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우리네 삶의 어제와 오늘을 살피는 변두리 산책자의 시선
김은성의 펜촉엔 스쳐 지나갈 법한 우리네 삶을 생생하게 파고드는 힘이 있다. 조심스럽게, 또 거침없이 한국사회의 이면을 그려낸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마주하게 돼 답답하고 가슴이 아릴 때도 있지만, 결국 자연스러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우리 사회를 함께 돌아보게 만든다.
2006년 ‘시동라사’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김은성은 희곡의 길로 들어섰다. 소식이 끊긴 딸을 찾아 한국으로 온 조선족 이야기 ‘연변엄마’(2011)를 통해 대산창작기금을 받았고, 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탈북 여성을 다룬 ‘목란언니’(2012)로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과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2012년 가을엔 두산 연강예술상 공연 부문에 이름을 올린 그는 창작 못지않게 재창작으로도 이목을 끌었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1970년대 잠실에 사는 노총각으로 묘사한 ‘순우삼촌’(2010)부터 윌리엄스 ‘유리동물원’을 옥탑방 세입자 이야기로 바꾼 ‘달나라연속극’(2012), 시모비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6·25 전쟁통으로 옮겨온 ‘로풍찬 유랑극장’(2012)까지. 시공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고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졌다.
거의 매년 신작을 발표해온 김은성에게 두 작품을 동시에 올리는 이번 가을은 더욱 특별한 계절이다. ‘썬샤인의 전사들’(9월 27일~10월 22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과 서울시극단 ‘함익’(9월 30일~10월 16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이 관객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 전자는 전장의 참호 속에, 만주 위안소의 쪽방에, 감옥 속에 갇힌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더듬고, 후자는 12세기 햄릿을 한국 재벌가의 딸로 바꾼 독특한 설정으로 오늘날 고독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본다.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 지금 여기’의 삶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충분히 한 명의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창작과 재창작을 오가며 끊임없이 역사를 돌아보고, 오늘을 들여다보는 극작가 김은성.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여자 햄릿 ‘함익’, 근현대사를 다룬 ‘썬샤인의 전사들’
그간 해외 희곡을 한국 배경으로 꾸준히 재창작해왔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원전 희곡이 지닌 감동과 깊이를 지금 ‘우리 관객’에게 ‘우리의 이야기’로 말해주고 싶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개인적으로 번역체를 읽는 것을 어려워해서 마음에 와 닿는 해외 작품을 만날 기회가 드물다. 어렵사리 작품을 발견하면 빼놓지 않고 공연을 보는데, 성에 차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작품이 별로여서가 아니다. 일종의 괴리감 때문이다. 실제 이야기처럼 다가오지 않는달까. ‘왜 내 옷 같지 않은 느낌이지?’라는 질문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재창작은 창작 희곡을 쓰는 것만큼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배 아파 낳은 자식 같진 않다. 그래서 요즘엔 이왕 같은 노력을 들일 거면 창작 작품을 쓰려 한다. 이미지가 재창작으로 굳어지는 것 같아 경계하고 있기도 하고. 그럼에도 아직까진 굉장히 즐거운 작업이다. 한 편의 희곡을 이보다 더 깊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이번에도 햄릿을 100번 정도 읽은 듯하다.
서울시극단 ‘함익’에선 12세기 덴마크 왕자 햄릿을 오늘날 한국 재벌가의 딸 함익으로 설정했다. 재벌가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상당히 흥미롭다.
햄릿은 왕정 시대의 왕자다. 2016년 한국에서 그런 왕정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어딜까? 조직폭력배 아니면 재벌가다.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 재벌가에 햄릿과 같은 2세가 등장하면 재밌겠구나, 생각하고 막연히 플롯을 짰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가 큰코다쳤다. 체계적인 법이 있고 경찰이 있는 지금의 관점으로 성립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복수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장치가 그만큼 많은데, 누가 복수를 위해 자신을 파멸시키겠나. 햄릿과 같은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시대다. 고민하던 찰나 이선 호크 주연의 ‘햄릿 2000’을 봤다. 처음 구상한 플롯 그대로였다. 실제로 구현된 모습을 보니 정말 재미없더라.(웃음) ‘햄릿’의 플롯은 이미 죽은 플롯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승부해야 할까? 처음부터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행간에 숨어 있는 햄릿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문에 드러나지 않은 순간에 그가 무얼 하고 있었을지 더듬어가다 보니, 이 친구가 참 고독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적이고 거대한 복수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 마음이 병들어 있는, 한 사람의 주저하는 인간으로 보였다. 그때 여성 햄릿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햄릿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명백한 중심 질문이자 낡디낡은 유물을 버렸다.
