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부터 세계 오페라 무대를 평정한 두 여성 성악가가 8월 한국을 찾는다.
어느덧 50대에 접어든 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관객과 첫 만남을 가질 것인가?
메조소프라노 베셀리나 카사로바, 균형 잡힌 드라마틱을 그리다
베를리오즈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를 기반으로 쓴 오페라 ‘파우스트의 겁벌’의 오페라 콘체르탄테가 8월 19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메조소프라노 베셀리나 카사로바,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과 테너 강요셉이 출연하고 경기 필이 연주를 맡았다. 정식 오페라 전막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랜드 규모의 베를리오즈 성악 예술에서 카사로바를 만나는 기회다.
1965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태어난 베셀리나 카사로바(Vesselina Kasarova)는 공산권이 붕괴되자 서방으로 건너갔고, 당시 BMG를 소유하던 베텔스만이 후원한 ‘뉴 보이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2위 르네 파페) RCA 레이블과 계약했다. 카라얀이 출연을 주선했지만 그의 서거로 콜린 데이비스가 대신 지휘봉을 잡은 모차르트 ‘티토 왕의 자비’에 출연하면서 1991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했다. 이듬해 같은 축제의 로시니 ‘탄크레디’에선 마릴린 혼의 공백을 메우며 국제적 스타로 도약했다.
1990년대 세계 주요 무대에 올라 모차르트와 벨칸토 오페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2000년대 들어 바로크 오페라의 바지 역할에 비중을 두었다. 그녀는 불가리아 클래식 음악과 가곡을 알리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고, 2008년 ‘카르멘’을 시작으로 서서히 드라마틱 역할로 중심을 옮겼다. 일본은 2000년 이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내한은 뜸했다. ‘파우스트의 겁벌’ 오페라 콘체르탄테를 위해 내한을 앞둔 베셀리나 카사로바와 이메일 인터뷰를 나눴다.
2014년 통영국제음악제 이후 두 번째 내한이다. 사무엘 윤과 함께 무대에 선 것은 언제부터인가?
통영을 찾았을 때, 음악당이 해안에 있는 것도 독특했지만 대단한 어쿠스틱을 갖춘 환상적인 홀에서 노래할 수 있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사무엘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춘 사람이다. 쾰른 오퍼에서 ‘삼손과 데릴라’를 함께 불렀는데, 성격이 아주 유쾌한 동료다. 강요셉과의 만남도 기대한다.
2년 전 쾰른 오페라 ‘파우스트의 겁벌’에서 마르그리트 역을 소화했다. 캐릭터 내면에 존재하는 매력을 어떻게 느꼈나?
1999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전위예술 그룹인 라 푸라 델스 바우스(La Fura dels Baus) 버전으로 처음 마르그리트를 불렀다. 걸출한 프로덕션이었고, 당시의 DVD는 그라모폰상을 받았다. 베를리오즈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데 음악이 너무 아름답고 감성적이다. 마르그리트가 부르는 아리아들은 아주 도전적이다. 우울한 정서로 가득한 점이 매력이다.
베를리오즈는 대규모 합창단을 고려해 ‘파우스트의 겁벌’을 쓴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편성의 합창단과 솔리스트가 조화를 이루는 기술적 방법이 있다면?
합창 파트는 작품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합창 규모를 키운 작법이 작품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베를리오즈는 매우 인상적인 방법으로 합창과 독창을 결합했다.
베를리오즈는 관현악 작품 속 목소리의 역할에서 멜로드라마 같은 효과를 의도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예술가곡과는 달리 목소리가 간혹 산만하게 들린다.
사실 베를리오즈의 관현악과 오페라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를 감지하진 못했다. 하지만 두 장르 모두, 극도로 드라마틱한 부분이 있다. 이미 질문했듯 정서와 테크닉 사이의 균형이 아주 중요하다. 볼륨을 크게 하거나 강인함을 표출한다고 드라마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가령, 모차르트 오페라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극도로 드라마틱하지 않나. 결론은 감정 과잉으로 흐르지 않고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 베를리오즈에서도 중요하다.
새로운 음악의 바다로 항해할 시간
8월 중에 인스부르크에서 치마로사 ‘비밀 결혼’에서 피달마를 연기한다. 배역 데뷔인데, 바로크 시대의 곡들은 어떻게 접근하나?
모든 시대, 모든 작곡가의 작품에 특별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치마로사 같은 바로크 작품 역시 완벽한 기교적 정확함과 더불어 가벼움과 민첩함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악보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기에 작곡가의 표현 의도를 찾기 위해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 방법을 통해 나만의 해석을 만들어낸다.
