도 격정적인 모습을 한껏 드러냈다. 샤콘에서 모티브 선율을 다채롭게 바꿔가며 감정을 표현하던 그녀는 마지막 음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부었다. 5년 전 발매한 같은 레퍼토리의 전곡 음악(DG)과는 또 다른 생기를 띠었다.

연주회가 끝난 이틀 뒤 청담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그녀를 만났다. 홀가분한 듯 밝은 모습이었다. 그날의 회포를 푸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연주를 듣는 내내 ‘음악이 먼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수연’의 바흐를 들으러 갔는데, 김수연은 점점 흐려지고 ‘바흐’가 커진 느낌이랄까요.

그렇게 보였다니 정말 좋네요. 바흐 음악은 그동안 너무나 많이 연주됐잖아요. 수십, 수백 년 전부터 여러 대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주해왔고, 낭만 시대 연주 스타일 혹은 고악기로 하는 바로크 스타일 등 바흐 연주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었고요. 사실 자신이 없었어요. 관객마다 취향이 다를 것이고 그에 따른 선입관도 있을 텐데,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그렇지만 연주를 마쳤을 땐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 같아 너무나 기뻤어요. 팔짱 끼고 평가하려는 사람보다 마음을 열고 들어주러 오신 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하죠.

바이올리니스트가 홀로 바흐 작품 전곡에 도전하는 자리에 왔다는 건 연주자에 대한 신뢰가 있는 사람들이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들의 집중력을 높이고 뜨거운 반응을 이끈 건 수연 씨가 해낸 일이죠.

같이 했다고 생각해요. 첫 곡에서는 분명 긴장을 했거든요. ‘낯섦’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들이 저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니까 저도 용기를 냈어요. 제가 원하는 소리를 편안하게 낼 수 있었죠. 마지막 곡으로 파르티타 2번을 연주할 땐 이미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그때도 관객을 믿었어요. 정신적·육체적으로 에너지를 거의 다 썼고, 더 이상 소리를 꾸며낼 힘도 없으니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둬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이해해주실 것 같았어요. 제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고, 관객 분들도 저와 같을 거라 믿었죠.

앞서 연주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한동안 풍부한 감성으로 바흐의 작품을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게 유행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로는 고악기의 영향으로 담백하게 연주하는 경향이 있죠. 수연 씨의 연주 스타일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2011년,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전곡 음반을 준비하면서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바로크 음악을 공부했어요. 테크닉에 대해 많이 배웠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바로크 스타일과 낭만 스타일로 구분할 때 감정의 유무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음악 안에 감정이 담겨 있으면 낭만 스타일, 반대로 없으면 바로크 스타일, 이건 잘못된 해석이거든요. 시대별 연주법의 구분은 비브라토를 쓰는 방식 등 기술적 차이에서 오는 건데 말이죠. 저는 작품이 쓰인 시대의 룰을 완벽하게 따르면서 그 안에 현재의 감정을 담는 것이 옳다고 봐요. 그래야 현시대의 청중이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다른 이야기인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소리가 있고 모든 게 빠르고 어지럽고 복잡한데, 무려 300년 전에 쓰인 음악에 대해 논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날의 연주를 들으며 수백 년 전 메시지가 오늘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지만, 수연 씨의 생각이 궁금해요. 현대에 클래식 음악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오랜 침묵) 사실, 잘 모르겠어요. 클래식 음악은 소수가 즐기는 문화잖아요. 어릴 때부터 접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계기가 없는 이상 모르고 살기 쉽죠. 평생 몰라도 전혀 불편함이 없고요. 음악계에서 한 발짝만 떨어져 바라봐도 무척 작은 영역인데… 너무 많은 인정을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저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싶고, 설득력을 지니고 싶어요. 제가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진실하고 싶죠. 음악적 교감뿐 아니라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 삶에 대한 태도까지 나누고 싶어요. ‘무대 위의 김수연’과 ‘일상에서의 김수연’이 너무 많이 다르지 않으면 좋겠어요. 당당하고 싶고요. 클래식 음악이 이 시대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마음으로 음악을 하고 있어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네요. 단순히 연주를 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에요.

맞아요. 그렇지만 무리하고 싶지는 않아요. 자연스럽게 하고 싶죠. 요즘 사람들은 힘들다고 고백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요. 행복하고 아름답고 잘나가는 모습만 드러내려고 하죠. 누구에게나 빛나는 순간이 있고, 반대로 힘든 순간이 있는데 말이에요.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힘든 마음까지 무대에서 다 털어놓으려고요. 그런 순간들을 통해 위로를 나누고 싶어요.

음악가로서의 삶을 의심해본 적도 있나요?

10대 때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다섯 살부터 시작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삶은 어찌 보면 내가 택한 것이 아닌데, 다른 재능이 있는데 음악하느라 못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무척 힘들었죠. 그런데 완전히 믿게 된 계기가 있어요. 2004년, 스위스에서 오자와 세이지의 지휘에 맞춰 차이콥스키의 세레나데를 연습하던 때였어요. 연습실 사방이 유리창이었는데, 멀리 알프스산맥이 보이고 보랏빛 저녁놀이 연습실을 가득 물들였죠. 그때였어요. 훌륭한 음악가들과 아름다운 환경에서 찬란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눈물이 쏟아질 만큼 가슴 깊이 감사함을 느꼈죠. 그때 이후에는 의심하지 않아요. 제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죠.

음악에 향한 마음이 정말 순수하군요. 반대로 이미지메이킹에 집중하는 연주자들을 보면 어때요? 자기 PR 시대이고, 클래식 음악계도 마케팅이 중요해졌으니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

매니지먼트에서 레퍼토리 선정, 의상 콘셉트, 인터뷰에 응하는 말투까지 관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어요. ‘나는 뭐하고 있지’ 하면서 불안감을 느낀 적도 있죠. 물론 저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궁금하긴 하지만, 가면을 쓴다는 건 너무 불편하고 어색한 일일 것 같아요. 영리하게 계획으로 행동하는 성격도 못 되고요.(웃음) 지금처럼 진중한 레퍼토리로 꾸준히 인사드리면서 스타가 아닌 예술가로 성장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이 저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오랫동안 지켜봐준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연주를 하는 게 제 바람이에요.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그동안 고전적인 레퍼토리에 집중해왔는데, 20세기 이후 음악에는 관심이 없나요? 음악적으로 어떻게 확장하고 싶은지?

동시대 음악은 뮌스터 음대에서 공부할 때 헬게 스라토 선생님에게 많이 배웠어요. 선생님은 바이올린·더블베이스 듀오 활동을 하며 동시대 작곡가들과 작업을 많이 하셨죠. 그분과 연주하면서 마치 그림 같은 악보를 음악으로 만들고, 또 나만의 언어로 풀어낸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알게 됐어요. 그런데 혼자 접근하기는 어렵더군요.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아 미뤄두고 있는데, 곧 도전할 생각이에요. 이제 30대가 되니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으려고요. 사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버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등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중요한 작품 중에도 아직 공부하지 못한 것이 많아요. 만나야 할 음악, 들려드릴 이야기가 아직 많답니다.

김수연은 7월, 일본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8~9월에는 덴마크와 헝가리에서 실내악 연주를 가진다. 10월에는 한국에서 로렌 오케스트라와 내한 연주를, 12월에는 KBS교향악단과 협연을 한다. 그녀의 삶이 더 풍요롭기를, 그래서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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