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엘리아후 인발 & 피아니스트 올가 케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8월 1일 12:00 오전

음악이라는 세계에 흠뻑 취한 두 음악가가 서울시향과 함께 들려줄 여름밤의 브람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오는 8월 24·25일. 지휘자 엘리아후 인발과 서울시향 그리고 피아니스트 올가 케른이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 양일간 브람스 교향곡 2번과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연주한다.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아 서울시향을 지휘한 엘리아후 인발(Eliahu Inbal)과, 지난 2008년 이후 두 번째로 한국을 찾는 피아니스트 올가 케른(Olga Kern). 두 사람의 삶과 예술, 그 깊은 곳에 자리한 ‘음악’을 들여다보았다.

지휘자 엘리아후 인발, 모든 것은 ‘깊이’에서 비롯된다

이제는 전설이 된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디바케, 귄터 반트는 생전 브루크너 전문가로 여겨졌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또한 브루크너 교향곡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지닌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말러의 교향곡을 실황 영상이나 음반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음악 색깔이 강했던 까닭도 있지만, 우직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기질은 감정 기복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러의 음악과는 잘 맞지 않았으리라.

“브루크너가 삶과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은 보편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관념적입니다. 어린 시절, 나는 종교적인 묵상에 몰두하곤 했는데 이는 브루크너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었죠. 삶과 죽음, 자연과 종교에 대한 우주적인 명상은 브루크너 음악의 정수와도 같아요. 이에 비해 말러는 음악적 표현에 있어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서전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작곡가의 음악은 비슷한 형식의 거대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서로 대립하며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죠.”

엘리아후 인발의 말처럼 상반되는 두 작곡가 브루크너와 말러를 비슷한 시기에 음반으로, 그것도 전집으로 발매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발은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과 함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마라톤 녹음을 진행하며 평단과 애호가를 놀라게 했고, 두 음반을 모두 명반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올해 초, 베네치아와 파리에서 열린 그의 여든 번째 생일 축하 콘서트는 모두 브루크너의 곡으로 채워졌다. 인발은 그 어렵다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 4번 ‘로맨틱’, 8번의 오리지널 버전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지휘자이기도 하다.

브루크너는 10여 년을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한 오스트리아 린츠의 성 플로리안 성당에 고이 잠들어 있다. 성당의 신비로운 신성(神性)은 브루크너 음악의 본질과도 같다. 말러 또한 유년기에 이글라우의 성당에서 신을 만나며 교회음악의 기본기를 다졌다. 어린 시절 카발라(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에 심취하고, 명상에 잠기곤 했던 인발과 궤를 같이한다. 인발은 브루크너와 말러가 그랬듯, 종교성과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두 작곡가의 전집을 완성했고 브람스·슈만·쇼스타코비치·스크랴빈·스트라빈스키 전곡 사이클을 이뤄낸 것이다. 그의 이름인 ‘엘리아후’는 구약성서의 ‘엘리야’ 선지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래 가족의 성은 ‘요세프(Joseph)’였다. 이름에 삶과 신념을 담은 그의 정체성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보통의 경우 요세프를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알고 있죠. 그래서 사람들은 성과 이름을 혼돈하여 나를 ‘조시(Jossi)’나 ‘엘리(Elli)’로 부르곤 했습니다.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나서야 성을 ‘인발’로 바꿨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종(鐘)의 추를 뜻합니다. 종은 추가 있어야 소리를 낼 수 있는데 오케스트라를 ‘종’으로, 나를 ‘추’로 여겼기 때문이죠.”

그가 7살이 되던 해, 삼촌이 합판에 줄을 달아 기타 겸 바이올린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가족은 악기를 가지고 노는 인발을 보고, 누이가 다니던 음악학교에 데려갔다. 인발의 천재성은 청음 테스트에서 단연 돋보였고, 정식으로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많은 유대계 음악가가 1932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서유럽에서 이스라엘로 피신했다. 그중 한 명이 인발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던 로런드 페니베시다. 그는 유럽에서 넘어온 음악가들이 모여 만든 팔레스타인 심포니(현 이스라엘 필하모닉)의 초창기 악장이기도 했다.

“나의 첫 번째 스승은 기돈 뢰어였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사람이었죠. 당시 많은 선생님이 서유럽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유럽의 문화와 전통을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주었습니다.”

인발은 훌륭한 전축을 소유한 집에서 매일같이 서유럽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었다. 동양적 배경의 가족과 친적, 종교적인 신념, 그리고 서유럽에서 이주한 여러 스승으로부터의 가르침은 인발을 코스모폴리탄으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 음악원에 입학한 인발은 번스타인의 추천으로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루이 푸레스티에·나디아 불랑제·올리비에 메시앙을 사사하고, 네덜란드 힐베르쉼에서 페라라를, 이탈리아에서 첼리비다케를 만나 음악 세계를 확장해나갔다. 1963년 26세에 불과한 젊은 지휘자가 이탈리아 노바라에서 열린 귀도 칸텔리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인발은 본격적인 지휘자 활동을 시작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지휘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프랑코 페라라는 직관과 무의식이 표현해내는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첼리비다케와 루이 푸레스티에를 만났습니다. 첼리비다케는 음악을 대하는 방법론적이고, 과학적인 접근법을 가르쳐주었죠.”

인발은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수석지휘자를 역임했다. 오페라 지휘의 한 획을 그은 시절이었고, 2007년에는 음악감독으로 임명됐다. 벨칸토에서부터 현대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그의 오페라 해석은 이미 현지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오페라 데뷔는 1969년 볼로냐 시립극장에서 지휘한 R.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였습니다. 같은 해 베로나 아레나에서 베르디의 ‘돈 카를로’도 지휘했죠. 라 페니체 극장 시절에는 베르디와 도니제티는 물론 쇤베르크까지 레퍼토리를 확장시켰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발과 일체를 이룬 악단은 바로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이었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밀월 관계를 맺은 인발과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은 브루크너·말러·쇼스타코비치 등 숱한 작곡가의 전곡을 연주했고, 음반으로 남겼다.