오랫동안 모차르트와 로시니에서 흔들리지 않는 명성을 유지했고 헨델에선 바지 역할로 절찬받았다. 반면 2010년대 들어선 과거 명작들과 조금 다른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초창기부터 내 음역은 상당히 넓었다. 그때만 해도 모차르트, 로시니와 벨칸토를 함께 아우르는 가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젊은 가수들은 드라마틱 역할에 잠재력을 갖고 있어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20년 전 리카르도 무티와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내게 ‘아이다’의 암네리스를 부르라고 권했다. 그때 불렀다면 너무나 이른 도전이었을 거다. 드라마틱 역할은 테크닉 상으론 어렵지 않다. 난관은 정서적 혼란에서 온다. 그래서 기다리면서 발전시키는 게 더 낫다. 이제 나에게도 베르디와 다른 작곡가로 나아갈 적절한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베르디를 조급하게 부르면 목이 상한다.
지난해 발매한 러시아 오페라 아리아 모음집(Genuin)을 들어보니 불가리아 태생임에도 러시아어 가창이 유창한 것이 놀라웠다. 불가리아 가수들의 강력한 저음은 러시아 오페라에도 통하는가?
공산 시절 불가리아에서 자라면서 러시아어를 배우는 게 의무였다. 내가 봐도 러시아어를 아주 잘 배웠고, 대신 영어 공부할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러시아 오페라를 부르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심지어 러시아어를 몰라도 배역을 연구하면 잘 부를 수 있다. 언젠가 미렐라 프레니와 차이콥스키 ‘스페이드의 여왕’을 함께 했는데, 프레니는 러시아 가수들 보다 훨씬 러시아 아리아를 잘 불렀다. 불운하게도 리릭 소프라노 레퍼토리는 불가리아에서 전통적으로 인기가 없었다. 이러한 경향 탓에 동유럽 가수들은 드라마틱 역할에만 주로 어울린다는 인상을 준다.
초창기, 소피아에서 주목받은 후 취리히로 옮겼고 1989년 뉴 보이스 콩쿠르에 나가 입상했다. 서방 진출과 경연 출전은 모두 계획된 것이었나?
취리히 오페라에서 제안받았을 땐 이미 빈 슈타츠오퍼 앙상블로 계약이 된 상황이었다. 취리히는 더 높은 발전과 자신감을 심어준 곳이다. 역할은 작았지만 더 유명한 극장에서 주역으로 바로 시작하지 않은 게 내겐 아주 중요했다. 취리히에선 여러 경험을 했다. 고백하자면, 큰 배역을 부르지 못해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 하지만 재차 강조하듯, 명문 오페라극장에서 주역부터 시작하면 매우 위험하다.
무대에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를 꼽는다면?
플라시도 도밍고, 요나스 카우프만, 니콜라이 기아우로프, 알프레도 크라우스, 미렐라 프레니, 귀네스 존스, 체칠리아 바르톨리, 도로테아 뢰쉬만, 엘리나 가랑차이다.
한국에 다시 온다면 어떤 작품이 어울릴까?
혹시 다시 불러준다면, ‘삼손과 데릴라’ ‘아이다’ ‘일 트로바토레’ ‘탄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인’ ‘베르테르’ ‘트로이인’ 같은 작품을 불렀으면 좋겠다.
소프라노 에바 메이, 명확함과 가치를 담아낸 선율
1967년 이탈리아 중부 파브리아노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난 에바 메이(Eva Mei)는 1989년 피렌체 케루비니 음악원을 거쳐 1990년 빈에서 열린 모차르트 콩쿠르에서 카타리나 카발리에리상을 수상하면서 유럽 명문 극장이 주목하는 신예로 부상했다. 재능과 미모, 가창력의 삼박자를 갖춘 슈퍼 루키의 출현이었다.
1991년 빈 슈타츠오퍼에 데뷔한 이래, 1990년대 중반까지 베를린 슈타츠오퍼·로열 오페라·라 스칼라·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차례로 첫선을 보였다. 리카르도 무티·다니엘레 가티·파비오 루이지 같은 이탈리아 지휘자들뿐 아니라 볼프강 자발리슈·콜린 데이비스·로린 마젤·다니엘 바렌보임 등 20세기 후반의 오페라 거물들이 자신의 무대에 에바 메이를 세웠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나 윌리엄 크리스티 같은 고음악 전문가들도 메이의 경력 초기부터 그녀의 이지적인 해석을 선호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에바 메이는 자신의 본령인, 벨리니·로시니·도니체티 오페라 전막에서 정갈하고 세련된 벨칸토 해석을 유지했다. 헨델 칸타타, 베토벤·로시니의 미사곡, 페르골레시 ‘스타바트 마테르’ 같은 종교 작품에서도 출중한 솔리스트적 기량을 빛냈다. 30대 중반 시절의 메이가 유럽 시장을 정복한 배역들은 돈나 안나(‘돈 조반니’), 콘스탄체(‘후궁 탈출’), 비올레타(‘라 트라비아타’), 노리나(‘돈 파스콸레’), 아미나(‘몽유병의 여인’)였다.