플롯은 함익의 심리를 따라 구성된다. 함익의 외면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고독함으로 몸부림친다. 이를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번 공연의 영어 제목이 ‘거지들의 비극’(Tragedy of Beggars)이다.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지 못할 때 생겨나는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함익은 돈도 많고 배운 것도 많고 화려한 삶을 살지만, 그 모습은 가면에 불과하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사람과 솔직한 마음을 주고받는 법을 모르는 인물이다. 내적으로 곪은 현대인이다.
또 다른 무대 ‘썬샤인의 전사들’은 위안부 사건부터 제주 4·3항쟁, 보안사, 세월호 등 시대별 사건, 사고를 다뤘다. 소재를 택하고 구상해온 과정이 궁금하다.
3년 6개월 전에 처음 구상했고, 올해 탈고했다. 굉장히 힘들고 아프게 쓴 작품이다. 한국전쟁에 관해 읽다가 당시 갇혀 죽은 아이가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억울한 죽음은 이뿐 아닐 것이다. ‘썬샤인의 전사들’은 자신의 딸을 잃고 절필한 소설가가 곳곳에 갇힌 아이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변화를 겪는 내용이다. 이 플롯을 빌려 ‘우리의 역사는 왜 이토록 참담하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다 집필 도중 세월호 사건을 겪었고, 내 자신이 너무 무력하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글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수없이 반문했다. 그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정치적 담론에 오르내릴 만한 민감한 사건을 한꺼번에 다뤘는데.
정치적 주제나 역사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걱정이 꽤 많았다. 어떤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함으로써 사람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닌, 이해하고 감동시키기 위한 과정이 예술이다. 이 작품 역시 누군가를 미워하고 고발하고 비판하려는 마음으로 쓴 내용이 아니다. 그렇기에 관객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삶의 변두리, 그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
그동안 한국 사회의 소외된 삶을 조명한 작품들을 주로 써왔다.
연극은 다른 미디어에서 다뤄지지 않는 것들을 다루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삶의 변두리와 그 불편한 이야기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을 거면 극작을 할 이유가 없다. 대본료도 가장 싸고,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사람의 수도 적고. 누구나 불편하지 않으면서 재밌게 볼 수 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다면, 드라마 작가가 됐을 거다.
같은 맥락에서 환경미화원, 마담, 탈북자 등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사투리와 업계 은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모습들이 무척 인상적인데, 극작을 위한 자료 수집은 어떻게 이뤄지나?
연극에서 기댈 것은 오로지 배우뿐이다. 배우가 잘할 수 있고 현장에서 재미를 살릴 수 있는 요소를 동원해야 한다. ‘살아 있는 말맛’도 그중 하나다. 사투리를 많이 넣다 보니 이제 전라도나 경상도 어휘 정도는 구사할 수 있다. 이후에 전문가의 검수를 거친다. 은어는 관객에게 믿음을 주는 좋은 방법이다. 관객은 배우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 그들이 진짜로 해당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믿게 된다. 그래서 그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꼭 사용한다. 자료 조사는 철저하게 하는 편이다. 평소에는 도서관을 자주 가는데,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많이 찾는다. 막노동판의 은어는 현장을 나가는 지인에게 배웠고, 화류계 이야기가 등장하는 ‘목란언니’의 경우에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어 고민하던 중에 ‘밤문화사전’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유료로 다운로드해 많은 도움을 얻었다.(웃음)
근현대사를 다룬 희곡을 쓰면서 주의 깊게 본 작품이 있는지?
‘썬샤인의 전사들’을 쓰며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2015)에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부역자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수용소’라는 폐쇄적인 시공간을 다루는 시선이 독특했다.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스펙터클 중 하나인데, 이를 다루는 기법이 뛰어났다. 사람을 죽이거나 고문하는 장면에서 일부러 초점을 흐린다거나, 시선을 주인공의 표정으로 모은다. 감독에게 중요한 건, 인물의 심리이고 마음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그런 세련된 관점이 훌륭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대본 창작은 잠시 미뤄두고 유럽으로 공연을 보러 떠날 생각이다. 다녀와선 극본 수정에 매달릴 것 같다. 연말에 극단 달나라동백꽃의 ‘연변엄마’가 재공연될 예정인데, 5년 전 작품이라 대본이 너무 낡았더라.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빨리 변한다는 증거다. 작품 속의 엄마와 같은 순수한 연변인들이 많이 사라진 바람에 긴장하며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올해의 활동은 ‘연변엄마’를 올리는 것으로 정리되지 않을까.
사진 두산아트센터