오는 8월, 그는 서울시향과 브람스 교향곡 2번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브루크너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브람스의 음악에는 자연과 범신론 같은 종교적 요소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자유와 예술, 무너지지 않는 휴머니즘은 언제나 공포정치와 독재를 이겨왔습니다. 예술은 영혼과 감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구쳐야 합니다.”

인터뷰 말미, 인발이 힘주어 말한 이 메시지는 그의 음악에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피아니스트 올가 케른, 모든 것은 ‘진심’에서 비롯된다

1975년 봄, 올가 케른은 위대한 음악가들과 친분을 나눠온 러시아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였던 케른의 고조할머니는 차이콥스키에게 작품을 헌정 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성악가였던 증조할머니는 라흐마니노프의 반주로 연주 여행을 다니곤 했다.

집안의 피를 물려받은 올가 케른은 서울시향의 ‘러시아 명곡 시리즈’의 일환으로 2008년 서울을 찾았다. 당시 그녀는 밴 클라이번 콩쿠르의 우승을 결정지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선택해 라흐마니노프 스페셜리스트다운 해석과 무대 장악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8월, 예술의전당에서 다시 한 번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선보일 올가 케른을 이메일로 만났다.

엘리아후 인발의 지휘로 서울시향과 협연할 예정입니다. 이전에도 인발과 함께한 적이 있나요?

엘리아후 인발과는 2008년 프랑스 리옹에서 한 차례 협연한 적이 있어요.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연주했는데, 정말 잊을 수 없는 무대였죠! 그는 이 시대의 위대한 지휘자이고, 존경받아 마땅한 음악가입니다.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영광이에요. 이번 서울 공연에서도 동일한 곡을 협연할 예정이라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두 번째 내한을 앞두고 있습니다. 소감이 어떤가요?

2008년 내한했던 때가 떠오르네요. 아름다운 풍경과 문화, 맛있는 음식,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서울은 참 매력적인 도시였죠. 다시 한 번 서울을 방문할 수 있어 영광이고, 이번 무대를 통해 여러분과 또 어떤 소중한 추억을 공유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얼마 후 미국 뉴멕시코에서 제1회 올가 케른 콩쿠르가 개최된다고요.

콩쿠르는 뉴멕시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측에서 먼저 제안해왔습니다. 그들은 기획 중인 음악 프로젝트에 내 이름을 사용하고 싶어 했고, 나는 그 프로젝트가 유능한 어린 연주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할 수 있다면 기꺼이 사용해도 좋다고 답했죠. 콩쿠르는 오는 11월 개최됩니다. 생각보다 많은 연주자가 관심을 보내왔고, 만 18세부터 32세까지의 참가자를 심사할 예정입니다.

콩쿠르 참가자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요?

먼저 ‘가장 당신다운 음악을 연주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절대 심사위원을 위해 연주해선 안 됩니다. 심사를 위한 무대도 결국 자신의 무대에요. 최선을 다해 가장 자신다운 음악을 들려주기를 바랍니다. 또 콩쿠르는 다른 연주자들의 음악을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연습과 연구를 거친 자신만의 음악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경이로운 일이죠. 저는 운 좋게도 호로비츠나 리흐테르, 밴 클라이번 같은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회를 직접 볼 수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음악 인생에 많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이 전부 트로피나 상금을 가져갈 순 없겠지만, 부디 그보다 더 빛나는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인 블라디슬라프 케른도 현재 뉴욕에서 피아노를 전공 중이죠. 이로써 5대에 걸쳐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이 됐습니다.

블라디슬라프는 영리하고,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피아노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악기입니다. 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그래왔듯, 아들도 태어나서부터 음악을 접했기 때문에 그의 선택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그러나 아들이 가족의 대를 이었다거나, 음악을 전공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을 찾았다는 사실이 엄마로서, 또 인생 선배로서 행복할 따름입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을 방문해 일 년에 100회 정도 무대를 갖습니다. 모든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지요?

내 삶의 원동력은 음악을 향한 ‘열정’입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나를 다시금 피아노 앞에 앉게 만들죠. 음악은 내가 태어난 이래로 쭉 함께했고, 어려운 순간마다 곁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연주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다면?

음악가로 살아오는 동안 주변 지인이나 내 음악을 사랑해주는 팬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황홀한 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일을 글로 쓰기 시작했죠. 내가 겪은 소중한 추억을 모아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음악을 들려주는 삶은 어떤가요?

음악가에게 있어 세계를 돌아다니는 일은 숙명과도 같아요. 국적은 중요치 않죠. 우리는 한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닌 ‘세계의 시민’이니까요. 낯선 장소와 문화, 새로운 사람을 접하는 일은 언제나 내게 커다란 영감으로 돌아옵니다. 많은 이들과 위대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에요. 음악가로 살아가는 매 순간이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앞으로 목표나 계획이 궁금합니다.

음악과 관련된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와 제 음악을 아껴주는 수많은 친구를 놀라게 하기 위해 지금은 비밀로 하고 싶어요. 다만, 앞으로 진행될 여러 프로젝트가 굉장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밝힐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여러 모로 저는 참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음악이라는 놀라운 세계가 언제까지나 제 삶과 함께하길. 지금 바라는 건 단 하나, 그것뿐입니다.

글 정원 인턴 기자

사진 서울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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