나폴리를 제외하면 로마, 밀라노 같은 주요 도시부터 팔레르모와 칼리아리 같은 지방까지 조국 이탈리아 전역의 오페라극장에서 무르익은 30대 메이의 기량을 동시대에 확인할 수 있었다. 레코딩은 BMG에서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 전막을, 텔덱(Teldec)에선 아르농쿠르의 종교곡 프로젝트에 중용됐다. 무티와 함께 한 ‘노르마’(EMI Classics)도 절창이었다. DVD 도입 이전, 1990년대 20대 시절의 매력을 확인할 영상물은 입수가 어렵다.
40대에 접어든 메이는 유럽 무대와 병행해, 미국 시장을 노크하기보다 일본에서의 활동을 늘렸다. 도쿄에선 여러 해에 걸쳐 오페라 전막과 리사이틀, 마스터클래스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쉰 살을 눈앞에 둔 에바 메이가 드디어 한국을 찾는다. 정명훈/라 스칼라 필하모닉 한국 투어로, 8월 2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솔리스트 자격이다. 이하 에바 메이와의 일문일답.
2005년 후지와라 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도쿄 오페라 시티 콘서트홀 리사이틀 등 그간 일본을 자주 찾았지만 한국에선 좀처럼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국에 초대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이 첫 내한이고, ‘대단한(super)’ 한국 청중과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
2010년 안드레아 보첼리, 정명훈/라디오 프랑스 필과 함께 ‘카르멘’(Decca)을 발매했는데, 정명훈과는 언제부터 인연을 맺었는가. 정명훈은 리허설과 실연에서 어떤 특징을 보이는 편이었나?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 시절, 모차르트 ‘레퀴엠’이었던 것 같다. 그는 침착함 속에서 작품을 단단히 제어한다.
오랫동안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브루크너가 쓴 오케스트라 편성의 성악곡을 불러왔다. 특히 베토벤 9번 ‘합창’은 파리, 빈에서 여러 번 불렀는데 가장 최근은 언제인가?
2015년 12월, 아키야마 가즈요시 지휘의 도쿄 필 산토리홀 공연이다.
베토벤 ‘합창’에서 요구되는 소프라노의 자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명확한 독일어 발음 그리고 단어의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 다른 곡을 할 때보다 더 중요하다.
오는 10월과 11월 피렌체와 베르가모에서 도니제티의 ‘영국의 로스몬다’에서 레오노라 역을 맡는다. 음역을 낮추는 건 도전인가 아니면 또 다른 발전인가?
과거엔 메조소프라노가 오페라에 변화를 주는 인물로 여겨졌다. 레오노라는 과거에는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소프라노가 소화해도 괜찮다고 본다. 보통보다 좀 더 어둡고 성숙한 성격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2014년부터 되돌아보면, 비올레타(‘라 트라비아타)’는 드라마틱 콜로라투라, 아디나와 엘리사(‘양치기 왕’)는 리릭 콜로라투라인 데 반해, 알리체 포드(‘팔스타프’)는 스핀토, 로지나(‘피가로의 결혼’)는 리릭 소프라노다. 지난 2년 사이에 다양한 성질(聲質)을 소화한 건 전략적 선택인가?
다양한 배역을 부른 게 음역의 변화에 따른 건 아니다. 자신의 성격에 맞는 적절한 배역을 찾아가면서 커리어를 쌓는 것이 오페라 가수에겐 정상적인 일이다.
이탈리아의 여러 오페라 극장에서 작업해왔는데, 특별히 편하게 느끼는 곳이 있나?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밀라노 라 스칼라부터 지방의 아주 작은 오페라 극장까지, 작업하는 데 특별히 선호하는 극장이 있진 않다. 모든 이탈리아 극장마다 각각 전통이 넘친다.
오페라 전막을 소화하는 중간에 여러 차례 고음악 전문가들과 협업했다. 바로크식 보컬 테크닉은 어떻게 연마했는지 궁금하다.
노래를 시작한 곳이 마드리갈 합창단이었다. 그래서 고음악이 나에겐 아주 자연스럽다.
2012년 도쿄 오페라 시티 콘서트홀 리사이틀에서 루이지 고르디자니의 ‘5개의 토스카나 유명 칸초네’를 불렀을 때, 토스카나 지역의 방언을 구사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오페라 발성 때보다 수동적이면서 힘을 뺀 해석이었는데.
태어난 곳이 안코나 지방의 파브리아노지만 가족들의 출신지가 토스카나의 아레초 지방이다. 그래서 토스카나 민속음악은 곧 나의 음악이기도 하다.
수많은 거장 지휘자와 협업했다.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한 명만 꼽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볼프강 자발리슈, 리카르도 무티, 주빈 메타는 분명히 꼽을 수 있다. 정명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녹음 계획은 어떤가? 앞으로 독일 리트는 탐구할 영역에 속하는지.
녹음 계획이 현재로선 전혀 없다. 음반 시장이 요즘 더 안 좋아졌다. 평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부르기를 즐긴다. 언젠가 콘서트에서 리트를 여러 번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