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선형훈

내일을 향한 새로운 여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8월 1일 12:00 오전

지난 6월 7일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에서 30년 우정으로 만들어낸 아티스트들의 감동의 하모니가 펼쳐졌다. ‘선형훈과 친구들’. 무대에 연주자가 하나씩 오른다. 피아니스트 김대진, 첼리스트 배일환, 비올리스트 장중진. 그리고 주인공 바이올리니스트 선형훈이다. 이날 연주는 무엇보다 테크닉과 음악성을 넘어 그들 존재의 바탕에서부터 나오는 깊은 사랑이 청중의 마음을 두드렸다. 마치 깊이 흐르는 강물처럼 그들이 공유하던 추억과 시간이 음악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지난 6월 7일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에서 30년 우정으로 만들어낸 아티스트들의 감동의 하모니가 펼쳐졌다. ‘선형훈과 친구들’. 무대에 연주자가 하나씩 오른다. 피아니스트 김대진, 첼리스트 배일환, 비올리스트 장중진. 그리고 주인공 바이올리니스트 선형훈이다. 이날 연주는 무엇보다 테크닉과 음악성을 넘어 그들 존재의 바탕에서부터 나오는 깊은 사랑이 청중의 마음을 두드렸다. 마치 깊이 흐르는 강물처럼 그들이 공유하던 추억과 시간이 음악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30년 전, 줄리아드 음악원 사나이들

이들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올리니스트 선형훈은 5살 때 처음 바이올린을 잡았다. 13세 때 이미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그는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 예비학교로 유학하여 이츠하크 펄먼과 정경화를 키워낸 명교수 이반 갈라미언 교수를 사사한다. 당시 그는 하루 종일 연습에만 매달릴 만큼 음악에 정진하던 모범생이었다.

“테이프 오디션을 통해 갈라미언 교수님께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후부터 바이올린에 매료되었어요. 교수님도 그런 저를 무척 아껴주셨고요. 교수님은 하루 종일 레슨만 할 정도로 가르치는 일에 소명을 다하셨죠. 연습을 굉장히 중시하셨고 엄격하셨어요. 사춘기였던 저는 낯선 미국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바이올린도 무척 열심히 했죠.”

그러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쳤다. 그의 멘토였던 갈라미언 교수가 갑자기 타계한 것이다. 어린 소년에게는 큰 등대를 잃은 것 같은 상실이었다.

“우울한 시절을 보내고 있을 즈음 한국에서 하나둘씩 새로운 유학생들이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장중진 선생, 그리고 김대진 선생, 그 후 배일환 선생이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했죠. 전 이미 유학하고 시간이 꽤 흐른 때였는데 그 친구들의 등장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기쁨을 선물 해주었죠. 모두 막 유학을 와서 정말 열심들이었어요.”

낯선 땅에서 고국의 친구들을 만난 반가움은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그들은 늘 함께 모였고, 같이 다녔다.

“저희 집이 우리들의 아지트였어요. 모여서 트리오도 연주하고 공부하고 유학 생활의 어려움도 토로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죠. 서로의 힘듦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린 말하지 않아도 잘 통했고 그래서 더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요.”


▲ 어린 시절의 선형훈, 갈라미언 교수와 함께하는 모습

청춘의 방황

좋은 친구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지만 당시 음악적으로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선형훈은 줄리아드 음악원을 휴학하고 유럽 네덜란드 프리칼리지에서 2년을 빅토르 리버만 교수와 함께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바뀐 환경에서 음악의 새로운 해석과 다양한 연주 기법을 연구하여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 스승인 리버만 교수는 훌륭한 연주자이면서 오케스트라의 악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음악의 폭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럽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죠. 연습하다 창밖을 보면 평화로운 목장이 보이고 들과 산이 보였어요. 조용하게 연주에만 매달릴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 왠지 유럽 그런 분위기도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학업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달라진 학교 환경과 관심이 없는 몇몇 과목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힘든 순간의 이유는 다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너무 음악에만 매달려 지내서 그런지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결국 많은 고민 끝에 바이올린을 접기도 결심했죠.”

바이올린을 하지 않았던 시간. 처음엔 어느 정도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음악 이외에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연주는 하지 않았지만 다른 연주 공연은 자주 다녔다. 음악을 무대가 아닌 삶 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샌가 그를 힘들게 했던 음악이 웬일인지 편안한 친구처럼 느껴졌다.

알에서 깨어난 시간

돌이켜 보면 악기를 하지 않고 보냈던 시간은 선형훈을 알에서 깨어나게 한 시간이었다. 그는 그 시간을 건너며 비로소 연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음악과 만났다.

“일본과 하와이에서 음악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지냈지만 늘 마음속에 열정적으로 추구하던 걸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감이 있었어요. 진정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죠. 그리고 문득 알게 되었어요. 제가 추구하고 싶은 건 결국 음악이었다는 걸요.”

청춘의 시절, 인생의 소중한 스승을 잃은 그는 비로소 다시 자신을 구원해 줄 음악과 만났다.
“아마 어렸을 때는 변화를 받아들일 힘과 용기를 갖기엔 지고 있던 짐들이 너무 무거웠던 것 같아요. 가끔은 어린 시절 다른 경험도 하고 여유를 갖고 음악을 대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다 지난 일이지만 그랬다면 이렇게 멀리 돌아오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게 음악이 진짜 음악으로 들리기 시작할 무렵, 이상하게도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주를 다시 해 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해 왔다. 아내도 “바이올린 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며 그를 응원했다. 연주는 병원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대전 선 병원 문화이사로 재직 중인 그는 몇 년 전부터 병원 로비에서 환자들을 위한 음악회를 통해 마음을 나누는 연주를 통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세상에 다시 나왔다. 지난 7월 1일에는 대전문화의전당에서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35을 연주했고 오는 8월 26일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에서 독주회를 갖는다.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음악 자체가 위로예요. 얼마 전에는 말기 암으로 세상과의 작별을 앞둔 첼리스트를 앞에 두고 연주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음악이 이런 것이구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이 생명 앞에선 별 의미가 없는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잃어버린 시간만큼 이제 음악으로 더 의미 있는 것들을 채워가고 싶어요.”


▲ 선형훈과 친구들 공연(피아노 김대진, 첼로 배일환, 비올라 장중진)

다시 무대에 올라

2016년 6월 7일, 신동 음악가로 불리던 줄리아드 음악원 사나이들이 다시 모였다. 이제 50대 중년이 된 피아니스트 김대진, 첼리스트 배일환, 비올리스트 장중진. 모두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청춘의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이다.

“제가 다시 악기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김대진 선생이 그때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서보자고 제의를 했어요. 너무 고마웠죠. 다시 친구들과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어요. 제 곁을 둘러싸고 브람스 트리오를 함께 연주할 때, 그 옛날 브람스 트리오를 연주하던 그때 그 친구들이 이렇게 훌륭한 연주자가 되었구나 싶어 가슴이 먹먹하더군요. 힘들었던 유학 시절의 시간들이 그들을 이렇게 좋은 연주자로 키워냈구나 싶었고요. 그날 음악 안에서 추억하고 사랑하고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정말 행복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친구들이 무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선형훈의 솔로 연주가 앙코르로 흘러나왔다. 퐁세의 ‘나의 작은별’. 그는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반짝이며 빛났던 희망을 연주 속에 담았다.

멀리 돌아온 길. 거기엔 그의 삶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친구들과 음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이제 자신만의 이야기로 화답할 수 있다면 멀리 돌아온 시간 역시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을 내려올 때 보곤 하니까.

사진 강태욱(Workroom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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