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 파리 필하모니에서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독주회가 있었다. 2400석을 거의 채운 공연이었다. 그의 연주회는 음악이라는 현상을 제고하게 했다. 오늘날엔 아름다움이 단지 욕망을 자극하는 원동력으로 쓰인다. 극단적으로 말해 경제적 창출을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점점 도태된다. 인간적인 가치들이 오히려 사회에서 위험요소로 작용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음악은, 그 아름다움이 듣는 이의 내면에서 인간적 변용을 가져올 때 그저 시간의 소비가 아닌 의미로서 살아난다.
루푸는 브람스 ‘자작주제에 의한 변주곡’, 베토벤 ‘32개의 변주곡’, 모차르트 ‘뒤포르의 미뉴에트에 의한 9개의 변주곡’을 공연 전반부에 연주했고, 후반부에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D894를 들려주었다. 이제 더 이상 녹음과 음반 발표를 하지 않고 연주 활동만을 하는 루푸는, 알프레트 브렌델이 은퇴한 이후 고전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면서도 청중의 관심과 호응을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반부 연주는 마치 후반부 작품을 듣기 위한 준비 작업처럼 느껴졌다. 청중은 전반부의 프로그램을 통해 충분히 슈베르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는, 영감이 가득한 각별히 아름다운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을 받아들일 만한 내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없다면 길고 지루한 곡이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청중뿐 아니라 연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작품의 내적 울림이 재현되기 위해서는 연주자 내면의 울림이 악보에 봉인되어 있는 작품의 울림과 공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진정한 울림보다는 외면적 현상에 더 집중한다. 이는 우리 삶의 양식을 그대로 반영할 따름이다. 기억과 경험을 자신의 내면에 저장하고, 그것을 회상하는 형식을 통해 기억과 경험이 개인적 울림으로 재현되는, 소위 주관화가 더 이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정보를 무한정 저장할 수 있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은, 각 개인의 내면이 주관화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세계를 주관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예술이 이러한 상황에서 본래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루푸는 작품의 울림에 뿌리를 둔다. 아름다움과 깊이를 추구하는 경지를 넘어 그와 온전히 하나가 돼 진정한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진정으로 주관적인 해석을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루푸의 연주를 외형적 스타일로만 접근하고 이해하는 것은 사실 그의 연주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의미와 같다.
루푸는 단순한 연주 스타일로 진실에 접근한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그의 소리는 마음에 들리는 소리와 결코 같지 않다. 그는 무대에서 무언가 보여주려는 인위적인 연주가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아름다움이나 감동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에, 일상과 무대의 경계가 없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자연이 수놓는 풍광에 넋을 잃고, 그를 위대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상당한 미스터치를 했고, 앙코르로 들려준 슈베르트 4개의 즉흥곡 D899의 3번 G♭장조를 연주할 때도 미스터치를 했다. 하지만 루푸는 미스터치에 마음이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인생에 우리가 의도하거나 원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하듯, 그저 그런 일들이 일어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도하지 않은 것들조차 마음을 기울여서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